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155층은 하나의 층으로 끝나지 않는 연계 스테이지였다.
“남태수 네가 156-B층, 다나 너는 156-C층으로 가라. 내가 A로 가지.”
“여긴 이미 관리자도 쓰러뜨렸으니 나뉘어서 진행하는 게 낫긴 하겠네요.”
수많은 루트로 나뉘어 각기 다른 골을 향해 진행하는 스테이지.
당연히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적도, 시련도, 보상도 모두 달랐다.
그들이라면 어설픈 보상은 거르고 최적 루트로 빠르게 클리어하는 게 유리했으나, 문제는 점수 보상이었다.
“그러니까 얻어야 하는 게 100,000점 보상이랑, 25,700점 보상, 13,000점 보상이죠?”
“100,000점은 내가 채우지. 나머지는 너희들이 맡아라.”
사람마다 다른 루트를 진행하는 스테이지다 보니, 이곳에서만큼은 클리어 기여도에 따른 보상 대신 점수에 따른 보상을 수여했다.
문제는 단순히 고난도 스테이지를 돌파하며 점수를 최대한 올리는 것보다 특정 점수를 맞춰야만 필요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점.
게다가 여기까지 올라온 랭커 플레이어는 그 수가 많지 않아 자토나 아킬레우스를 쥐어짜도 정확한 점수계산이 힘들다는 점이었다.
“태수 아재. 괜찮겠어요?”
“뭘?”
“플러스 마이너스 500점만 빗나가도 보상이 달라져 버리니 정확히 맞추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왜 이래? 너도 13,000점 맞춰야 하는 건 마찬가지면서.”
“저야 1만 점이 최소점이라 루트 두 개만 바꾸면 된다지만 아재는 아니잖아요? 성진 아저씨 10만 점도 그냥 최고점이니 능력만 되면 확정인 점수고.”
“그러니까 내가 가잖아. 소환수가 처치하면 추가 점수 없이 클리어 점수만 받으니까.”
점수를 버는 거야 셋 다 문제없지만, 점수를 낮추는 건 쉽지 않았다.
그나마 사령술사는 소환수가 몬스터를 잡는 경우에는 추가 점수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그가 가장 유리했다.
“여기서 얻어야 하는 재료들은 모두 차원문을 만드는 핵심 재료다. 이것들만 얻으면 당장에라도 차원문을 가동할 수 있는 상태가 되니 반드시 얻어야 한다.”
티타니아가 30층에서 만들고 있는 차원문은 역사상 다시없을 대규모 차원문이었다.
운 좋게 드래곤 하트를 얻은 덕분에 동력원까지 확보를 마친 상태.
“물론 탑의 꼭대기에 올라 천상의 좌표를 얻을 때까지 차원문을 열진 않겠지만, 언제든 열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게 중요하지.”
여차하면 수틀렸을 때 이쪽에서도 병력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은 컸다.
그 말은 성진의 존재가 천상에 알려지더라도 비벼볼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정령들을 붙여줄 테니 데려가라.”
성진이 정령술을 발동하자 자그마한 미니언급 티타니아가 소환돼 다나와 남태수에게 달라붙었다.
성진은 탑의 귓속말 기능을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서로 다른 스테이지로 나뉜 그들이 대화하기 위해선 티타니아의 힘이 필요했다.
“그럼 열흘 뒤, 170층에서 보도록 하지.”
“파이팅!”
* * *
[156-B층으로 이동합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155 > Lv.156]
일행과 헤어진 남태수는 홀로 156-B층에 올라섰다.
“아무리 플레이어를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스테이지라도 원래 몸이 있다면 다르지.”
그동안 열심히 레벨을 올리며 키워온 몸을 버리고 NPC가 되어 진행하는 스테이지.
그 페널티를 덜어낸 이상 자신이라도 고층의 솔로 플레이가 가능하리라.
-흠흠, 이제 기본적인 전투준비는 광고 한편 시간 안으로 끝나는군요. 좋습니다.
“그야 이건 맨날 연습하는 거니까. 상대를 보고 쓰는 마법도 아니라서 빨리 발동하기만 하면 되고.”
드래곤 포스.
온갖 보조마법에 드래곤 피어를 담아 하나로 묶은 버프 마법.
