<83>
콰직!
“다음.”
그 말에 도시 전체에 서린 신성광휘가 찬란히 빛났다.
축복받은 땅.
신성도시 요정향.
성좌들에게 멸망하기 전, 온전했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곳에서 성진은 어스름 세계의 자신들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이다음부터는 지금의 선생님보다 더 많은 카르마를 지닌 선생님들이 불려올 텐데요.
“걱정 마라. 용왕파천무를 완성하기 전까지의 내 실력으로는 지금의 나를 이길 수 없을 테니.”
어스름은 넓다.
때문에 이곳에서 무언가를 얻어가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카르마를 맞춰 원하는 것이 있는 곳으로 떨어져야만 했다.
그러나 성진은 달랐다.
부서진 탑에 남아 있던 차원문으로 요정향에 넘어온 그는 티타니아를 통해 온전한 상태의 요정향을 손에 넣었다.
어스름에 있는 과거의 요정향을, 현실에서 온 미래의 요정공주가 장악한 것.
이것으로 위대한 요정문명의 힘을 손에 넣은 그는 어스름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그는 이 힘을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돌아다니는 대신, 반대로 필요한 것을 요정향으로 불러오기 시작했다.
“이미 나는 보상을 들고 나갈 권한을 썼다. 하지만 물질적인 것을 들고 나갈 수 없어도, 경험은 얻을 수 있지.”
그리고 경험은 카르마로 나타난다.
-그럼 다음은 마계유희 당시의 선생님입니다.
성진은 수많은 자신들의 시체 위에서 소환진이 펼쳐지는 것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불려나온 것은 무명왕의 흔적을 추적하던 시절의 자신.
‘저 이후 에렉투스에 내던져져서 성좌를 쓰러뜨리고 청동망치를 손에 넣었지.’
즉, 저기 있는 자신은 신성을 목전에 둔 초월 최종단계의 자신이었다.
반면 지금의 그는 카르마를 잃었으나 잠시나마 청동망치를 소환할 수 있는 상태.
“이제야 좀 괜찮은 녀석들이 나오는군.”
요정향의 힘을 빌린 티타니아에 의해 강제로 소환된 주성진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눈앞의 자신을 노려보았다.
“네놈은 뭐지?”
“가짜는 알 거 없다.”
그와 동시에 두 초월자가 격돌했다.
두 사람의 전투는 티타니아조차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너무 빨랐기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 둘이 격돌할 때마다 터져 나가는 검강이 주변을 완전히 갈아 버렸기 때문.
신성광휘를 닮은 그 절대적 검기는 시각은커녕 마력을 감지하는 육감까지 가려 버렸다.
이러한 전투에서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는 방법은 오직 카르마뿐.
그러나 카르마를 다루는 능력에 있어선 지금의 성진이 과거의 성진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어딜 보는 거지? 그건 내 잔상이다.”
카르마를 오인하게 해 공격을 유도한 성진은 그 즉시 반격으로 상대의 심장을 찔렀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아니, 용이라도 멀쩡하지 못할 일격.
그러나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쿠구구구구구!!!
[<거신왕의 구도자(신화)>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불굴의 투지(전설)>의 효과로 모든 피해가 회복됩니다.]
마계로 넘어가기 전, 거인의 언덕에서 얻었던 두 카르마가 발동했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꿰뚫린 심장이 회복하며 신체능력이 폭증했다.
“핫!”
상대가 주먹을 뻗은 순간 성진은 외마디 외침과 함께 요정향에 지하터널을 만들어내며 날아갔다.
신성광휘로 보호되는 도시를 박살낼 정도의 위력.
단순히 힘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해지는 상대는 오랜만이었다.
“그래, 그 정도는 해줘야지!”
힘도 속도도 상대가 자신보다 위였지만 자신에겐 기술이 있었다.
상대는 성진을 땅속에 처박아놓고 추격타를 먹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코앞까지 다가와 축을 잡고 휘둘러 찬 발차기.
