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노먼의 공개 처형식2021.10.31.
‘황비에게 벌을 줄 것이라면, 그 이전에 먼저 벌을 받는 것은 내가 되는 것이 응당 이치에 맞겠지.’
알렉산드로스는 검을 든 손을 꽉 쥐었다. 이 검이 자신을 꿰뚫었을 때 느낄 고통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가 두려운 것은 고통이 아닌 실패였다. 그는 마른 세수를 하며 신음하다가 다시 검을 든 손을 내려놓았다.
‘대업을 이루지 못한 이때 자결이라니. 이런 것은 정당한 벌이 아니라 도피에 지나지 않지 않은가.’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녀가 없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나약해졌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군.’
전에 없이 나약해진 지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녀가 보고 싶었다. 자신을 모욕하고, 제일가는 바보 천치이자 인간쓰레기라고 힐난해도 좋으니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 흔적을 살피고, 따스한 체온을 손가락 끝으로 훑고 싶었다.
‘황후궁으로 가야겠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그는 황후궁을 향해 발을 옮겼다.
*** 황궁으로 돌아온 이후 그는 한 번도 황후궁에 들린 적이 없었다. 이제 세상에 없는 그녀의 흔적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로벨리아의 흔적을 정리하거나 건드리지 말라고 명해두었기 때문에, 황후궁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외출했던 로벨리아가 문을 열고 돌아올 것만 같았다. 아니면 드레스룸의 문을 열고 나오거나. 실내에서도 언제나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그녀가 눈부신 모습으로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황후궁의 구석구석에서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알렉산드로스는 홀린 듯 넋을 잃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가 쓰던 가구의 표면을 쓸어보았다. 티 테이블, 침대, 책장…….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녀의 체온이 남아 있는 듯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문득 로벨리아의 책상을 보았다. 그녀는 공부와 책을 무척 좋아해서, 이곳에 자주 앉아 있고는 했다. 그는 의자를 끌어당기곤 그 위에 앉았다. 이곳에 앉아 있던 로벨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곳에 앉았을 때 그녀의 시야가 이랬겠군.’
그는 책상 의자에 앉은 채 책상의 모습을 살폈다. 붉은 파덕목으로 짜인 책상은 장정이 누워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이 책상의 주인은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지, 책상 위에는 거의 아무런 물건도 꺼내져 있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움이 짙은 눈으로 책상 위를 쓸다가, 책상 아래의 서랍장을 보았다. 주인의 취향을 반영하듯 서랍장 안도 무척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클립, 잉크병 등 자잘한 물건은 작은 상자에 담아두었고, 서랍별로 용도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던 알렉산드로스는 맨 아랫단의 서랍이 열리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서랍장에는 작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로벨리아의 흔적을 어느 것 하나 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갈등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는 자물쇠를 부수는 것을 선택했다. 와지직! 자물쇠가 부서지며 서랍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공책?’
알렉산드로스는 서랍 안에 들어 있던 공책들을 꺼내 팔락였다. 공책 안에는 로벨리아의 필체로 무언가가 가득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알렉산드로스로서는 전혀 읽을 수 없는 글자였다.
‘암호문인가?’
사실 알렉산드로스가 읽을 수 없었던 것은 그 글자가 ‘한글’이기 때문이었지만, 한글을 처음 본 그는 그것이 암호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자물쇠에 암호까지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용이라는 뜻이겠지.’
로벨리아가 숨기고 싶어 했던 비밀을 캐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런 고민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하지만 결국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고민을 이겼다. 알렉산드로스는 암호학자에게 맡기기 위해 공책을 챙겼다. 책상을 본 뒤에도 그는 로벨리아의 방을 샅샅이 살폈다. 이곳저곳에 그녀의 취향과 습관이 묻어나 있었다. 화려한 장식, 특히 꽃무늬와 보석을 좋아하는 사람의 방이었다. 한편 놀랄 정도로 깔끔하고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모든 물건들이 체계와 쓰임에 따라 분류되어 있었다. 책을 좋아해 늘 가까이에 두고 보며, 오른손잡이였다. 책임감이 강하고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관심이 많았다. 의외로 잠버릇은 별로 곱지 않은 편이며, 베리류의 잼이 들어간 과자를 좋아했다. 자신은 자신이 나태하다고 생각하지만,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데다가 늘 공부를 했던 걸 보면 부지런한 삶이 몸에 익어 있었다. 그녀를 이루는 사실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고, 그리웠다. 그녀의 방에서 그녀의 삶의 궤적을 찾아내는 과정은 그리움이 채워지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더 그립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목이 타서 샘을 찾는 사람처럼 더더욱 이 일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알렉산드로스는 장식장에서 작은 금고를 발견했다. 그는 열쇠 장인을 불러 금고를 열게 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저주 인형입니다, 폐하.”
열쇠 장인이 당황한 듯이 말했다. 황후가 금고에 넣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물건이었으니 당연히 귀중품이 나올 줄 알았는데, 보잘것없고 가격도 싼 애들 장난감 같은 것이 나오니 멋쩍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가봐라.”