남태수는 스테이지를 넘어오자마자 딴생각을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기습에 대비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며 다양한 마법을 배운 남태수였으나, 그는 결국 1년차 마법사였다.
마법을 빠르게 시전하는 것은 단순한 연습량의 문제였으므로 아직도 그의 시전 속도는 느린 편이었다.
-시전 속도가 느리면 보고 판단해서 쓰는 게 아니라 미리 예상해서 마법을 쓰면 됩니다.
“마법사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기습’에 당하는 게 가장 많다 이거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서 이젠 나도 외웠거든?”
마법을 미리 준비하고 있으면 낭비하게 될 확률이 높다.
그러나 드래곤 하트에 신화급 카르마를 장착한 남태수는 그냥 좀 낭비하는 편이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자, 그럼 가볼까!”
드래곤 피어가 담긴 강력한 저주가 반경 500미터 내에 있는 모든 생물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남태수가 사신의 대낫을 휘두르자 움츠러들어 있던 목들이 일제히 하늘을 날았다.
인형을 공격하면 연결된 대상에게도 피해를 주는 저주.
따로 인형을 준비할 필요 없이 원하는 물건을 저주의 준비물로 삼을 수 있는 특성.
받은 피해를 아군에게 전파하는 저주.
이 세 가지의 상급 저주를 통해 남태수는 허공을 베는 것으로 수십의 적을 한 번에 공격할 수 있었다.
“언데드 생성.”
쓰러진 시체들은 곧바로 남태수의 하수인이 되어 다시 일어섰다.
유령마를 탄 데스나이트와 리치들.
해방된 NPC의 영혼들이 남태수의 군단에 깃들었다.
“진군하라!”
그와 동시에 무르무르가 타이탄 코어를 작동시켜 군대에 무기를 보급했다.
검이나 마법 디바이스는 물론, 총화기에 미사일 컨테이너까지.
당장 밖에 나가 세계정부와 전쟁을 벌여도 사도 빼곤 전부 압도할 수 있는 전력.
군단은 순식간에 스테이지를 휩쓸었다.
156-B 층은 요정족 전장이었다.
그간 탑의 스테이지는 플레이어가 거인족이나 난쟁이, 마족 등과 맞서 싸우도록 유도했다.
다만 비교적 초반부에 등장한 요정족은 저레벨 플레이어를 상대하느라 적이 아닌, 착취자 포지션으로 등장했다.
‘그땐 강제로 광산노역을 했는데. 이제는 내가 그 친구들을 부하로 부리고 있네.’
[이거야 원. 또 허튼 생각을 하는 표정이로구나.]
“앗, 폐하.”
[아직도 이리 약해서야 본격적으로 전장이 열리면 어찌하려고.]
“어차피 천상으로 넘어가서 싸우실 거잖아요? 지구에 있으면 상관없는 거 아닌가.”
[놈들도 들켰다 싶으면 필사적으로 막아설 거 아니냐. 아마 한번은 지구상에서 싸워야겠지.]
“……지구가 남아날까요?”
[운이 좋으면?]
천상과 연합의 전장으로 쓰이고도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에렉투스의 지하대던전 뿐이었다.
그마저도 반파되어서 미완성 데스 스타마냥 박살난 상태로 사룡왕의 콜렉션이 되었다.
난쟁이들의 요새가 그럴진대 일반적인 행성이라면?
누가 이기든 개박살이 나는 것은 확정사항이었다.
“잠깐만요. 이기든 지든 지구는 끝장이라고요?”
[그러니까 운이 좋으면 살아남는대도.]
“운이 안 좋으면 지구인은 몰살이잖아요! 밖에 있는 베르나데트나 다른 사람들은요?”
[난쟁이들에게 피난함 하나 빼두라고 말해둘 터이니 친지들 데리고 용 둥지로 가 있거라.]
“그냥 지구째로 보호해주시는 건 안 돼요?”
남태수에게는 꿈이 있었다.
사회에서 개같이 구르며 언젠가 플레이어가 되어 출세한 뒤, 개 같은 놈들에게 복수해주겠다는 꿈.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을 역으로 무시해주겠다는 꿈이 말이다.
어디 한적한 이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어디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몇 놈 주리는 틀어주고 가야 하지 않겠나?
