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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부수는 플레이어-165화 (165/170)

<165>

성진이 더 이상 아무런 방해 없이 300층을 향해 오르는 짧은 시간.

티타니아는 말없이 성진에게 깃들어 그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괜찮으세요?

성진의 몸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억지로 갈아 끼운 심장은 둘째치고, 불꽃 형태의 권능은 여전히 남아 성진의 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더 심각한 건 역시…….’

성진이 가진 카르마의 근간을 이루던 것은 무패의 카르마였다.

어떤 적을 만나도 지지 않았던 그 카르마야말로 이어진 다른 카르마들을 얻을 수 있었던 계기이자, 기반이었다.

그러한 카르마가 깨진 탓에 성진의 영혼은 지금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괜찮다.”

-하지만……!

“이거면 충분해.”

원래 가지고 있던 카르마를 모두 망치에 담아둔 것이 이럴 때 유용했다.

성진의 몸에 쌓여 있던 카르마는 무너졌어도, 망치에 쌓여 있던 카르마는 여전했다.

성진 본인이 쓰러지기 전까지의 유예.

패배가 죽음으로 이어지기 전까지 성진은 아직 남은 힘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성좌를 모두 몰아낸 뒤에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성진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작은 교전에서 퇴각하더라도 최종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그러한 일념으로 티타니아가 떠나면 즉시 사망할 상태로도 성진은 탑을 올랐다.

“다 왔군.”

탑의 방침은 조금씩 변했어도, 시스템을 이루는 기본 골자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똑같았다.

그리하여 300층의 문도 성진이 처음 300층에 도달해 보았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성진을 반겼다.

쿠구구구……!!!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이는 텅 빈 공간.

그러나 심안을 깨우친 지금의 성진에겐 공간 전체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카르마의 흐름이 보였다.

-침략 완료시 호출 코드…… 이거에요 선생님!

마침내 그들은 천상의 좌표를 손에 넣었다.

왕들의 눈을 피해 항상 옮겨 다니는 현재 좌표가 아닌, 언제 어디에 있든 천상과 오갈 수 있는 고정좌표를.

“이제 이 탑에 볼 일은 없다.”

탑의 기능 중에는 문명 카르마의 방해를 뚫고 해당 문명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있지만, 반대로 외부에서 해당 문명을 차단시키는 것도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기껏 작업치고 있는데 연합에서 방해하러 오면 곤란해지니까.

또한 다른 성좌가 새치기하지 못하도록 자기들끼리 견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덕분에 성진은 지구로 올 때 원래 지구 태생이라 문명 카르마의 방해를 받지 않음에도 꽤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연합의 군대를 이곳으로 불러오기 위해선 이쪽에서 탑을 부숴야 한다.

“탑을 부순다.”

신을 벌하는 망치가 탑을 내려쳤다.

탑의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퍼져나간 충격은 순식간에 땅끝의 1층에 닿았다.

[모두 준비해라.]

무너져 내리는 스테이지 속에서 성진의 목소리가 모든 NPC들에게 울려 퍼졌다.

[우린 오늘 이곳을 나갈 것이다.]

지구에서만 30년.

그 전부터 잡혀 있던 영혼의 경우 수백 년을 성좌의 손아귀에서 고통받던 경우가 태반이었다.

긴 세월 끝에 맞이한 해방의 날.

영혼들은 축제의 함성을 질렀다.

[또한 우린 오늘 천상에 오를 것이다.]

패룡전쟁 이후 현대까지 계속된 전사들의 숙원.

유린당한 영혼들의 넋을 달랠 진격의 날 또한 오늘이었다.

[그리하여 우린 오늘 천상의 드높은 곳에서도 성좌가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볼 것이다.]

무너진 스테이지 너머로 지구의 하늘이 보였다.

[들어라.]

탑 바깥에 있던 침묵과 광기의 성좌가,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전사들이, 모두가 성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왔다!]

