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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부수는 플레이어-115화 (115/170)

<115>

NPC의 몸으로 진행하는 스테이지.

플레이어가 과도하게 강해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만든 이 스테이지에서도, 새롭게 힘을 쌓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구에에에엑.”

진마왕은 버섯 마을에 살고 있던 타락한 파란 난쟁이들을 집어삼키고 마력을 토해냈다.

성진은 하얀 모자들이 둥둥 떠다니는 파란 웅덩이를 보며 남태수에게 말했다.

“들어가라냐.”

“저보고 지금 토사물 위에서 명상하라고요?”

“마시는 게 가장 효율적이겠지만 물배가 차니 봐준 거다냐. 얌전히 들어가서 목까지 담그고 100을 셀 때까지 있어라냐.”

이동하던 중 스테이지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을 발견한 성진은 그것들을 진마왕에게 먹여 마력을 뽑아냈다.

이걸로 남태수가 쓸 마력을 확보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진마왕이 우려낸 특제 마력용액은 아무리 봐도 토사물 같은 비주얼을 자랑했다.

“으엑~ 여기 놈들은 맛대가리 없다. 특이점, 밥은 언제 주는 것이다? 아침부터 굶어서 배가 고픈 것이다.”

“지금 오전 8시인데요……?”

진마왕 덕분에 상점도, 인벤토리도 못 쓰는 이곳에서 마력을 수급할 수 있는 건 좋았지만, 아무래도 토사물에 몸을 담그기는 꺼려졌다.

그러나 성진은 그런 땡깡을 용납하지 않았다.

풍덩!

성진은 고양이의 몸으로도 남태수를 번쩍 들어 올려 웅덩이에 처박았다.

“으겍 퉷퉷퉷!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에요!”

“꼽냐?”

성진은 암만 봐도 고양이 말투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어조로 답했다.

덕분에 남태수는 차마 화를 내진 못하고 조용히 투덜거렸다.

“……장화신은 고양이에서는 억지로 씻기고 나서 옷이라도 구해줬는데.”

“마법으로 말려라.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아니냐.”

마법으로 일으킨 불꽃은 실제 불과 달리 정확히 시전자가 원하는 것만을 태울 수 있었다.

물론 온도를 올리다 보면 마법과 상관없이 진짜 불이 붙어서 주위에 옮겨갈 수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남태수도 조절할 수 있었다.

화륵!

“성냥갑 안에서 원하는 성냥개비 하나만 불태우는 훈련을 한 게 이렇게 쓰이네.”

탕 안에서 마력을 채운 남태수가 밖으로 나오자 검은 불꽃이 일어나 그의 옷에 묻은 물기를 날려 버렸다.

“자신의 마법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으면 스킬밖에 쓸 수 없는 플레이어들과 다를 게 없다냐.”

플레이어는 성좌의 병사로 육성되고 있는 존재.

병사는 총을 만드는 방법 따윈 알 필요가 없다.

그저 쏘는 방법만 알면 될 뿐.

반면 남태수는 달랐다.

“시전만 할 수 있으면 다가 아니다냐. 사령술사라면 소환수에게 통제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마법을 완벽히 구사해야 한다냐.”

“소환수에게 통제권을 빼앗기면 어떻게 되는데요?”

“무르무르는 언젠가 너를 메카 리치로 만들어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냐.”

무르무르는 성진과 계약하여 남태수를 돕기로 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남태수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남태수를 리치로 만드는 게 도움이 된다면 그건 위해로 판정되지 않을게 분명했다.

‘앞으로 성좌나 사도들과 싸울 일을 생각하면 사실 리치가 되는 게 더 유리하긴 하겠지? 그럼 진짜로 통제권을 뺏은 무르무르가 내 명령을 무시하고 날 리치로 만들 수도 있겠고?’

기능적인 측면만 따질 경우 남태수도 리치가 되는 게 옳긴 했다.

물론 남태수는 해당 기능을 위해서 아직 사용한 적 없는 다른 기능을 포기하긴 싫었지만.

“헉.”

“성냥갑 훈련은 통과했어도, 아직 먹물에서 먹과 물을 분리하는 훈련은 막혀 있지냐? 넌 아직 준비가 안 됐다냐.”

남태수는 여전히 기초훈련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

물론 이 ‘기초’는 용들의 기준에서 기초였으므로 평범한 인간 마법사의 기준을 가져다대면 ‘비정상적일 정도로 뛰어난’ 수준이 되겠지만, 남태수가 그 사실을 알 일은 없었다.

