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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부수는 플레이어-154화 (154/170)

<154>

사도들은 성좌의 비밀을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공유하지 않았다.

보안을 위해서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달랐다.

어차피 인간은 성좌의 먹이다.

성좌의 힘을 받아서 사용할 뿐인 이상 그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굳이 먹을 것들을 먹지 않고 부하로 삼을 이유가 없다.

침략에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면 사도에게 더 많은 권능을 주면 될 뿐, 부하를 여럿으로 늘릴 필요는 없었다.

모든 인간은 결국 성좌의 식탁 위에 올라갈 운명이었다.

오직 사도만이 잡아먹힐 운명에서 벗어났으니, 그들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알지 못했다.

이는 자신들의 사도인 신시아와 신경망으로 연결된 웨어울프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도 그들에겐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분을 구할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가 죽어도 좋다.”

그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알아도 신시아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 있었다.

사도가 날뛰는 전장에서 웨어울프들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노인의 신도들과 남태수가 불러낸 언데드들, 주차된 차량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능동방어 시스템들, 마침 이 근방에 있던 무소속 플레이어들까지.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대혼란 속에서도 그들은 태평궁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신시아와 합류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빅토르를 마주했다.

“한참 전에 보내셨다고 들었다만. 오는데 오래도 걸리는군. 웨어울프란 것들도 소문만 못한 모양이야.”

웨어울프들은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있는 빅토르를 보고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사도들은 빅토르가 신시아의 코앞까지 도달한 마당에도 오히려 바깥에 있는 무르무르나 남태수를 잡으러 나서는 등, 신시아겐 그리 미련을 두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를 잡아들인 목적부터가 남태수를 노리기 위함이었다는 뜻.

아마 남태수를 잡은 뒤에는 바로 처형할 예정이었으리라.

“지금부터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지.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고, 신경망을 통해 전 세계의 웨어울프들에게 모두 전해라.”

“네가 뭔데 우리에게 명령이냐. 우리는 가주님의 명령만을 따른다.”

“그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

“뭐?”

“웨어울프들의 무리에서는 가장 강한 개체가 우두머리가 된다지? 네놈들이 지금부터 볼 것은 새로운 가주가 등극하는 모습이니까.”

* * *

카르마 법칙 아래서는 수명이 길면 길수록 유리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수명이 길면 그만큼 카르마를 쌓을 시간도 많아지니까.

오래 산다고 무조건 대단한 카르마를 쌓는 건 아니었지만, 하루살이보다는 백 년은 살 바다거북이 더 유리하지 않겠는가?

연합의 주축을 이룬 8대 종족 또한 마찬가지였다.

용의 수명으로 만족하지 못해 리치가 된 사룡왕도, 정령으로 화해 종족 전체를 가호하는 신왕이 된 요정왕도.

기술을 통해 카르마를 계승하는 난쟁이나, 투쟁을 통해 강자를 육성해내는 거인들도.

죽으면 슬라임에게 마력으로 환원되어 다른 개체의 밑거름이 되는 마족들도.

어느 쪽이든 수명 이상으로 카르마를 이어갈 방법을 찾아낸 이들이었다.

웨어울프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무리에 소속된 각각의 개체가 이뤄낸 성과를 서열에 따라 공유했다.

“무리의 하위개체가 상위개체를 뛰어넘을 일은 없어. 따라서 너는 나한테 못 이겨.”

“늑대로서 싸울 생각은 없어.”

신시아는 야수화를 하고도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며 신체강화 효과만을 페널티 없이 이용하고 있었다.

다나 또한 그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성좌의 힘에 진정한 ‘페널티 없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언니를 때려눕혀도 언니는 납득하지 못하겠지. 고작 자길 쓰러뜨린 정도로는 성좌와 싸울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보여줄게.”

신시아는 다나만을 보고 있었지만 다나는 신시아가 아닌,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시선의 차이.

그릇의 차이가 서 있는 자리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블러드 러스트.”