‘분명 지금의 나보다 빠르고 강력하지만…….’
땅 속에 처박아 버린 적을 쫓기 위해 정면으로 달려든 이상, 공격해올 방향은 하나뿐.
그렇다면 타이밍만 맞추면 된다.
상대에게 맞춰 똑같이 날린 발차기.
두 사람의 다리가 허공에서 교차했다.
‘어설픈 반격을 시도했다간 상대가 정면승부를 포기하고 물러난다.’
신체능력의 차이를 생각하면 상대는 지금 당장 다리를 거두고 주먹을 날려도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그러니 똑같이 발차기에 나선다면 상대는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에 나서리라.
같은 발차기로 승부한다면 신체능력이 높은 자신이 유리하다 생각할 테니.
그러나 서로의 다리가 맞닿은 순간, 성진은 축을 비틀어 상대의 다리를 얽어맸다.
큰 힘을 다루는데 특화된 용왕파천무의 묘리가 상대의 힘을 전부 받아낸다.
그 힘은 그대로 성진의 힘이 되어 축이 된 반대쪽 다리로 옮겨갔다.
오른발을 상대에게 얽은 상태로 뛰어오른 성진은 왼발로 상대에게 날아 차기를 먹였다.
파아앙!!
기술의 차이로 힘의 차이를 잡아먹어 버린 카운터.
‘내가 용왕파천무를 완성한 것은 무명왕의 진전을 이은 뒤의 일.’
사룡왕이 만들어낸 이 무공은 분명 강력했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성진은 용의 무공을 인간인 자신에게 맞게 변형하고, 스스로 다듬어 완성했다.
<용왕파천무의 종주(전설)>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완성된 그의 무공은 그 자체로 전설급 카르마가 되었다.
전설급 카르마에 도달한 무공은 이미 일개 기예라 여길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한정소환, 1초.”
성진의 손에 나타난 망치가 거신왕의 카르마로 강화된 상대의 육체를 파괴한다.
초월자들의 전투는 그 강력함만큼이나 빠르게 결정났다.
[당신의 행동이 영혼의 업(業)으로 쌓입니다!]
[영웅 등급의 카르마를 획득합니다.]
[<스스로를 뛰어넘은 자(영웅)>를 획득하셨습니다.]
영웅급 카르마를 얻었다는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지만 성진은 가볍게 무시했다.
“다음.”
이어서 성진은 에렉투스 시절의 자신, 요정향 시절의 자신 등을 차례로 격파하고 위업을 쌓아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여덟 왕 모두의 인정을 받고 그들의 대전사가 된 자신을 마주했다.
-선생님 이번엔 저도 도울게요!
“아니, 물러나 있어라.”
-하지만!
온전한 상태의 카르마와 제약 없이 무제한으로 다룰 수 있는 청동망치를 지닌 주성진.
이제는 경험의 차이조차 미미한 수준까지 올라온 상황.
지금의 상태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쪽은 싸우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었다.
“보고 있겠지. 엘드리치.”
이만큼이나 일을 벌였으면 어스름의 사룡왕 또한 현실에서 넘어온 이들의 존재를 눈치챘으리라.
“구경은 그쯤하고 나와라.”
그와 동시에 모든 빛이 사라졌다.
빛이 사라졌음에도 마력과 카르마는 여전했기 때문에 성진은 앞을 볼 수 있었다.
공감각적으로 그려진 눈앞의 풍경은 어둡지만 각각의 물체는 밝은 빛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밝게 보이는 어색한 풍경.
마치 명암을 잘못 그린 그림처럼 현실이 어긋난 풍경은 보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긴장하게 만들었으나 성진에게는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사룡왕은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이 성진 앞에 나타났다.
“흔치 않은 손님이 왔구나.”
사룡왕이 등장하자 어스름의 주성진은 무릎을 꿇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사룡왕은 그림자 성진에게 안긴 채 현실의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취한 인간의 몸이 성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저건 그냥 도발이었다.
