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그가 건드리고 있던 약함.
그 명패에 분명 ‘보라 뿌리 엉겅퀴’라고 쓰여 있었다.
“아, 물론 이거 극비예요! 아시죠? 폐하의 건강과 관련된 거니까…….”
정신을 차린 미아가 급하게 물었다.
“엠브라! 혹시 폐하께 들어가는 약재도 황립 의료원에서 관리해요?”
엠브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음식에 들어가는 범용적인 약재는 의료원에서 관리하긴 해요. 왜 그러시나요?”
음식.
단어 하나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혹시 보안상 문제는 없을까요? 실은…… 아까 낮에 이상한 사람이 있었던 거 같은데!”
“낮에요? 뭘 했는데요?”
“약함을 건드렸어요! 분명 함 앞에 ‘보라 뿌리 엉겅퀴’라고 쓰여 있었고요!”
“어머? 정말요?”
불안해하는 미아와 다르게 엠브라는 묘한 눈으로 미아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잘못 보신 건 아니고요?”
“아니에요! 분명 좀 수상했고…….”
“수상했다고요? 어떤 점이요?”
“그, 그건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말을 들은 엠브라는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미아의 손을 모아 어르듯 토닥거렸다.
“아가씨. 폐하는 독살 위협을 늘 겪으셨어요. 그 때문에 늘 미량의 독을 주입해 항체를 키우는 일과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독 마셔서 안 아픈 건 아니잖아요!”
“네?”
미아의 외침에 엠브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지 않더라도, 아프지도 않은 건 아니잖아요……. 그걸 당연하게 여기면 어떡해요…….”
미아가 불안하게 답하곤 입술을 깨물었다. 침묵하던 엠브라는 한참 뒤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네요…….”
“그쵸!”
미아가 울상을 지었다. 엠브라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선 다시 미소지었다.
“그냥 약재를 배달해 주는 담당 의원일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아하하! 우리 애들이 잘하고 있나? 전 이만 가 봐야겠어요, 아가씨!”
“엠브라!”
“다음에 또 디저트 드시러 오세요! 우린 입맛이 잘 맞는 것 같아요!”
미아가 붙잡는데도 엠브라는 이상할 정도로 꿋꿋하게 그녀를 의료원에서 내보냈다.
“왜 안 들어주는 거야! 크리소르 파인 게 분명해!”
남겨진 미아는 당황과 혼란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불안을 껴안고 아딜로트의 침실로 되돌아왔다. 머릿속에는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의 내용이 차르르 펼쳐졌다.
‘일단 아딜로트가 독으로 앓았다는 에피소드는 없어.’
원작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는 않지만, 남주가 위급해졌다면 분명 언급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안심이 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가슴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지?’
* * *
저녁 시간이었다. 미아는 아딜로트의 개인 집무실로 안내받았다. 문이 열리자 아딜로트가 편한 옷을 입고 서류를 넘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앞에는 간단한 상이 차려져 있었지만, 손도 대지 않은 눈치였다.
“실례합니다……?”
미아가 방에 들어서자, 아딜로트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가장 먼저 반색했다.
“아. 드디어 만나 뵙는군요.”
의외의 인물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에 은테 안경. 연둣빛 눈까지.
“요아힘 키르히입니다. 부족하지만 재상직을 맡고 있습니다.”
요아힘의 다정한 인사에 미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아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혹시 제가 있어서 불편하시진 않겠지요?”
“그러기엔 너무 잘생기셨는데!”
“하하, 폐하 앞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 부끄럽네요.”
요아힘은 부드럽게 웃었다.
“아무튼, 저는 곧 동부로 나가 봐야 해서 오래 뵙지는 못하겠지만, 제가 없는 동안 폐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애도 아니고…….”
여태 고개도 들지 않고 서류를 보던 아딜로트가 투덜댔다. 그러자 미아 앞에서는 상냥하게 미소짓던 요아힘이 바로 인상을 썼다.
“애가 아니시면 제때 식사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
“알았다니까.”
그제야 아딜로트가 서류를 내려놓고 제 어깨를 문질렀다. 그러다 문득 그가 멈칫했다.
“……너 손이 왜 그래?”
“네?”
미아가 거즈로 돌돌 말린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아……. 놀러 나갔다가 실수로 다쳤어요!”
“실수로?”
“애완동물이 놀다 다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죠!”
의료원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던 미아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어차피 의료원에 간 것 정도는 아딜로트에게도 이미 정보가 들어갔을 것이다.
‘크리소르의 영역에서 다쳐 온 거니까, 혹시 이걸로 아딜 편이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고.’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않더라도, 어쨌든 아딜로트가 신경 쓸 문제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아딜로트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요아힘.”
그가 순식간에 싸늘해진 얼굴로 말했다.
‘……깩.’
미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를 눈치챈 요아힘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불가피한 처방이었습니다.”
