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미로미스 상회를 만든 사람이라고 했지. 너무 똑똑해서 도리어 아이처럼 해맑아 보이는 걸까?’
엠브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폐하를 돕는 길이라면요.”
엠브라의 대답에 미아가 씩 웃었다.
“고마워요, 엠브라! 이제 망설이지 말아야겠어요!”
아까의 냉철함은 어디 가고 천진하고 해맑은 미소였다.
“뭘 하시게요?”
“사람을 찾을까 해요!”
“사람이요?”
“네!”
미아가 활짝 웃었다.
“잭 아저씨요!”
클라우디오 황태자가 죽은 날, 그 자리에 있던 유일한 사람.
등에 화살을 맞고 강으로 떨어져,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마부 말이다.
* * *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사람들은 세레니티가 숨만 쉬어도 그녀를 사랑했다.
반면, 아딜로트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폭군이라고 두려워 하기만 했다. 그런 아딜로트를 감싸 안고 그의 노력을 보여 주는 게 세레니티의 역할이었다.
내버려 뒀으면 아딜로트가 악명을 더 얻고 말았을 일도, 세레니티가 끼자 사태의 전말이 드러나고 ‘그런 사정이……!’ 같은 상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세레니티가 밝힌 일 중 하나가 ‘황태자 시해 누명’이었다.
아딜로트가 황제의 자리를 탐내 황태자 클라우디오를 죽였다는 소문으로, 즉위 때부터 끈질기게 아딜로트를 괴롭힌 악의적인 소문이었다.
실상은 반대지만 증명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소문만 무성해지다가…… 나중에 세레니티가 ‘잭 아저씨’를 데리고 군중 앞에 나타난다.
클라우디오 황태자가 아딜로트를 죽이려 들었던 자리에 있었던 유일한 증인을 말이다.
그는 과거 황태자의 화살에 죽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황태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황태후의 노여움이 두려워 그대로 죽은 척 살아간다.
그 잭이 세레니티가 어릴 적에 살던 동네의 술꾼이었다. 취하면 자기가 황태자를 알고 있었네 하고 떠들던.
‘렌은 나중에 잭의 술주정을 떠올리고, 그가 사라진 마부라는 것을 깨닫고서 잭을 데려가 아딜로트의 무고함을 밝히지.’
사실, 일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미아는 나설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가 원작을 비튼다.
엔딩이 어떻게 날지 모르니, 만반의 대비를 해야 했다. 정말 만에 하나 세레니티가 아딜로트의 편이 되지 않더라도 활용할 수 있게끔 말이다.
‘사실 원작에 나온 정보 길드만 찾으면 편한데,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으니…….’
그러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세레니티를 찾는 것뿐이었다. 그 길로 미아는 아딜로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깩.”
……그리고 운 나쁘게도 막 집무실을 나오고 있는 페르디안과 마주쳤다.
페르디안은 미아를 보자마자 미간을 좁혔다.
‘기껏 잘생긴 얼굴인데, 맨날 심각하게나 굴고!’
미아가 한숨을 쉬며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후작 각하, 오랜만이에요!”
물론 인사할 땐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아가 생각할 때, 자신의 최고의 무기는 순진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최고의 특기는 순진한 얼굴로 남 엿먹이기였다.
“……폐하를 뵈러 왔나.”
페르디안이 여전히 경멸 섞인 얼굴로 말했다.
“돌아가라. 폐하께 방해된다.”
“폐하는 유능해서 괜찮아요! 그리고 후작 각하, 폐하께 저에 관한 이야기 못 들으셨어요?”
너 내가 아딜 살리려고 든 거 모르냐?
방실방실 웃으며 하는 말에 페르디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더 찌푸릴 데도 없어 보이는데, 대단한 섭남이었다.
“그런 단발적인 사건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럼 얼마나 더 저를 증명해야 믿어 주실 거예요?”
“횟수는 중요한 게 아니지. 반역자의 딸이 반역 의도가 없었다는 말을 믿으라는 것 자체가 어이없군.”
미아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라서.’
친일파의 딸이 알고 보니 친일파가 아니었다, 정도였다면 페르디안도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친일파인 아버지에게 돈을 벌어다 주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몰랐다고 주장한다?
‘나라도 못 믿지…….’
그때였다.
딸랑.
집무실 안쪽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곧 문이 살짝 열리고, 아딜로트의 시종인 올리버가 고개를 내밀었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들어오시랍니다.”
“앗, 네!”
스으으.
짙은 바다색 카펫 위를 문이 부드럽게 스쳤다.
집무실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황제파 귀족이자 궁내관인 슐츠 공작. 애쉬그레이의 머리색에 다정한 인상을 한 중년이다.
다른 한 명은 정면의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는 아딜로트였다.
검은 제복에, 어깨에 걸친 남색의 코트.
약간은 피로한 듯 내리깐 눈빛도, 살짝 풀어헤친 앞섶도 기가 막히게 뇌쇄적이었다.
“아. 진짜 잘생겼다.”
잘 지내셨어요?
미아가 말하고 나서 흠칫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아딜로트와 슐츠 공작이 이게 뭔 소리냐는 눈빛으로 미아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새, 생각만 한다는 게…….”