그리하여 만나는 몬스터들을 적당히 족치며 이동하던 두 사람은 마침내 다른 플레이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핫 개미 녀석! 무슨 자신감으로 여기까지 온 건진 모르겠지만 나를 만난 이상……!”

기습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당당한 외침과 함께 튀어나온 남자는 남태수를 공격하려다 성진을 발견하고 발을 멈췄다.

“뭐야? 개미가 왜 베짱이랑 같이 다녀?”

개미와 베짱이는 ID의 색으로 서로의 진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반응으로 보아 저 빅 죠라는 녀석은 모종의 방법으로 남태수의 위치를 알고 온 모양이었다.

덕분에 성진이 함께 있을 것을 보고 놀란 상황.

“이 녀석은 내 거다냐. 관심 꺼라냐.”

“성진 씨……!”

남태수는 자신을 지키듯 앞으로 나선 성진을 보며 감동받은 눈을 했다.

“칫, 이미 임자 있는 몸이었나. 하긴 요즘은 개미를 ‘양식’하는 놈도 있는 것 같고.”

“이 스테이지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냐.”

“응? 뭐야, 너희 신입이었냐? 그렇다면 쫄 것 없지. 네놈을 쓰러뜨리고 그 개미를 받아가마!”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한 빅 죠는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성진은 그런 빅 죠를 향해 냥냥펀치를 날렸다.

콰아아아앙!!

“뭐하냐?”

황금룬을 이용한 육체강화.

카르마를 이용한 신성마법은 지구에 올 때처럼 카르마를 초기화한 게 아닌 이상 육체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남태수는 아직 카르마를 마력에 담아야만 쓸 수 있어 마력이 필요했지만, 성진은 딱히 달라질 것 없었다.

“그 몸으로도 룬 마술을 쓸 수 있는 거였어요?”

“너는 영혼을 볼 수 있으면서도 왜 그 소리냐.”

“이런 건 처음 보는 거니까 보고 있어도 그게 어떤 상태인진 몰랐죠.”

성진의 한숨을 본 남태수는 황급히 빅 죠에게 시선을 돌렸다.

“살고 싶으면 지금부터 네가 아는 정보를 모두 털어놔야 할 거다!”

자신이 쓰러뜨린 걸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나서는 남태수의 모습에 성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 * *

“그러니까 개미를 고른 사람들은 몬스터를 잡아 포인트를 벌고, 베짱이를 고른 사람들은 개미를 잡아 포인트를 번다?”

“네! 네! 그렇게 모은 포인트로 ‘겨울’을 쓰러뜨릴 무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겨울이라는 게 일종의 몬스터였어? 단순한 시간제한이 아니라?”

“이번 회차의 겨울은 재버워크라고 하더군요. 오로지 날뜩한 검만이 놈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하던데요. 그 외의 무기는 아무리 강해도 스테이지 효과로 대미지가 안 들어간다고…….”

“그럼 스테이지에 관한 건 그쯤하고. 지금 이 스테이지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은?”

남태수는 빅 죠가 가지고 있던 수첩을 빼앗아 얻은 정보들을 정리했다.

“선생님들께 위협이 될만한 녀석이라면 둘 밖에 없습니다요.”

“둘이나 있다고?”

“……?”

“……?”

남태수는 성진에게 위협이 될만한 플레이어가 둘이나 있다는 소리에 놀랐고, 빅 죠는 그냥 무슨 소린지 몰라서 놀랐다.

“하나는 자토라는 놈입니다. 원래는 마법사였던 놈이 맹인 검객의 몸에 들어가더니 뭔가에 눈을 뜨기라도 했는지 검기까지 쓰고 다녀서 원래 몸보다 더 강한 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흐음……?”

남태수가 그게 뭐가 세다는 건지 몰라 의문에 빠진 한편, 성진은 상황의 특수성을 지적했다.

“맹인 검사라면 시각 대신 육감을 통해 주변을 감지하고 있었을 거다냐. 그놈은 다른 감각이 차단된 육체에 빙의한 탓에 마력에 눈을 떴을 가능성이 높다냐.”

“그놈은 벌써 30년이나 이 스테이지에 눌러앉아 있는 고인물 그 자체입니다! 본캐는 마법사면서 진짜 검술에 미친 새끼에요.”

“30년 동안 한 스테이지에 죽치고 있었다고?”

정말로 그만한 시간을 맹인 검사의 육체로 지내왔다면 얼마나 강해졌을지 알 수 없었다.

“왜 안 나가고?”