열쇠 장인이 나가고, 그는 저주 인형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별로 닮지 않아서 열쇠 장인은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로벨리아는 그를 생각하며 저주 인형을 꾸민 것이었다. 서투르게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인형을 보며 알렉산드로스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내게 완전히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군. 서툰 손길로나마 내 모습을 본뜬 저주 인형까지 만든 걸 보면.’
그는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날 그렇게나 미워했던 건가. 위험을 무릅쓰고 날 본뜬 저주 인형을 곁에 두다니.’
노먼의 증언에 따르면 로벨리아가 도주를 도와줄 것을 요청한 때는 두 번째 만남이었다고 했다. 두 번째 만남이면 사실상 아직 친구조차 아니고 남남에 가까운 사이일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그려낼 수가 없다.’
그는 생각했다.
‘남편인 나 대신 거의 남인 노먼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였던 로벨리아는 대체 얼마나 절박했던 것인가. 내가 얼마나 밉고, 용서할 수 없었다면 그런 일까지 벌였을까?’
자신이 저지른 과오들이 떠올랐다. 지난 3년은 물론, 그녀를 마음속에 품기 시작한 이후로도 그는 끊임없이 잘못을 저질렀다.
‘나 알렉산드로스 2세, 이 자리에서 메스타포에 맹세하지.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가 내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그대가 죽거나. 아니면 내가 죽거나. 내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그대를 포기하게 된다면 사후 불멸의 세계에서 불바다에 영원토록 타올라도 좋다.’
그녀의 자유의지를 억압하고, 자신의 감정만을 밀어붙이고.
‘하지만 한 번만 마음을 열어줄 수는 없겠나? 정말 한 번만이라도 좋아. 나는 그대가 준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거야. 맹세할 수 있어.’
자신은 그녀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중 그녀가 바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결국 자신이 해주고 싶은 것을 해주고는 그녀가 돌아봐 주길 바랐을 뿐이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최후까지 자신을 미워하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돌이킬 방법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의 인생에서 끝까지 남만도 못한 남편이었군.’
그렇게 생각한 알렉산드로스는 인형을 손에 쥔 채 헛웃음을 지었다. 허탈한 웃음으로 시작했던 그 소리는 끝내 신음으로, 그리고 물기 섞인 울음으로 변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인생 최고의 원수로 생각하며 미워하고 원망해도 좋았다. 억지로 자신의 곁에 남아 있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그저 살아 있어 주기만 하면 그걸로 좋았다. 하지만 지금 와선 이뤄질 수 없는 꿈일 뿐이다.
‘그래, 그녀가 그렇게나 날 미워했고, 지금도 그럴 터이니 죽음으로 그녀의 곁에 가는 것도 나에게는 사치다.’
그렇게 생각한 알렉산드로스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댕그렁! 대리석 바닥과 철제 검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내가 죽음으로 쉽게 평온을 얻는 것은 그녀도 원치 않겠지.’
지난 2주 동안 그는 후회와 절망 사이를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단 한 번도 자신이 갈 길을 주저하지 않았던 그는 그 시간 동안 수천, 수만 갈래의 상념 속에서 헤맸다. 그저 그녀를 잃는 것만으로도, 갈 곳을 잃은 듯 혼란스러웠다. 쉬운 길과 어려운 길 사이에서 수도 없이 갈등하고 고뇌한, 그가 내린 결론.
‘살자.’
커다란 창에서 저녁 노을이 비쳐 들어와 그의 얼굴을 비췄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악물고 얼굴을 굳혔다.
‘살아서, 나의 어리석음을 속죄하고 이 모든 고통을 감내하리라. 그것이 그녀가 내게 내린 벌일 것이다.’
그는 앞으로 평생을 그녀를 잃어버린 절망과 후회를 짊어지고 살아가리라. 그것은 죽느니만 못할 정도로 어렵고 고된, 가시투성이의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가 조금이라도 그녀를 위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 로벨리아와 케일럽이 케일럽의 고향에서 제국 수도로 돌아오는 데에는 꼬박 2주가 걸렸다.
“오늘이 노먼의 공개처형일이야.”
“아직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멀고 험한 길을 거의 쉬지 못하고 왔기 때문에 케일럽과 로벨리아, 두 사람 모두 무척 지쳐 있었다. 여자와 다리를 저는 어린애 단둘이 잘 닦여 있지도 않은 길로 여행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세계는 치안이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다. 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뛰어난 마법능력을 가진 케일럽 덕에 다치지 않고 헤쳐나올 수 있었다.
‘더군다나 비상 탈출 마법으로 도망치느라 짐을 거의 다 잃어버려서 무일푼이었지. 내가 생각해도 늦지 않고 2주 만에 여기까지 온 게 용해.’
다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으나, 아직은 쉴 때가 아니었다.
‘처형식에서 조금이라도 늦으면 노먼이 목숨을 잃고 말겠지.’
그렇게 생각한 로벨리아는 진지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반드시 오늘, 노먼과 알렉산드로스 두 사람을 구해내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