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146화 (146/170)

<146>

남태수는 편지를 보내놓고 뿌듯해했다.

“이거라면 카르마를 조사당할 일도 없겠지.”

전투 중이라면 다소 특성이 드러나는 기술을 쓰더라도 문제없었다.

상대는 그걸 막고 피하고 상쇄해 없애는 데 집중하지, 붙잡고 연구해볼 여유는 없을 테니까.

반면 실질적인 샘플을 넘겨준다면 말이 달랐는데, 때문에 남태수는 전령으로 사용한 스켈레톤이 신시아의 손에 붙잡히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가했다.

스켈레톤으로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건 안 좋다.

탑의 스킬로 만들어낸 스켈레톤은 원래 말을 못 하는데 갑자기 말하는 놈이 나타난다?

뭐하는 놈인가 하고 잡아서 뜯어볼 게 뻔했다.

그러니 편지로 전하되, 편지를 통해 이쪽의 카르마를 엿보지 못하도록 직접 글을 쓰는 대신 모자이크 기법을 활용했다.

“마법을 잘 아는 놈이라면 필체를 가지고도 상대에 대해 조사할 수 있으니까.”

물론 보통은 그 정도로 못한다.

무르무르쯤 되는 마법사가 아니라면 봐도 그냥 범죄심리학적인 접근밖에 못 하리라.

그러나 남태수는 제 한 몸 건사하는데 진심이었기 때문에 열과 성의를 다해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다.

“스켈레톤은 딱 시간에 맞춰서 자동분해 되도록 설정. 괜히 다른 조건을 걸거나 직접 조종하다가 문제될 수 있으니까 이쪽이랑 연결을 끊어놓고.”

모든 작업을 끝내놓고는 무르무르에게 검수도 받았다.

-이 정도라면 저도 못 쫓겠군요. 충분합니다.

“초월자 리치의 인증? 좋다 이건 성좌가 와도 못 잡는다.”

무르무르는 남태수가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인질범의 정석을 보여주는 모습에 감개가 무량해졌다.

-이런 기쁜 날에는 인신공양이라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디 길 가던 사도 하나 없나?

이 정신 나간 짝짜꿍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베르나데트는 소리 없이 오열했다.

‘8대 종족이 딱히 착한 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8대 종족은 그냥 천상에 맞서 손을 잡았을 뿐인 이들이었다.

이들은 전부 우주의 헤게모니를 놓고 다투던 패권종족들이라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악당 같은 면모도 있었다.

굳이 따지면 온 세상에 독립기념일을 뿌리고 다니던 영국 놈들 같은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데트가 이쪽에 남아 있는 건, 반대편인 천상은 그냥 짐승들이라서였다.

이쪽이 그래도 말은 통하는 인간사회 내의 악당들이라면 저쪽은 그냥 인간을 잡아먹는 짐승들이라 답도 없다.

‘그래도 위험한 건 똑같은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탑에 나온 요정족은 겉보기엔 멀쩡해도 속은 또라이 같기로 유명한 놈들이었다.

실제로 티타니아가 성진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이놈들은 좋게 봐줘도 광신도였다.

거인족?

말도 말아라.

어린아이조차 피와 살육을 울부짖는 그 감성은 인간의 도덕관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난쟁이들은 나중에 듣자 하니 본인들 본진이 털리는 와중에도 똥고집을 부려서 망치를 안 주려고 했던 놈들이라고 하고.’

사룡왕은 그냥 마법만 사령술을 쓰는 게 아니라 사람 목숨을 돌같이 알고 제 것만 챙기는 악당이 맞았다.

‘100층 이후의 마계나 다른 곳은 본 적 없긴 한데. 이거 완전 대환장 파티 아닌가? 그냥 얘들이 악당 아님?’

처음 만났을 땐 비교적 멀쩡했던 남태수도 몇 달 못 봤더니 완전히 그들에게 물들어있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주성진교니 뭐니 하며 이들을 추앙하고 있어 이에 대해 이야기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나 양은 지금 흡혈귀 만났다던데 이상한 물이 드는 건 아닌지 걱정이네.’

