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후회의 시작2021.07.15.
알렉산드로스는 심장을 뭉근히 짓누르는 불쾌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는 생각했다.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했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그녀의 의사를 거스르면서까지 내가 바라는 것을 기어코 손에 넣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무리 되뇌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눈꺼풀 뒤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로벨리아,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충격에 빠져 망연히 자신을 보는 모습이.
‘그런데 이건 뭐지.’
그 얼굴을 보기가 싫었다. 그런 표정 따위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원망스러운 눈빛이, 그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만 같았다.
‘아, 이제야 알겠군. 이 감정은……. 내 발밑에 도사리고 늪처럼 이 몸뚱이를 끌어당기는 이 불쾌하고도 기묘하며 질척한 감정의 이름은.’
그것은 바로, 죄악감이었다. 그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 어떤 상대라도, 어떤 계획을 쓰고도, 결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어머니의 말로 겨우 그 존재를 알았을 뿐 언제까지나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해온 검고, 끈적끈적하고, 무거우며 질척한 이 감각.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로벨리아의 그런 얼굴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그녀가 그런 얼굴을 하도록 만든 게 자기 자신이라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지금 내가 저지른 행동을 후회하는가?’
그는 후회 역시 거의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계획을 완전히 이루지 못했더라도 후회감에 빠져 과거의 실책을 곱씹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실수를 했다면 그것을 보완할만한 다른 계획을 만들어 실행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이라도 빠른 게 좋다. 철이 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런 삶의 방식을 거슬러본 적이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에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은……. 이토록 돌이킬 수 없는 회한에 빠져들기만 하는 것인지. 후회는 자꾸만 거슬러 올라갔다. 방금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강압적으로 굴지 않았더라면. 더 참을성 있게,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신뢰할만한 태도를 보였더라면.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3년 전부터…… 그녀를 그렇게 방치하지 않았더라면.’
회한이란 두려운 것이다.
‘그녀의 능력을 깨닫고, 인정했더라면. 그 긴 시간 동안 그녀에게 사소한 온정이나마 보였더라면.’
한 번 깨닫기 시작한 자신의 실책이 이렇게나 많고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편리한 도구로 여기고 필요에 따른 대우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아내, 제국의 어머니라는 위치에 걸맞은 존중을 보였더라면.’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도. 시간은 신조차 되돌릴 수 없다. 대륙의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한낱 인간에 불과한 자신 따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랬다면…… 만약 그랬더라면.’
깨달음은 고통스럽다. 3년에 걸친 무수한 과오를 단 하나라도 잊어버리기에 그는 지나치게 명석했다. 날 때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그를 결국 이 자리까지 끌어올린 영특함, 신의 선물이었던 이 두뇌는 지금은 저주나 다를 바 없다.
‘그녀는 지금, 내게 웃어주었을까.’
해일처럼 밀려오는 죄악감에 알렉산드로스는 밭은 숨을 내뱉었다. 그는 비틀거리다가 결국 벽에 등을 기댔다.
‘아니야.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지금이라도 되돌릴 방법이…….’
하지만 그 악마적으로 명석한 머리로 아무리 계산에 계산을 거듭한다 해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처음부터 그녀에게 그런 짓들을 하지 않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다. 등을 벽에 기댄 채,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쏟아지는 감정을 견뎌내던 알렉산드로스는 문득 생각했다.
‘정말이지 이상하기 짝이 없군.’
깨달음과 죄책감이 한차례 성난 들소 떼처럼 지나간 뒤, 숨 쉴 틈이 생기자 문득 떠오르는 의문.
‘나는 그녀를 정말로…… 탐나는 인재로서 여기고 있는 건가.’
계속해서 외면하고 부정해 왔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결론짓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아무리 귀한 인재라고 할지언정 자신을 이렇게 죄책감과 후회를 느끼게 하는 것이 타당한가.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고 할지언정 그로 하여금 언행 하나, 표정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게 하고 메스타포보다도 더 뜨거운 불바다에 밀어 넣어 불타게 만든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그 외에 어떤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그 외에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된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부친을 폐위시키고, 형제자매들의 목을 자른 자신이 아닌가. 숙원을 위해서는 쥐어짜도 눈물 한 방울 내어놓지 않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그 누구에게도 도구 이상의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된다. 정신 차려라, 알렉산드로스! 네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올랐는지 생각하란 말이다!’
그때였다.
“폐하.”
가녀린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끊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표정을 정돈하고 자신을 부른 이를 돌아보았다.
“황비.”
부드러운 미소를 가장한 채 그는 몸을 돌려 상대를 마주했다. 평소보다 초췌해 보이는 인상의 아이샤가 그와 같은 웃음을 걸치고 서 있었다.
“이런 곳에서 그대를 만나다니 놀랍기 짝이 없군.”
알렉산드로스는 그녀가 황후궁에 있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말했다.
“네. 부끄럽지만, 저는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여기 왔어요.”
“황비가 황후를 그렇게나 보고 싶어 하는 줄 몰랐는걸. 나로서는 질투가 나지 않을 수 없군.”
“아니에요, 폐하.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 창피하지만…… 제가 보고 싶었던 사람은 황후 폐하가 아니라…….”
