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네?”
“네가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반역 자금을 조달했다는 사실을 안다.”
“아하.”
“아하?”
페르디안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미아가 코를 문지르며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그게 제 뜻은 아니긴 했는데……. 그런데 그거 폐하도 알고 계시지 않나요?”
“폐하께선 전부 알고 계시지.”
“그럼 왜 폐하가 저를 살려 두셨을까요?”
“나는 감히 그분의 의중을 지레짐작하지 않는다.”
“아. 모르시는구나…….”
미아의 중얼거림에 페르디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크. 놀리는 것처럼 들렸나 보다.’
미아가 재빨리 양손을 보이며 활짝 미소 지었다.
“그렇지만 후작 각하! 저는…….”
“그렇다고 해도 나는 네가 싫다.”
그 순간, 페르디안이 미아를 향해한 걸음 다가섰다. 검사답게 굳은살이 박인 손이 어느새 허리춤의 검 손잡이에 올라가 있었다.
“반역자의 딸. 당장 죽여도 시원찮을 판에…….”
낮게 내리깐 목소리에 절로 숨이 멎었다.
‘죽나?’
하지만 미아의 생각과 달리, 페르디안은 검을 뽑지는 않았다. 그건 그가 믿고 따르는 황제의 뜻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느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경고했다.
“만약 네가 폐하께 해가 되는 존재라면, 긴장해야 할 거다.”
“…….”
꼴깍.
무서운 정적 속에서 미아가 침을 삼켰다. 겁에 질린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재상 요아힘의 말대로,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미로미스 상회를 키운 여자다. 방심할 순 없어.’
페르디안은 북풍같이 차가운 눈으로 몸을 돌렸다.
“처신을 똑바로 하도록.”
제복에 감싸인 등이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 * *
미아는 덩그러니 레벤토르의 정원 한복판에 남겨졌다. 페르디안이 자신을 수거해 가지 않은 것이다.
미아가 의외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누군가 미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거기 계셨구나!? 여기요!”
자세히 보니 의료원에서 보았던 초록 머리 의원이었다. 그녀는 미아에게 달려와 넙죽 바닥에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네?”
“제가 감히 귀한 분을 몰라보고……!”
미아는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바닥을 짚은 손이 약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긴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미아는 방심하지 않았다.
‘크리소르의 주치의면 일단 크리소르의 편일 확률이 높겠지.’
그렇다면 지금은 동태를 살피는 게 낫다. 미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여자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켰다.
“귀하긴요! 그냥 애완동물인데!”
“폐하의 애완동물이 될 수 있는 건 크나큰 영광이죠! 게다가 폐하는 원래 쉽게 맘을 열지 않는 분이시잖아요! 그런데도 그분께서 옆에 두시다니, 대단하세요!”
……아닌데. 감시당하는 건데.
미아는 당혹을 채 감추지 못한 채 웃다가,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 그보다 이름이 뭐예요?”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여자가 녹색 머리를 찰랑이며 활짝 웃었다.
“엠브라 테타입니다, 아가씨! 황립의료원의 수석 의원이에요!”
“와, 수석!”
맞장구치던 미아는 약간 의아해졌다.
‘수석 의원?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 나오는 수석 의원은 다른 사람이었는데?’
뭐, 곧 퇴사하나 보지. 직장인이 다 그렇지.
미아는 그 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잘 부탁해요, 엠브라! 저는 미아예요. 성은 있지만, 반역으로 없어졌어요!”
“에이, 괜찮아요! 요즘은 그런 건 흠도 아니죠!”
“그런데 그거 사과하려고 오신 거예요?”
“아! 그건 아니고, 제가 아까 저희 신입인 줄 알고 실수한 게 너무 죄송해서…….”
“음, 저는 괜찮은데!”
“아뇨! 이렇게 보낼 수는 없죠! 시간 괜찮으시면 의료원에 들르시겠어요? 맛있는 차를 대접할게요! 마침 뉴미니의 신제품인 벚꽃 사탕도 있고요!”
즉각 거절하려던 미아가 멈칫하고 그녀의 귀가 솔깃했다.
“뉴미니의…… 신제품이요?”
“네! 제가 단 걸 좋아하거든요! 오래전에 주문한 건데, 트레베레움 제품이라 수입에 시간이 걸려서 이제야 받았어요!”
엠브라가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떠세요? 차 한 잔에 벚꽃 사탕으로 제 실수를 용서해 주실 생각은?”
“으으…….”
가고 싶지 않았지만, 벚꽃 사탕이라니!
사실 미아는 단 걸 좋아했다. 머리 쓰는 일을 하다 보니 당분을 찾는 버릇이 든 것이다. 미로미스 상회를 운영할 때, 미아가 스스로 뭔가를 산 건 온갖 디저트가 전부였다.
결국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갈게요!”
“탁월한 선택이세요!”
이건 절대 먹이에 낚인 게 아니다. 그냥 황태후의 영역을 정탐할 뿐이다. 미아는 그렇게 합리화하며 엠브라의 뒤를 따랐다.
* * *
엠브라는 미아를 의료원 안쪽의 개인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은 충격적으로 더러웠다.