* * *

“저기 이거…….”

“목까지 담그고 제가 백을 셀 때까지 나오지 마세요.”

피로 이루어진 호수.

황망한 표정으로 아네모네를 바라보던 다나는 결국 벗은 옷을 잘 개어놓고 피 속에 몸을 담갔다.

아네모네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진짜로 다나가 목까지 담그고 나서야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00,041 –100,040 -100,039…….”

“백까지 센다고 하셨잖아요!?”

“1부터 시작한다곤 안 했잖아요.”

아네모네는 다나의 반발을 힘으로 눌렀다.

“피 속에 몸을 담그고 흡혈귀를 상대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랍니다.”

“……!”

아네모네는 피를 조작해 다나의 알몸을 드러내고, 그 위에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야한 속옷을 입혀놓았다.

아무것도 안 입은 것보다 입어서 더 선정적인 복장.

벌떡 일어났던 다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는 곧바로 다시 목까지 푹 담갔다.

“이, 이, 이…….”

“또 일어나면 성진 씨를 불러다가 패션쇼를 할 거니까 얌전히 계세요.”

“네 선생님.”

인정은 빨랐다.

“당신의 피에 손을 대는 건 사실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그게 좋았으면 진작 성진 씨가 직접 하셨겠죠.”

그러나 성진은 다나에게 피의 저주를 이겨낼 만큼 강인해지길 요구했을 뿐, 딱히 혈통 자체를 문제 삼진 않았다.

“괜히 건드렸다가 성좌한테 이쪽의 움직임을 들키느니, 그냥 나중에 다 정리되면 그때 손보는 편이 낫겠죠.”

“그럼 왜 지금은 이러고 있는 건가요?”

“성진 씨는 그냥 혈마술사지만, 저는 흡혈귀 혈마술사니까요.”

흡혈귀에게는 흡혈귀만의 방법이 있었다.

“지금부터 다나 양의 피를 모두 뽑아낼 거예요.”

“예?”

“그리고 여기 있는 피를 대신 집어넣을 거예요.”

“예?”

“피의 저주를 건드리는 게 위험하다면 그냥 건드리지 않고 다 빼두면 되니까요.”

“예?”

다나는 황급히 정신줄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저한테 지금 혈액투석을 한다는 거죠? 아니 아예 통째로 교체하는 거니까 그보다 더 심한 무언가를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네. 수면마취를 해드리는 편이 나을까요?”

진짜냐는 듯이 아네모네를 바라보던 다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네모네는 피에 마취성분을 첨가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흡혈귀가 되지 않고도 흡혈귀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답니다. 시술 성공률이 좀 많이 낮긴 한데 걱정 마세요. 제가 수술했을 땐 100%거든요.”

“성공률이 너무 높은데 막 1명 시술하고 100%인 건 아니죠?”

“13명이나 성공했답니다.”

“응? 그런데 왜 시술 성공률이 낮아요?”

“다른 흡혈귀들이 시도했던 건 다 실패했거든요. 총합으로 따지면 한 2만 명쯤 실패했나?”

그냥 아네모네 아니면 못 하는 시술이란 뜻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가족이 되는 건 또 다른 문제잖아요? 피를 나눠 상대를 흡혈귀로 만들면 세대가 갈려 상하관계가 나뉘는 데다, 프라이멀 블러드에도 편입되니 꼭 좋은 일은 아니거든요.”

모든 흡혈귀가 프라이멀 블러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새로운 흡혈귀가 추가될 때마다 다른 모든 이들도 영향을 받는다는 뜻.

따라서 아네모네는 상대를 혈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흡혈귀로 만들 방법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바로 이 시술이었다.

“저는 다나 양에게 흡혈귀의 피를 주입하고, 다나 양은 그 능력으로 본인의 몸을 제어한다. 간단하죠?”

“그런 편리한 시술이 있다면 지금까지 13명밖에 안 받았을 리가 없는 것 같은데. 페널티도 있는 거 아니에요?”

“있지만 다나 양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저 윤회의 굴레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전부거든요.”

윤회의 굴레.

