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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22화 (22/193)

22화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복도 어드메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입만 살았지.”

반응이 영 싱겁다. 하지만 미아는 모르는 체 배시시 웃었다.

“저는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내내 시선을 피하던 그는 이젠 고개를 아예 반대로 돌려 버렸다.

“그게 중요해?”

“중요하죠! 원래 이런 건 빈말로라도 예쁘다고 해 줘야 하는 건데!”

미아가 과장되게 볼을 부풀렸다가, 금세 시무룩해져서 한숨을 쉬었다.

“무도회는 처음인데, 역시 좀 이상한가요? 그럼 춤은 못 출까요? 아무도 저한테 춤을 신청하진 않겠죠?”

“너 지금 네가 무슨 신분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야?”

아딜로트는 약간 기가 찬다는 얼굴이었다. 그제야 좀 평소의 아딜로트 같았다. 미아가 샐쭉 웃었다.

“사실 춤 안 춰도 괜찮아요! 우리 폐하 보기만 해도 춤은 다 춘 기분이니까!”

그녀를 잠자코 내려다보던 아딜로트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넌 지금 반역 혐의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너한테 함부로 접근할 리 없어.”

“그야 그렇죠?”

“그러니까 그게 네가.”

아딜로트가 헛기침했다.

“이상해서나……, 옷이 안 어울려서는, 아닐 거야.”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딜로트를 올려다보았다.

‘웬일로 이렇게 예쁜 말을?’

미아는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원래부터 쉽게 우울해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일단 우울해져 있기엔 파트너가 너무 잘생겼다.

‘얼굴 보고 괜히 웃음이 나와야 미남이라던데, 아딜은 웃음전도사를 해도 되겠어.’

그때, 아딜로트가 뭔가를 품에서 꺼냈다.

“아! 그거!”

미아의 눈이 반짝였다. 아딜로트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루비 반지였다.

“마법 걸린 거예요?”

“응.”

“현대에도 있었으면 견주들이 진짜 좋아했을 텐데.”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은 미아가 실실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제가 끼울게요!”

하지만 아딜로트는 반지를 주지 않고서 빤히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미아의 손을 잡고 손등을 위로 가게 뒤집었다.

“……형식상으로라도 네가 에스코트 받는 입장이니까.”

아딜로트의 낮은 목소리와 함께, 루비 반지가 미아의 약지에 자리잡았다.

미아는 놀라서 굳은 채 아딜로트가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나 지금 유사 결혼 한 거 같은데.’

미아가 괜히 홧홧해지려는 뺨을 애써 무시하며 시선을 피했다.

“예, 예습하셨으니까 나중에 황후 들이시면 손가락 잘못 끼워 주는 일은 없겠네요!”

“하. 넌 생각이 진짜…….”

잠시 실소한 아딜로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약혼자는 잊어버려. 변변찮은 놈 같은데.”

“약혼……, 아.”

‘그런 설정이었지.’

뒤늦게 자신이 했던 거짓말을 떠올린 미아가 괜히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딜로트는 재밌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우리 진짜 결혼한 것 같네.”

“…….”

우리랜다. 미쳤나 봐…….

미아의 심장이 한순간 덜컹거렸다. 분명 유혹하려는 의도가 아닐 텐데도 사람을 홀리는 걸 보면 아딜로트는 확실히 남주가 맞았다.

미아가 원망의 눈빛으로 아딜로트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평소처럼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가지.”

“네엥…….”

미아가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걷는 내내 아딜로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미아는 겨우 화제를 꺼냈다.

“그으런데 아딜, 오늘 무도회는 황권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 주려는 목적이죠?”

“그렇지.”

“그런 자리에 저를 데려간다는 건, 반역자를 철저하게 굴복시켰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고요. 맞아요?”

아딜로트가 약간의 망설임 뒤에 답했다.

“그것도 있고.”

미아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다른 것도 있단 뜻인가?’

아딜로트가 작게 헛기침했다.

“그래서?”

“아! 그러니까, 그럼 저, 모습만 조금 비춘 다음에 정원 구경하러 나가봐도 돼요?”

미아는 자신의 의도가 순수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최대한 활짝 웃었다.

‘물론 목적은 세레니티를 찾는 거고, 정원은 핑계지만!’

황궁 정원은 근사하다고 했으니까 구경하겠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진 않을 터였다.

그런데 돌연 아딜로트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정원은 왜?”

“……넹?”

“누구랑 만나려고.”

“딱히 약속은 없는데…….”

“약속도 없는데 무도회 날 밤, 정원을?”

“……오늘은 개방 안 해요? 저 지금 안 여는 걸 권력으로 열어 달라고 한 건가요?”

아딜로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뭔가를 가늠하듯 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표정만은 평소와 같이 무심했다.

그러나 살짝 든 턱과 내리깐 붉은 눈만으로도, 마치 검을 들고 있는 것 같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뭔데 대체…….’

미아가 영문도 모르고 침을 삼켰다. 당황과 억울함이 가득한 분홍색 눈을 내려다보던 아딜로트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다고 했나.”