성진은 굳이 그 도발에 응해주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나와 함께 들어온 동료를 찾고 있다. 너라면 그 위치를 알 수 있겠지.”
“흐응, 얼마 전에 임명한 적 없는 사도가 나타나긴 했는데. 여가 네놈의 길안내를 해줘야 할 이유라도 있느냐?”
어스름의 그림자 사룡왕은 현실의 사룡왕과 달리 주성진을 완전히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녀는 어차피 돌아갈 현실의 존재인 성진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현실의 사룡왕처럼 호의에 기대어 이것저것 받아내긴 힘들다는 뜻.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우리가 들어올 때 천사도 하나 따라 들어왔을 거다. 그 녀석을 주지.”
“천사? 여가 고작 천사 하나를 손에 넣자고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느냐?”
“그 녀석은 케루빔이다. 성좌의 혈족이라는 뜻이지.”
“호오……?”
성좌의 혈족.
그들과 같은 종족의 샘플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사룡왕이 그걸 활용할 곳은 무궁무진하리라.
당연하게도 케루빔은 평소 성좌에 의해 철저히 보호받고 있었으므로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든 희귀한 존재였다.
허나 진짜로 중요한 것은 그 천사가 어스름이 아닌, 현실의 존재라는 점.
“영혼을 내어주겠다는 겐가?”
영혼이 없는 이 세계에 영혼을.
그 말의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어스름의 존재들은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현실로 돌아가려는 영혼을 붙잡아둘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의 존재인 성진이 돕는다면 그것이 가능했다.
“또한 그 녀석은 계약금이다. 내게 협력한다면 더 많은 영혼을 제공해주지. 예컨대 성좌의 영혼이라든가.”
그림자 사룡왕은 미끼에 관심을 보였다.
“현실의 여가 반대할 터인데도? 그 귀중한 신성존재의 영혼을 여가 내어줄 리가 없을 텐데.”
“물론 그쪽에는 비밀이다. 나는 지금 사룡왕이 아니라 ‘너’에게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케핫!”
지금까지 계속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룡왕이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사룡왕에게 사룡왕을 속여먹자 제안하다니.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뒷감당은 자신 있는 겐가?”
“뒷감당을 할 필요는 없다.”
“흐음?”
성진은 그녀에게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자신의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룡왕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진심인가?”
“진심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네 녀석이라면 알고 있을 텐데?”
현실의 사룡왕은 성진을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존재였다.
그리고 그 점은 어스름의 그녀라도 다르지 않으리라.
“모든 성좌를 없애겠다고 했다. 그것은 당연히 지금까지 존재했던 성좌만이 아니라 앞으로 나타날 모든 성좌들을 포함한 말이다.”
“현재의 성좌들만이 아니라, 미래에 또다시 성좌 같은 것들이 나타날 가능성까지 모두 없애 버리겠다?”
“그래.”
“이 세상의 법칙을 바꾸겠다고? 고작 성좌를 없애기 위해?”
천상의 성좌들이 어디 가서 고작 소리를 들을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실제로 현실의 사룡왕 또한 혼자서는 성좌들을 어쩌지 못해 우주의 과반을 내주고 말았으니까.
그러나 반대쪽 저울에 올라온 것이 세상의 법칙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무리 성좌라도 우주의 역사에 빗대어보면 무수한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데 고작 그놈들을 없애겠다고 대우주의 운명을 개변할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카르마는 운명을 개변하는 힘.
근원에 이른 카르마라면 자신의 운명만이 아니라 세상의 운명조차 뒤바꿀 수 있었다.
“신성을 획득했을 뿐인 신성존재가 아니라 유일한 신이 되려하는가.”
자신을 규정하는 것을 넘어 세상을 규정하는 경지.
그 어떤 영혼도 도달하지 못한 지고지순한 자리.
그림자인 그녀는 어떻게 하더라도 원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성진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다면 그러한 운명마저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
“좋다 특이점이여. 그렇다면 여도 너를 돕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