탑에서 뛰어내린 성진의 망치가 침묵과 광기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신성광휘가 깜빡이며 잠시 꺼질 정도의 충격.

이어서 탑이 완전히 무너지자, 그 여파로 차원의 틈을 비롯한 하늘의 장벽도 무너져 내렸다.

무수한 빛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가운데, 가장 앞에 선 빛이 포효했다.

[특이점.]

“미카엘인가. 급하긴 했나보군. 그새 여기까지 달려왔나.”

이제는 신이 되어 버린 그 천사장은 천상에 남아 있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왔다.

그리하여 하늘을 가득 메운 천사의 수는 1440억.

질량만으로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밀어 버릴 숫자가 모이자 마치 수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뜬 것처럼 하늘이 환해졌다.

[그렇다. 네놈의 희생은 잠깐의 시간벌이가 전부였다. 망가진 영육으로 너 혼자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왜 내가 혼자라고 생각하지?”

하늘이 무너져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이 내려올 수 있었던 것처럼, 연합의 군대도 이곳에 강림할 수 있게 되었다.

“오라, 전사들이여.”

그와 동시에 티타니아의 대차원문이 가동을 시작했다.

처음에 8개의 문이.

이어서 64개의 문이.

다음엔 512개의 문이.

수천수만의 차원에서 총사령관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던 전사들이 나타났다.

[나 와 싸 우 자!]

어느 차원문에서는 거인 전사들이 튀어나와 포효했다.

[요정향을 위하여.]

어느 차원문에서는 요정기사들이 걸어 나와 대열을 갖추었다.

[피의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어느 차원문에서는 피로 이루어진 파도가 쏟아졌다.

[기함 라그나로크 및 전 함대 도약완료. 대원수 리젤로테 님의 명령에 따라 전투에 참여합니다.]

어느 차원문에서는 난쟁이들의 우주전함이 나타났다.

[크하하하 왔구나 왔어!]

어느 차원문에서는 용들이 날아올랐다.

대차원문은 그러고도 끊임없이 전사들을 쏟아냈다.

초월자조차 숨이 막혀오는 그 현장에서 남태수는 갑자기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루프레시아?”

그의 곁에 내려앉은 적룡은 어스름에서 본 적 있는 인물이었다.

[저를 아십니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편하겠군요. 폐하께서 제게 당신의 보호를 맡기셨습니다.]

남태수와 달리 루프레시아는 그를 만나보는 게 처음이었지만, 어스름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어린 용을 돌보는 일에 굉장한 사명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 어떤 성좌도 당신에게 털끝 하나 손대지 못하도록 할 테니 걱정 마시길.]

“폐하는?”

[눈치 못 채셨습니까? 이미 오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지구가 어두워졌다.

무수한 천사들이 발하는 빛이 무색하게 밤이 찾아왔다.

사룡왕이 나타나자 그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성 전체를 뒤덮는 이클립스가 발생했다.

헬가의 모습으로 차원문에서 걸어 나온 사룡왕은 성진을 뒤에서 껴안으며 물었다.

“천상의 좌표는?”

“여기 있다.”

좌표를 확인한 사룡왕이 손을 뻗어 하늘을 가리키자, 천상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렸다.

성좌들로 가득한 그 세상을 보며 모두가 총사령관인 성진의 명령을 기다렸다.

명령은 한 마디로 충분했다.

[공격.]

* * *

그로부터 일어난 일은 남태수의 이해를 벗어난 것들이었다.

[죽어라, 벌레 같은 놈들!]

저 멀리서 거대화하여 나타난 거신왕이 천사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자 하늘이 손가락 하나로 가려졌다.

‘가슴팍 앞에 달이 보인 걸 보면 분명 달보다 멀리 있는 건데 왜 하늘의 반을 뒤덮고 있냐?’

마치 거인이 지구본의 한 점을 손가락으로 뭉개는 듯한 모습.

압도적인 물리력은 마법이고 뭐고 전부 무시하고 천사들을 한순간에 으깨 버렸다.