“지구인의 영혼은 죽으면 지구의 굴레에서 새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고, 에렉투스인은 죽으면 에렉투스에서 다시 태어나죠. 어디서 죽었는지가 아니라 어디 태생의 영혼인지를 따라서요.”

“어…… 그래서요?”

“다나 양이 흡혈귀가 되면 새롭게 다시 태어난 것으로 판정되어 지구의 굴레에서 떨어지게 되는데, 다나 양은 이미 웨어울프가 된 시점에서 떨어졌으니 상관없답니다.”

“잠깐, 그럼 그거 떨어지면 환생 못 해요?”

“소속이 없어도 우주를 떠돌다 다른 굴레에 들어갈 수 있답니다. 보통은 그 전에 카르마가 다해 영멸하긴 하지만, 초월을 이룬 영혼이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럼 웨어울프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

“늑대 아가리에 굴러 들어가 침묵과 광기의 먹이가 되겠죠. 그러니 다나 양이 죽기 전에 반드시 침묵과 광기의 성좌를 죽여 두는 게 좋답니다.”

“남의 최종목표를 무슨 리빙포인트처럼 말하지 말아주세요…….”

“화이팅.”

아네모네는 그런 다나의 말에 주먹을 꼭 쥐며 앙증맞게 응원했다.

“아무튼 제 피를 받으면 다나 양은 2세대 흡혈귀에 해당하는 능력을 얻을 거예요. 이 능력만 잘 다뤄도 지구의 사도쯤이야 문제도 아닐 테지만 그래도 혈마술보단 검술에만 집중하세요.”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뭔가 이유가 있나요?”

“당신이라면 검기성강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요.”

아네모네는 거기에 굳이 자신은 역사상 검강을 이룬 존재들을 전부 만나보았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간단하게 필요한 말만을 전했다.

“원래 책임감을 가진 사람은 강해지거든요.”

한때 성진이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다나 또한.

* * *

한편 성진은 시술이 진행되는 동안 199층에서 산달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태수가 이번 일을 잘 처리해준 건 좋지만 결국 170층에서 필요한 재료를 다 모으지 못했다. 우리 후발주자들이 그걸 얻을 수 있겠나?”

남태수는 오메가의 함정을 박살 내는 것은 물론, 마왕 남태수라는 이름에 쏠린 어그로까지 싹싹 긁어서 가져가 탑 밖에 말뚝을 박았다.

이는 분명 기대 이상의 성과였지만 어쨌거나 원래 목적이었던 차원문의 재료는 놓친 셈이었다.

-남태수 씨가 맡았던 점수는 그리 높지 않았으니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100,000점 만점에 25,700점.

170층까지 깰 수 있는 플레이어라면 해당 점수를 달성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150층을 넘어 랭커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아군 플레이어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었지만, 이쪽도 방법은 있었다.

-151층을 넘어온 알파카 클랜원들에게 전부 원래 몸을 찾아줬습니다. 이만하면 네댓 명은 올라갈 수 있겠지요.

NPC의 몸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어려운 스테이지.

산달폰이 천사의 권한을 사용해 플레이어들에게 원래 몸을 되찾아주면 충분히 할만하리라.

“그렇다면 일단 150층을 넘을 수만 있다면 170층까진 할만하겠군?”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요.

어차피 성진이 300층에 도달하기 전까지만 달성하면 된다.

랭커의 영역에 도달한 클랜원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심심찮게 나오니 해당 점수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으리라.

“그럼 그쪽은 너와 베르나데트에게 맡기지. 알파카 클랜을 운영하는 건 어차피 그녀니까.”

오메가와의 일 이후로 산달폰은 단순히 시키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고 있었다.

그에 따라 성진도 점차 제한을 풀어주고 그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다음으로 넘어가서. 증오의 사도를 찾는 일은 어떻게 되고 있지?”

증오의 사도 문제는 현재로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

최근의 산달폰은 성진의 명을 받아 이쪽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말씀하신 조건에 부합하는 사도가 세 명 있었습니다.

성진은 산달폰이 조사해온 명단을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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