폭주하는 피가 육신의 한계를 초월시킨다.

영혼보다 먼저 초월경에 닿은 육체가 체내의 피를 제어한다.

폭주의 페널티가 제어되며 광기가 골수까지 치닫지 못하고 차가운 정신이 유지된다.

불굴의 육체와 명경지수의 마음.

극한으로 날카로워진 감각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다나의 잠재력을 일깨웠다.

신시아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다나의 노림수를 원천차단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완전집중상태의 다나는 범위 내의 풀 한 포기, 개미 한 마리까지 다 느끼고 있는 상태.

신시아가 아무리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여도, 그만큼 거대한 영혼을 놓칠 리가 없었다.

파앗!

허공에서 생성된 혈검들이 신시아를 막아선다.

심판의 검을 사용할 때 수십 자루를 자유자재로 다루던 다나는 혈검에 와서 수백, 수천의 칼날을 만들어내는데 이르렀다.

‘단순히 물량으로 막아서는 게 아냐. 전부가 확실히 급소와 회피지점을 노리고 있다.’

실존하는 검만 본뜰 수 있는 심판의 검과 달리 혈검은 어떠한 모양이든 자유롭게 변할 수 있었다.

석면처럼 호흡기를 노리는 미세한 칼날도, 다가오면 그제야 모습이 변해 공격해오는 칼날도.

모두가 달인이 준비한 비장의 한 수와 같다.

얕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얕볼 생각도 없었다.’

신시아는 혈검을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했다.

‘급소만이라도 지키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반드시 급소를 당할 거야.’

필요하다면 급소라도 내어준다.

상대의 강함을 믿기에 할 수 있는 판단.

무수한 칼날이 전신을 찢어발겼다.

가죽이 찢기고 근육이 갈라지고 뼈가 부러져도 멈추지 않았다.

왼팔이 잘려나가고 오른팔이 축 늘어졌지만 상관없었다.

발톱이 없으면 이빨로.

신시아는 붉은 안광을 빛내며 광견처럼 달려들었다.

야수화하여 거대해진 웨어울프의 주둥이는 사람의 머리통을 통째로 삼켜 버릴 정도였다.

그리하여 신시아의 이빨이 다나의 목을 물려는 찰나.

성검에 은은한 오오라가 일어났다.

아직은 미약한,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광휘.

그러나 이번에는 명확한 칼날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

본능이 위기를 알리는 와중, 신시아는 다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다나의 초점은 그보다 조금 더 먼.

자신이 포기한 어딘가에 닿아 있었다.

“검기성강.”

빛이 신시아를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쓰러지며 관성을 따라 바닥을 구른 신시아는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에 의아해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성좌의 존재감에 당황했다.

“어떻게……?”

성녀의 검강은 다른 세상의 문을 여는 검강.

세계를 잇는 그 빛은 우주의 가장 큰 신비였던 어스름을 현실과 연결시켰다.

다나의 검강은 그와 정반대인 문을 닫는 검강.

검강이 신시아를 베고 지나간 순간, 그녀와 성좌를 연결하고 있던 카르마가 모두 잘려나갔다.

사도로서의 힘도, 권한도, 의무조차도.

심지어 플레이어로서의 카르마도 모두 잃어버린 신시아는 웨어울프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빅토르!”

다나는 검강의 빛이 가시자 즉시 빅토르를 불렀다.

“당신의 충실한 종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내 ID 어떻게 보여요?”

“레벨이 보이지 않는군요. 축하드립니다.”

블러드 러스트가 끝났음에도 육체의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피의 권능 없이도 기본적으로 초월상태가 되었다는 뜻.

검강을 발현하고, 평생을 얽매어오던 신시아의 주박을 벗어나며 다나의 영혼은 초월을 이룬 것이었다.

“빅토르, 당신 반지 좀 빌려줘요.”

다나는 그에게서 인연의 반지를 받아 신시아에게 내밀었다.