중앙에 있는 탁자가 특히나 어마어마하게 지저분했다. 온갖 종이와 쓰레기, 주전자, 약초 등이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바닥에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옷이 있었다. 몹시 혼란스러운 방이었으나 미아는 그저 활짝 웃었다.
“너무 아늑해요!”
“그렇죠!? 저는 수석이다 보니 따로 공간이 주어지거든요!“
미아는 주변을 살피며 엠브라가 내어준 의자에 앉았다.
‘일단…… 미래를 위해 친분을 만들어 놓는다고 생각해야겠어.’
절대 뉴미니의 벚꽃 사탕에 홀린 게 아니라고 다짐하며.
“자!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엠브라는 주방용품이 모여 있는 콘솔에서 뭔가를 부지런히 꺼내기 시작했다.
그때, 등을 돌린 채 그녀가 말했다.
“참, 아가씨! 그 옆의 약탕기 좀 옆으로 치워 주시겠어요? 자리가 모자라네.”
“약탕기요?”
미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그랗고 납작한 주전자 모양의 도자기가 보였다.
“이건가요?”
미아가 무심결에 약탕기를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참. 뜨거우니까 조심하시고요!”
“앗, 뜨거!”
쨍그랑!
미아가 약탕기를 놓쳤다. 곧 손바닥에 화끈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아윽…….”
“아가씨!”
엠브라가 허겁지겁 달려와 미아를 살폈다. 오른손바닥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화상이었다.
“어쩜 좋아! 이리로 오세요! 찬물로 식혀야겠어요!”
미아는 얼굴을 찡그린 채 엠브라의 손에 이끌려 수도로 향했다. 그런 와중에도 가슴 한구석이 싸했다.
‘방금…… 일부러 늦게 말한 것 같았는데, 설마 아니겠지?’
미아가 울상을 지으며 엠브라의 얼굴을 살폈다. 엠브라는 정말로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죄송해요! 의료원은 워낙에 약을 많이 달이다 보니, 탁자랑 이어진 풍로를 쓰거든요! 저희한텐 너무 익숙하다 보니 말씀드리는 게 늦어서…….”
이해하지 못할 변명이 아니라서 미아는 좀 더 혼란스러웠다.
곧 흐르는 물에 화상 부위를 식히는 처치가 끝났다. 엠브라는 미아를 앉히고 열을 식히는 연고를 발라 주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죄의 의미로 벚꽃 사탕을 봉지째로 주려 했지만, 미아는 더는 식욕이 없었다.
“지내는 건 어떠세요?”
연한 녹색의 연고를 살살 펴 바르며 엠브라가 물었다.
“아딜이 잘해 줘서 괜찮아요!”
“어머! 폐하의 성함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는 엠브라의 모습에 미아가 아차 했다.
‘남주니까 이름으로 부르던 게 버릇이 되어서…….’
미아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혹시 그럼 엠브라는 폐하도 돌보는 거예요?”
“음, 아뇨? 그렇진 않아요!”
“네?”
“폐하께서는 황립의료원의 의원들에게 진료받지 않으세요.”
“그럼 어떻게 상처를…….”
“저희도 몰라요! 전담 의원과 신관이 있는 것 같기야 한데, 정체는 밝히지 않으셔서요.”
미아가 엠브라의 말을 들으며 소설을 떠올렸다.
‘소설에는 아딜이 다치면 의원에게 진료받았다고만 나와 있었어. 그게 황립 의료원의 의원이 아니었구나.’
어쩐지 황태후의 입김이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몸을 맡기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설정 구멍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많은 게 생략되어 있었을 뿐인가 보다.
‘셀레스티얼 백작의 배후에 크리소르 황태후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
미아가 한숨을 쉬었다. 읽어 본 이야기 속에 들어온 건데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폐하와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엠브라가 연고 위에 얇은 거즈를 붙이며 물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해서…….”
“쉽게요?”
“폐하의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좀처럼 잘되지 않아서요!”
“헤에…….”
가볍게 답한 미아가 엠브라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곧 치료를 마친 엠브라는 약상자를 닫으며 씩 웃었다.
“아가씨. 원래 세상은 모르는 것투성이예요, 미아 님. 의원들도 그래서 처음엔 엄청 실수한답니다?”
“실수요?”
“네! 특히 의원의 실수는 치명적이죠. 약 배합을 잘못하면 독이 아닌 게 독이 되기도 하거든요.”
“아하! 약과 독은 한 끗 차이라는 거죠?”
“맞아요! 체질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걸 어떻게 처음부터 알겠어요? 시행착오를 거치는 거지.”
“그런 걸까요?”
“네! 예를 들어…….”
말을 멈춘 엠브라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폐하가 아주 어릴 적에, 보라 뿌리 엉겅퀴를 우려낸 약을 드시고 고생하신 적이 있어요. 진작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보라 뿌리 엉겅퀴요?”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미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때 의원이 사형당할 뻔했죠. 간신히 깨어나신 폐하께서 괜찮다고 하셔서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아무튼 사람이 모든 걸 알 수는 없어요. 겪어 봐야 아는 거죠!”
엠브라의 목소리는 더 이상 미아에게 들리지 않았다.
‘와아, 신기한 색의 엉겅퀴네요! 뿌리가 보라색인 거예요?’
불현듯 의료원에서 마주친 수상한 의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