용들의 전투마법은 적이 분석해 대응할 수 없도록 보안이 걸려 있어 보고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난쟁이 기술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다나는 전사들의 싸움을 보며 뭔가 배우는 게 있는지 중간부터 자신도 검강을 활용해 날뛰었지만 남태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차피 언데드가 필요하면 그 자리에서 사룡왕이 만들어냈으니까.

사룡왕의 사령술은 완성도도 속도도 남태수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몬스터들은 제각기 제 종족에 맞는 신기한 기술들을 썼고, 흡혈귀는 상대의 피를 빨아 상대의 기술을 사용했다.

그나마 초월자라서 그러고 있다는 걸 알아본 거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따지면 그냥 피안개가 지나가더니 미라만 남은 모습이었다.

중간부터는 아예 격변하는 환경 속에 남아 있는 게 좋지 않다고 여겼는지 루프레시아가 남태수를 난쟁이 기함으로 데려갔다.

에렉투스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이 전투순양함의 함장은 남태수가 탑에서 만나본 바 있는 왕립 마이스터 리젤로테였다.

“중장이 아니라 대원수라니, 진급하셨네요?”

“흠? 아, 탑에서 과거의 나와 만나본 모양이군?”

탑에서 등장하는 NPC의 몸에 꼭 본인의 영혼이 들어있는 건 아니었다.

그랬다가는 구현할 수 있는 NPC의 종류가 매우 한정되리라.

“마침 잘 됐네. 온 김에 앞으로의 보급문제에 대해 협의하도록 하지.”

“예? 저랑요?”

“자네가 이 행성의 대표 아닌가? 그럼 자네와 협의하지 누구와 하나?”

남태수는 곧장 성진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이어지는 작전계획을 듣다가 성진이 이런 걸 신경 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지구에서 이뤄지고 있는 전투는 전초전에 불과하네. 연합은 이대로 저놈들을 밀어내고 천상으로 진입할 거고, 전투가 계속될 거야. 그렇다면 지구는 천상에 올라간 연합군의 보급거점이 되겠지.”

하루아침에 싸움이 끝나진 않을 테니 계속해서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지구를 통과하리라.

“통행료는 전후에 남는 물자로 지불하겠네. 그거 다시 가지고 돌아가는 것도 일이거든. 연합군이 쓰려고 모아놓은 물자라면 행성 하나 부흥시키는 건 일도 아닐 거야.”

지구에 만들어진 대차원문은 우주적으로도 흔치 않은 수준의 교통망이었다.

전후의 물자와 대차원문이라면 1단계 문명에 해당하는 지구도 순식간에 카르마 사회에 진입할 수 있으리라.

성진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남태수를 밀어주고 갈 생각이었으나, 남태수는 베르나데트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중간관리자로서 보급 안 끊기게 유지해야겠단 생각이나 했지 자기가 지구를 다스리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단 뜻이었다.

남태수는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부관들이 나중에 보급계획 보여줄 테니 수용할 수 없는 거 있으면 말하고. 필요한 조건 있으면 생각해두게. 우리가 이쪽 문화는 잘 몰라서.”

전투가 한창이었던지라 리젤로테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함교에서 나와 VIP실로 이동한 남태수는 그곳에서 지난 며칠간 쉬지도 않고 싸워온 피로가 한꺼번에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밖엔 아직 싸우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기절하면 안 돼지.”

직접적인 전투에서는 물러났어도 할 일은 많았다.

원래 한 명의 전사가 싸우기 위해서는 그들을 먹이고, 수송하고, 치료하고, 교육하고, 행정 업무를 처리해줄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법이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선 전투원만큼이나 그 외의 인원들도 중요했다.

“싸울 능력이 안 되면 싸움 이외의 할 일을 찾아서 해야지.”

잠시 후 남태수는 자신을 찾아온 부관들과 함께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사도의 몰락 이후 새롭게 개편될 신(新)세계정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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