[가능하지.]
“아니 그러면 그래주시면 되지 왜 빠져 있으라고……?”
[네가 여의 정식 사도가 된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느니라. 그것이 네 소원이냐?]
“아.”
사룡왕의 영업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도대체 왜 저를 그렇게 사도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신 거예요? 말씀하신 대로 약해빠진 인간에 불과한데.”
[반년쯤 열심히 키운 햄스터가 이젠 자립하겠다고 야생에 풀어달라는데 그걸 그냥 보내줄 주인이 어디 있겠느냐?]
“햄스터는 야생에서 못 살지 않아요? 아닌가? 인간이 애완동물로 들이기 전에는 걔들도 알아서 잘 살았을 테니 살 수 있나?”
[네놈도 야생에 혼자 내놓기에는 너무 멍청하고 약해빠져서 금방 죽을 것 같이 생기지 않았느냐?]
솔직히 초월 1단계를 목전에 두고 있는 마법사라면 어디서든 밥값은 충분히 해낼 수준이지만, 사룡왕의 기준은 높다 못해 아득했다.
[최소한 성격 지랄 맞은 신성존재가 시비를 걸어도 엿 먹이고 튈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지.]
“그게 어느 정도인데요?”
[초월 3단계쯤?]
그러니까 마리아나 테레사 정도는 되어야 사람 취급을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냥 사도 말고 아끼는 동생 정도로는 안 돼요? 자유의지를 존중해줄 수 있는 관계로다가.”
[자유의지? 이 세상엔 내 것과 내 것이 될 예정인 것들만 있는데 그런 게 왜 필요하지?]
이미 죽음을 극복한 존재인 사룡왕이라면 진짜로 영원한 시간을 들여 모든 것을 지배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들으면 참으로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인심 썼다. 언데드로 만드는 건 한 천년쯤 생물로서 살고 나서 해줄 테니 그냥 사도 하거라.]
“제가 그만큼 살 수는 있고요?”
[용의 피를 이어받았는데 그 정도야 못할 거 없지.]
천년의 존버라면 에인션트 남태수가 되어 어엿한 드래곤이 될 수 있으리라.
비늘 대신 털이 나 있겠지만.
[아니, 그때쯤 가면 털도 없으려나?]
남태수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이마를 가리며 물러났다.
“혹시 폐하의 마법으로도 이건 어떻게 안 되나요?”
[안 될 리가 있나. 당연히 가능하니라.]
그 말에 남태수가 감동받은 눈빛으로 메시지를 바라보자, 사룡왕은 한마디 덧붙였다.
[정식으로 사도가 되겠다고 말만 하면 영원히 빠지지 않는 육체를 선사해주마. 지금 당장 가입하면 커스터마이징도 무료.]
게임 시스템을 빌리고 있다 보니 말투까지 무슨 게임 광고처럼 변해 버린 모습이었다.
“그럼 폐하께서 지구를 지켜주시는 건 됐고, 제가 알아서 하는 건 상관없죠?”
[음? 네가 성좌들을 상대로 지구를 지키기라도 하겠다는 게냐?]
“예.”
지키는 건 몰라도 빼돌리는 건 가능하다.
‘탑을 만드는 것처럼 하면 되잖아?’
지구상에 나타난 탑은 무슨 궤도 엘리베이터만한 거대한 사이즈를 하고 있었으나, 그 내부는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컸다.
마찬가지로 아공간을 만들어 그것을 주머니 같은 것에 연결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규모 문제는 그냥 그만큼 마력을 더 넣으면 될 일이니.’
지구보다 더 큰 에렉투스도 고작 스테이지 하나로 나오는 판에, 지구를 넣는 게 불가능할까?
“후훗, 절 너무 무시하지 마시죠.”
[꼴 받네.]
-맞습니다. 자신만만한 마스터를 보니 왠지 역겹군요.
“아니 그건 너무하잖아!”
그렇게 떠드는 사이 언데드들이 스테이지를 모두 정리하고 혜자 구간이 끝났다.
그리고.
[160-Ω층으로 이동합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159 > Lv.160]
“응? 여긴…….”
“잘 왔다 마왕 남태수.”
예상치 못한 스테이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