“…….”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뒤처리는 깔끔하게 해.”
“물론입니다, 폐하.”
미아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체 무슨 대화지…….’
아무래도 아딜로트와 요아힘은 구체적인 단어 없이도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요아힘도, 페르디안도 원작이 끝날 때까지 아딜로트 편이었다. 세레니티를 사랑하면서도 티 내지 않을 정도로.
‘솔직히 난 그런 건 이해 못 하겠지만.’
미아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을 때, 아딜로트가 턱짓했다.
“식사나 해.”
그가 가리킨 곳은 자신의 옆자리였다. 바닥에 여러 겹의 화려한 카펫과 함께 은식기들이 차려져 있었다.
카펫은 고급품이 분명했고, 금실로 수를 놓은 비단 방석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군데군데 꽃도 뿌려 놓아서 꼭 어느 술탄의 하렘에라도 온 것 같았다.
쟁반과 식기, 그릇들은 전부 은이었고, 음식의 가짓수도 아딜로트보다 많았다.
‘페르시안 풍이네.’
간단하게 생각한 미아와 달리 아딜로트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말해 두는데 이건 내 생각이 아니야.”
“네?”
“제 생각입니다, 미아 양.”
“……넹?”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요아힘이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미아 양은 반역 혐의가 있으니까요. 공식적인 신분이 폐하의 애완동물이니만큼, 어느 정도는 그런 척을 해야 해서 바닥에 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애완동물로 굳어졌구나.
미아는 아무 생각 없었다. 살아남게만 해 주면 개밥그릇에 준대도 상관없었다.
“저 좌식 좋아해요! 괜찮아요.”
미아가 활짝 웃고서 자리에 앉았다. 아딜로트는 그런 미아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손은 나중에 다시 진료받아.”
“이미 받았는데요?”
“다른 사람한테.”
“……?”
잘 모르겠지만, 미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딜로트의 표정이 묘하게 부드러워졌다가, 다시 심드렁하게 되돌아왔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미아가 헤실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적당히 고기를 찍어 입에 넣으려던 그때, 미아의 시야에 요아힘이 잡혔다.
그는 흐뭇한 얼굴로 미아와 아딜로트가 식사하는 걸 지켜보는 중이었다. 미아가 의자에 앉아 있는 아딜로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저, 재상님은 안 드신대요……?”
“요아힘은 원래 남이랑 식사 안 해.”
“그래요?”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세레니티와 요아힘이 식사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작가 양반……. 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 이야기가 있는 거야?’
미아가 고기를 우물거리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요아힘을 흘끔거렸다.
“걱정돼?”
아딜로트는 그런 미아의 행동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그야 당연하죠?”
미아의 눈이 깜빡였다.
포도를 따 먹으며 시큰둥하게 미아를 쳐다보던 아딜로트가 손을 움직였다.
“응?”
그리고 그대로.
딱!
“아!?”
그녀의 이마 위로 손가락을 튕겼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검사 아니랄까 봐, 어마어마하게 아팠다.
‘왜!? 왜 때리는데!?’
미아가 물음표가 가득한 눈으로 아딜로트를 올려다보았다.
“밥이나 먹어. 너 누구 걱정할 처지 아니야. 특히 쟤는 더.”
“하하.”
요아힘은 묘하게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미아가 볼을 부풀렸다.
“애완동물 이렇게 대하면 죽어서 지옥 가요!”
“내가 죽인 사람이 몇인데 그럼 천국을 가겠어?”
와. 할 말 없게 만드네.
미아가 뾰로통한 얼굴로 얌전히 포크를 들었다. 아딜로트는 식사하는 내내 책을 읽었고, 요아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밥상머리에서 뭐 하는 짓들이야.’
미아는 자기도 책을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얹힐 것 같은 식사를 마쳤다.
식사는 빠르고 조용하게 끝났다. 미아가 명치를 문지르며 속을 달랠 때쯤, 시종이 들어와 상을 물리고 디저트를 내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와! 이거 라모펫의 당근 케이크 맞죠!? 하루 12판 한정인데!”
미아의 앞에는 3단 케이크 트레이와 홍차가 놓였다. 미아의 호들갑과 달리 아딜로트는 ‘뭐가 또 나오네.’ 하는 얼굴이었다.
미아가 아딜로트의 상을 흘끗 보았다. 다과 한두 개가 올라간 간단한 찻상이 전부였다.
“그것만 드시고 배가 차요?”
“걱정돼?”
“아뇨? 제 꺼 뺏어 먹지 마시라고.”
아딜로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찻주전자를 들었다.
“넌 진짜 간이 배밖에 나왔어.”
“주워 달라고 안 할 테니까 안심하세요!”
“무슨……, 참.”
아딜로트가 실소를 흘리며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쪼르륵.
그러자 선명한 보라색 찻물이 찻잔으로 흘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