“나가면 다시 마법사의 몸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버티고 있다던데요. 그만한 검술을 쓸 수 있는 건 여기서 뿐이니까요.”

“미친놈이네?”

“그러니까요.”

“그럼 다른 한 놈은 누구야? 둘이나 있다며?”

“다른 하나는 아킬레우스예요.”

아킬레우스.

어린 시절 스틱스 강에 담가져 무적이 되었다는 캐릭터.

그런 캐릭터가 이곳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구현되었다면 확실히 치트 캐릭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면 약점이 있을 거 아냐. 아킬레스건 찌르면 죽는 거 아냐?”

“그렇죠. 아킬레스건을 찌르면 죽겠죠. 근데 그 새끼는 아킬레우스 걸리자마자 지 다리를 무릎 밑으로 잘라 버렸거든요?”

“응?”

“그 새끼 어차피 진짜 자기 몸 아니라고 다리 자르고 의족 달고 다녀서 약점이 없어요. 무적이에요 무적.”

이 층에서 빙의된 NPC 육체는 일종의 부캐.

어차피 스테이지가 끝나면 원래 몸으로 돌아갈 테니 다소 막 다뤄도 문제는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자기 다리를 자른다고? 미친놈이네?”

“그러니까요.”

아무래도 이 층은 두 또라이가 지배하고 있는 스테이지인 모양이었다.

“가장 중요한 정보를 빠뜨렸다냐.”

“예? 뭐가요?”

“그래서 그 둘은 개미냐 베짱이냐?”

* * *

“다나라. 처음 듣는 이름이구려. 신입이신가?”

“네. 마계에서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어서요.”

“그 나이에 수라장을 넘어서다니. 대단해.”

“과찬이세요. 노인장의 검술이야말로 보통이 아니신걸요.”

자토는 다나가 끼어 있던 장난감 집을 간단히 베어냈다.

스스로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로 꽉 낀 상태.

그걸 옷자락 하나 찢지 않고 깔끔하게 베어냈으니 평범한 솜씨는 아니었다.

‘특히 힘 싸움에 특화된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더더욱 이런 검술을 보기 힘든데.’

어차피 레벨을 올리면 강해지는 플레이어들은 기교를 크게 중시하지 않았다.

기술대 기술의 싸움보다는 그저 강력한 적을 상대로 힘 싸움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다, 기껏 감각을 날카롭게 갈고닦아도 레벨이 오르면 신체능력이 변화하며 감이 무뎌지기 때문.

‘보통은 집중력과 민첩성 깡스탯으로 묘기 정도나 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사람은 검을 다루는 것 자체가 익숙해 보였어.’

전투에 익숙한 것이 아니라 검에 익숙한 모습.

이는 진정으로 검술을 수련하던 어스름 사제들에게서나 보이던 모습이었다.

‘반면 나는…….’

지금의 자신은 몸이 바뀌어 웨어울프의 힘도 없고, 마력도 부족.

심지어 성검도 없으니 신검합일로 성녀모드를 쓸 수도 없었다.

남은 건 순수한 검술뿐.

‘나는 그동안 제대로 검의 길을 걷고 있었나?’

남태수가 마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듯, 다나 또한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운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심지어 최근에는 웨어울프의 힘을 통제하고 카르마를 다루는 데 집중해 그만큼 검술에 소홀해진 것도 사실.

주위에선 여전히 그녀를 천재라 떠받들었지만, 순수한 검술만 따졌을 때 자신이 충분히 잘 하고 있는가?

전투에는 자신이 있어도 검술에는 선뜻 자신을 내비칠 수 없는 것이 현재의 다나였다.

“그래서. 신입이라면 세력을 선택했을 테지? 어느 곳을 골랐나? 설마 베짱이는 아니겠지?”

“걱정 마십시오. 저는 개미를 골랐으니 제가 노인장을 공격할 이유는…….”

서걱!

그 순간 다나의 목 언저리가 횡으로 그어졌다.

“그렇다면 자네는 나의 적이네.”

목을 가로지르는 붉은 실선.

다나는 아슬아슬하게 검격을 피해내는 데 성공했으나, 앨리스의 치렁치렁한 머리칼은 한순간에 칼같이 잘린 단발이 되었다.

다나는 황급히 거리를 벌리고 손에 쥔 식칼을 역수로 고쳐 잡았다.

“호오? 그걸 피했나?”

“……그만한 실력을 쌓고도 기습이나 하는 겁니까?”

“이건 스포츠가 아니라네. 승부는 실전이야.”

검기의 다발이 다나를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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