“네?”

“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아?”

“무슨 뜻이라뇨?”

“무도회가 열리는 날 밤, 정원이 어떤 곳인지나 아냐고.”

“어떤 곳인데요……?”

미아가 불안하게 물었다. 삼박이는 분홍색 눈은 순진무구했다. 아딜로트가 얼굴을 찡그렸다.

“남녀가…….”

“남녀가?”

“…….”

“밖에서도 춤추나요?”

“그게 아니라, 하…….”

아딜로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백작은 대체 이런 걸 교육 안 하고 뭘 한 거야?”

“저 고등교육 받았는데…….”

“그 교육 말고.”

아딜로트가 코웃음과 함께 몸을 돌렸다. 어느새 무도회장이 코앞이었다.

“무도회에선 딴 데 가지 말고 붙어 있기나 해. 특히 정원은 출입 금지야.”

“엑.”

“들어간다.”

“정원 정도는 저도 갈……!”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황제 폐하 드십니다!”

미아가 외침을 끝마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거대한 무도회장이 드러났다.

* * *

“와…….”

미아는 순식간에 말을 잊었다.

엄청난 크기였다. 3층 높이까지 뻥 뚫린 천장 덕에 더 넓어 보였다. 화려한 금빛 장식이 사방에 가득했다.

‘샹들리에가 나보다 더 크잖아……?’

온통 보석으로 된 것 같은 무도회장에, 그 안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귀족들은 또 어떤가.

황제의 등장으로 모두 허리를 굽히고 있었지만, 화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뒤늦게 긴장이 몰려들었으나, 미아는 곧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인데 벌써부터 기죽을 수 없지! 난 내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미아가 비장하게 아딜로트를 돌아보았다.

“폐하……. 저 힘낼게요!”

“…….”

아니야. 뭔지 몰라도 하지 마.

아딜로트는 갑자기 몹시 불안해졌다.

“폐하는 반역자 셀레스티얼의 딸을 완벽하게 자기 편으로 회유한 모습을 보여 주셔야 해요!”

“지금 네 얘기 하고 있는 거 알지?”

“당연하죠! 저를 욕하든가! 술을 끼얹든가! 아니면…… 밟으세요!”

아딜로트가 뒷걸음질 쳤다. 그래, 미친 여자인 줄은 알았는데…….

“그 반역자의 딸을 굳이 무도회장까지 끌고 나와서 밟아 대는 내 평판은?”

“폐하 평판은 이미 바닥이니까 괜찮아요!”

“너 은근히 욕한다?”

“귀족들이 까불지 못하게 하는 게 먼저라는 뜻이죠!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귀족들보다는 백성들의 지지가 중요하고요!”

미아가 술술 답했다. 설명을 들은 아딜로트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요아힘이 평소에 하던 말과도 비슷했다.

확실히, 언사가 과격하긴 해도 사고 자체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그렇다고 들어줄 생각은 없지만.

“기각.”

“엥!”

“기사의 십계가 뭔지는 아나?”

“그거야……, 아.”

미아가 미간을 찡그렸다. 기사의 십계 중에는 약자를 보호한다는 계율이 있다.

그리고 아딜로트의 지지 기반은 군사력.

즉, 기사들이다.

“시늉이라고는 해도 기사도를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긴 좀 그렇겠네요…….”

“그래.”

“동물은 건드리는 게 아니니깐…….”

아니 잘 나가다가 왜 거기로 빠지냐고. 아딜로트가 한숨과 함께 한 걸음 나섰다.

“미아.”

생각지도 못한 부름에 미아가 움찔했다.

“됐고 따라오기나 해. 내가 널 책임지는 거지, 네가 날 책임지는 게 아니니까.”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우아한 걸음걸이로 앞서기 시작했다. 직사각형의 길쭉한 무도회장을 그가 가로지르는 동안, 귀족들은 여전히 모두 고개를 숙인 채였다.

미아는 이마를 문지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렇네. 이제 나는 아딜 밑에 있는 거니까…….’

소설 속에 들어온 이후 항상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상황이 어쩐지 어색했다.

‘역시…… 아딜의 애완동물을 목표로 해야겠어!’

크게 빗나간 인생 진로를 설정한 미아가 재빨리 아딜로트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무도회장보다 한 단 높은 단상 위.

누가 봐도 황제의 자리요, 하고 말하는 것 같은 화려한 의자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오르퀘니나는 아직 황후가 없기에, 공식 석상에서 늘 의자는 황좌 하나뿐이었다.

아딜로트가 황좌에 앉자마자, 미아는 전투적으로 눈을 빛냈다. 아딜로트는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럴 수야 없었다.

아딜로트 옆에 붙은 이상, 이미 아딜로트의 해피엔딩이 자신의 해피엔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려면, 미아는 온몸을 바쳐 아딜로트를 띄워 주어야 했다.

‘나는…… 애완동물이다!’

미아가 비장한 얼굴로 척척 다가갔다. 그리고 아딜로트의 발치에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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