아이샤는 수줍고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새하얀 두 뺨에 보기 좋은 보조개가 패고, 애교살은 부풀어 올랐다. 그녀의 작은 손이 꼼질거리더니, 조심스럽게 하지만 명백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폐하…… 인걸요.”
아이샤의 손이 알렉산드로스의 크고 긴 손을 쥐었다.
“폐하가 정말 보고 싶었어요. 여기 계신다기에 일부러 찾아온 거예요.”
아이샤는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히며 그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심장을 뛰게 만들 정도로 사랑스러운 얼굴에 새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도, 알렉산드로스는 가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찾아온 의도가 뻔히 보이는 와중에 굳이 굳이 돌아가야 한다니 피곤하기 짝이 없군.’
만약 로벨리아라면 결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마주치자마자 자신이 온 의도를 설명하고, 그의 의사를 물을 것이다. 시건방지고 귀족의 예법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태도이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요즘 뻔한 말을 하기 위해 한껏 에둘러 말하는 귀족들의 화법에 신물이 나 있었다. 나이 많은 귀족들은 로벨리아의 화법에 경악했으나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의 그런 태도가 좋았다. 효율적인데다가 명쾌하니까. 가식도 위선도 효율적인 도구라고 생각했기에, 귀족적인 화법에는 도가 튼 알렉산드로스였으나 오늘만큼은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용건이 뭔가.”
“네, 네?”
“날 일부러 찾아온 용건이 무엇인지 물었다, 황비.”
그렇게 말하는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냉기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그의 말투에 아이샤는 놀라 굳어버렸다. 이제껏 알렉산드로스가 먼저 애정 표현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애정 표현을 하면 그는 그만큼은 화답해주는 편이었다. 최소한 자신이 아양을 떠는데 저렇게까지 차가운 반응이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억지로 더 애교를 부려봤자 역효과겠지.’
그의 그런 태도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너무나 아팠지만……. 아이샤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정돈하곤 미리 준비해두었던 말을 입에 올렸다.
“저, 그게……. 연통은 잘 받았어요. 내일부터 3개월 근신, 그리고 반년 동안의 예산 삭감이라면서요.”
“그래.”
“현명하신 황제 폐하의 판단이니 제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저, 언제나 폐하의 지시를 잘 믿고 따랐는걸요. 그러니 부디 이번 한 번만 절 가엾게 여기셔서…….”
‘역시나.’
너무나 예상 그대로라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어째서 이 여자는 내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을까?’
항상 예상을 빗나가는 누구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알렉산드로스는 나직하게 웃다가 내뱉었다.
“네가 내 지시를 잘 따랐다고?”
그 목소리는 시릴 정도로 차가웠으며 또 명백한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겠지, 황비. 그때 내가 뭐라고 했지? 내가 설명하고 그대가 서명한 계약서에 뭐라고 쓰여 있었나?”
“그, 그게…….”
“우리는 서로에게 얻을 것과 줄 것이 있다. 궁내부의 업무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제국 문화에도 익숙하지 못하며, 가진 것이라곤 성녀라는 이름뿐인 너를 황비라는 분에 넘치는 자리에 두는 것은 오로지 그 때문이라고 나는 분명히 너에게 말했었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말이 그의 입술 새에서 튀어나왔다. 언제나 호인의 탈을 쓰고 있던 그에게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런 말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내가 네게 바란 건 그저, 아무 탈 없이 고귀하고 결백한 성녀로서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너는 그 정도도 지키지 못했다. 각종 음험한 감정에 눈이 멀어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어리석은 짓을 하고 황실의 명예를 진창에 빠뜨렸으며 나의 목적을 방해했지! 그런데도 네가 내 지시를 잘 따랐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느냐?”
아이샤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쉴 새 없이 떨렸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일말의 동정심도,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래서, 폐하의 지시에 잘 따르지 못한 나쁜 아이인 저를…… 황궁에서 내치실 건가요?”
“뭐?”
알렉산드로스는 하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차라리 이래야지. 처음으로 솔직해진 그녀의 모습은 꽤 유쾌했다.
“하지만 곤란하게 됐네요. 성국의 법도에 따르면 황실의 부부에게 있어 이혼은 불가능하잖아요.”
“…….”
“대신관님에게서 들었어요. 그건 제국의 국교를 바꾸기 전에는 불가능해요.”
그 말과 함께 아이샤는 두 손을 내렸다. 그녀의 얼굴은 종이처럼 창백했고 눈가가 붉어진 눈에는 독기가 가득 차 있었다. 입술은 부르터 있었다. 깨물고 또 깨물어 흉한 피얼룩이 진 그 입술이 달싹여 독사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저는 폐하의 곁에 있을 거예요. 폐하도 아시잖아요. 폐하도 제가 필요하시잖아요?”
“…….”
“저는 결코 폐하를 저버리지 않아요. 영원히,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드릴게요. ……그 여자와 달리.”
알렉산드로스는 가벼운 비웃음을 걸친 얼굴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담력이 많이 좋아졌구나, 아이샤.”
“그게 무슨 뜻이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지 무엇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