[인연의 반지B]

유니크 반지 아이템

인연의 반지A 소유자의 레벨에 비례하여 스탯 상승

인연의 반지B 소유자와 실시간 대화 가능

일시적으로 인연의 반지A 소유자의 위치로 전이 가능(1/10)

(해당 옵션의 지속시간은 사용자의 마력에 비례하며, 지속시간 종료 후 원래 위치로 돌아옵니다.)

이제는 사용 회수가 한 번밖에 남지 않은 반지.

인연의 반지B를 받아든 신시아는 그것이 다나가 끼고 있는 것과 짝을 이루는 아이템이라는 걸 알아챘다.

“나는 곧 마력 다해서 탑으로 돌아갈 거야. 산달폰을 통해 연락할 테니 언니는 그걸 사용해서 나를 따라 탑으로 들어와. 보여줄 게 있어.”

“이제 와서 내게 왜…… 아니, 네게 다 생각이 있겠지. 알았다.”

* * *

남태수와 다나가 바깥에서 일을 벌이는 동안, 성진은 계속해서 탑을 올랐다.

낭비할 시간도 없었고, 이젠 자신이 일일이 뒷바라지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할 두 사람이었다.

애초에 이런저런 일들을 맡기려 데리고 다니던 녀석들이니 이쪽의 짐을 덜어주려는 걸 말릴 이유도 없었다.

“일은 잘 풀린 모양이군.”

탑으로 돌아온 다나는 빠르게 스테이지를 돌파해 성진을 따라잡았다.

200층부터는 스테이지가 새로 생성되는 게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덕분에 성진이 닦아둔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신시아 스펜서. 어떤가? 동생의 검을 맛본 소감은.”

그렇게 쫓아온 다나의 곁에는 인연의 반지로 따라온 신시아도 있었다.

탑의 200층부터 이어지는 몬스터 월드.

이곳의 생물군은 지금까지 탑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능력은 크게 달랐다.

검기를 난무하며 달려드는 고블린 히어로, 하늘에서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갈겨대는 하피 아크메이지.

평범한 인간과 사도가 같은 인간이지만 전혀 다른 전투력을 보이듯, 이곳의 몬스터들도 모두 ‘특출난 개체’였다.

랭커라도 생존을 우선해 교전을 피해 다녀야 하는 곳.

사도인 그녀조차 이곳에서 몬스터 무리를 건드릴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허나 지금 신시아의 눈앞에 선 성진은 그녀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던 몬스터들의 인사를 받으며 그들을 사열시켜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신시아를 당황케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자릿수가 다르다.

“저기 아저씨? 근데 제가 검강으로 언니를 베니까 ID까지 사라졌는데요. 이거 괜찮을까요?”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연결은 다시 복구될 거다. 아직 그녀에게 사도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건 아니니 내가 신시아를 죽여 버릴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카르마를 완전히 잘라내는 것은 신성존재의 권능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성진쯤 되니까 망치에 카르마를 옮겨 담는 게 가능했지, 보통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성녀가 육체와 영혼을 양쪽에 나눠 어스름의 문을 계속 유지한 것처럼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검강이라도 영구적인 차단은 불가능해.”

막대한 카르마는 현실의 물리법칙조차 다시 쓸 수 있지만, 현실은 계속해서 그걸 고쳐놓으려고 한다.

이러한 수정을 막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에너지를 투입해야 하므로 다나가 붙어 다니며 계속 연결을 끊어놓지 않는 이상 언젠가 신시아의 힘이 돌아오리라.

“내게 보여주려고 한 게 이 사람이니?”

“맞아. 검강은 강력하지만 사실 이거 하나만으로는 천상과 싸우기에 부족하니까.”

반면 성진은 달랐다.

“아저씨는 인간이 천상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가장 큰 가능성이야.”

“긴말할 필요 없다. 보여주지.”

성진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망치를 불렀다.

“와라.”

그러자 세상을 가득 메우는 막대한 신성광휘가 이 땅에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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