아딜로트는 그 모습을 보더니, 실소를 흘리고는 깃펜에 잉크를 찍었다.
“페르 너무 괴롭히지 마.”
다행이다. 못 들은 척 해 주는구나. 미아가 얼굴에 손부채질하며 다가갔다.
“괴롭힘당한 건 전데요!”
“내가 볼 때 넌 누구한테 괴롭힘당할 성격이 아니야.”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저를 향한 관심?”
아딜로트가 서류를 보다 말고 제정신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헤헤.”
미아는 모른 척 쫄래쫄래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미아예요!”
그리고 옆에 있던 슐츠 공작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에반테스 슐츠입니다.”
설마 자신에게 인사할 줄을 몰랐던 슐츠 공작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반역자의 딸과 황제의 궁내관이라는 애매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내 궁내관 곤란하게 하지도 말고.”
그런 슐츠 공작을 위해 아딜로트가 끼어들었다.
“그냥 인사했을 뿐이에요! 앞으로 자주 볼 테니까.”
“네가 왜 슐츠 공작을 자주 봐?”
“제가 폐하 애완동물이라서?”
“……인권은 아예 포기한 거야?”
“제가 며칠 포기해봤는데, 없어도 그럭저럭 살만한 거 같아요!”
말이나 못 하면.
아딜로트가 헛웃음치고는 서류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왜.”
“보고 싶어서요!”
지이익.
펜촉이 크게 엇나갔다. 미아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에그! 조심하셔야죠!”
“…….”
그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종이를 치웠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나가.”
“엑.”
“바빠.”
“잠깐 대화할 시간도 없는 거예요?”
“응.”
진짜 바빠 보이긴 했다. 슐츠 공작 뒤에 놓인 서류의 양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나도 급하단 말이야!’
당황한 미아가 아딜로트 앞에 놓여 있던 서류를 발견했다.
“그, 그럼 제가 도와드리면 시간 내 주세요!”
“네가?”
아딜로트가 심드렁히 반문했다. 전혀 기대라곤 없는 듯한 태도에 미아가 눈에 힘을 주었다.
“이거!”
미아가 서류를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그러자 아딜로트의 분위가 묘하게 잔잔해지고, 동시에 예리해졌다.
그가 그런 반응을 하는 게 당연했다. 황제가 읽는 서류가 범상한 내용일 리 없다. 그래서 미아도 집무실에 들어온 내내 모르는 척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거 철광석 이야기죠! 전로에서 생산된 강철이 너무 잘 깨져서 문제라는 거죠!”
이윽고 나온 그녀의 말에 아딜로트도, 슐츠 공작도 말을 잃었다.
너무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서.
그것도 방금 흘낏 본 정도로.
심지어 암호로 쓰인 비밀문서를.
“재밌네.”
아딜로트가 혼잣말하고서 펜을 거꾸로 쥐었다. 미아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원작의 내용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분명 렌을 욕보이려 하던 귀족의 머리통을 펜으로 뚫어 버린 전적이 있었지……?’
뛰어난 검사인 그에게 무기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읽었지?”
“이, 읽은 게 아니라!”
미아는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제목은 읽을 수 있잖아요! 전로하고 강철이란 단어가 나오면, 고민할 문제는 그거밖에 없으니까!”
미아의 반론은 나름 타당했다. 암호야 황제와 최측근만이 읽을 수 있다지만, 하급 귀족들의 서류 처리를 위해 제목은 간단하게 공용어 낱말로 구성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낱말 몇 개로 내용을 추론해 냈다고?
심드렁한 표정 가운데에서도 창처럼 꽂히는 붉은 시선은 냉철했다. 미아가 울먹이며 외쳤다.
“미로미스 전로를 만든 게 저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그리고 제가 철강 사업도 지시했는데.”
“……그랬지.”
아딜로트가 뒤늦게 수긍했다.
허둥대는 몸짓과 강아지같이 순한 인상 때문에 잊곤 하지만, 확실히 그녀는 미로미스 상회의 주인이었다.
미로미스 상회의 주력 사업은 광업, 주류업, 그리고 농업기술.
주류업이야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가업이라지만, 나머지 둘은 달랐다.
광업과 농업.
둘 다 나라의 근간이자 경쟁력이다.
미로미스 상회는 샛별처럼 등장해, 놀라운 기술력으로 그 두 사업 모두에서 일약 최고의 상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니 미아가 전로와 강철에 대해 유추해 낸 것도, 분명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딜로트의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미아도 이해하는 부분이었다.
‘철광석, 특히 강철은 국방과 엄청나게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까.’
철광석은 무기의 재료다. 그래서 철광석은 모든 나라가 국가에서 엄격히 관리했고, 그건 오르퀘니나도 마찬가지였다.
‘반역자의 딸이 짚기엔 좀 민감한 문제였지. 으으, 왜 그게 보여선…….’
하지만 바빠서 못 만나 주겠다는데 미아로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의심받는 건 싫었다. 이 상황을 타파하려면,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더 큰 정보를 주는 것.
“서, 석회암을 쓰면 돼요!”
미아가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