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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23화 (23/193)

23화

“바닥에 앉지 마. 네가 무슨 표범인 줄 알아?”

“…….”

미아가 멈칫했다. 그녀는 잠시 뒤 양손을 바닥에 짚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딜로트가 빨랐다.

“엎드리란 것도 아니고.”

“…….”

“네 발로 서란 것도 아니야.”

“…….”

“무릎에 앉지 마.”

모든 시도가 무산되자 미아가 멍해졌다.

“의자를 가져오도록.”

아딜로트의 말에 시종은 빠르게 작은 의자 하나를 가져와 옆에 놓았다. 미아는 풀썩 자리에 앉은 뒤, 납득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긴 원래 동물들은 다 주인 의자에 앉죠…….”

“…….”

머리는 좋은 거 같은데 사고가 왜 저 모양일까. 아딜로트가 한숨을 내쉬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모두 고개 들어.”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살얼음 같은 분위기였다. 허리를 굽히고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황제 옆에 앉은 미아에게로 향했다. 그들이 보기에 미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실제로는 표범도 고양이도 아니면 횃대에라도 앉았어야 했나 고민하는 것에 불과했으나, 귀엽고 천진해 보이는 외모 탓에 적잖이 처량해 보였다.

“애완동물로 들였다더니, 진짜 동물 취급인 걸까요?”

“수틀리면 누구라도 저렇게 쥐락펴락하겠다는 뜻이군요.”

시선 교환을 마친 귀족들의 얼굴에 오해가 불러온 긴장감이 떠올랐다. 그들은 곧 들으란 듯이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폐하의 애완동물을 보세요. 털결이 곱네요.”

“훌륭한 주인 밑으로 가게 되어서 좋겠어요.”

아딜로트는 속닥임을 들으면서 침묵했다. 원래부터 무도회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평소보다 더 기분이 별로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옆자리의 미아를 살폈다.

기분이 나쁘진 않을까.

하지만 미아는 마냥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다. 속상하거나 상처받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보고 있자니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의 배짱이었다.

아딜로트가 실소를 흘렸다.

“무도회를 시작하지.”

곧 왈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짝을 이뤄 무도회장 중앙으로 나섰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한 쌍의 백조처럼 춤추기 시작했다.

‘……와.’

미아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옆에서 아딜로트가 물었다. 돌아보니 그는 다리를 꼰 채, 따분하다는 듯이 사람들을 보는 중이었다.

“그냥, 너무 예뻐서요…….”

“저런 거 좋아해?”

“처음이라…….”

아딜로트가 멈칫했다.

“기억상실이랬나?”

“네. 1년 전에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갑자기? 내가 듣기론…….”

아딜로트가 중간에 말을 멈췄다.

미아는 그다음 말이 무엇이었을지 알고 있었다.

‘원래의 미아 셀레스티얼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나 보네.’

미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남 일이었다.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저도 제가 왜 기억상실에 걸렸는지는 들었지만, 그게 뭐 별일이라고.”

“……그런 시도까지 할 정도면 별일이 아닌 게 아니었을 텐데?”

“어차피 기억도 없고, 불편한 점도 없고. 그러면 굳이 감상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시간 아까워.”

지극히 논리적인 말에 아딜로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그렇게 보세요?”

“생각보다 냉정하다 싶어서.”

아딜로트가 한 박자 쉬고 말했다.

“감옥 앞에서는 그렇게 갑자기 울었―.”

“으아아!”

난데없는 절규에 춤을 추던 귀족들이 깜짝 놀라 박자를 놓쳤다.

‘남의 흑역사를 이런 곳에서!’

미아는 당장이라도 아딜로트의 입을 막고 싶다는 듯이 몸을 들썩이며 울상을 지었다.

“그, 그보다 폐하! 춤은 안 추세요!?”

“춤?”

“네! 무도회잖아요!”

미아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오늘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이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한 렌을 만나서 아양 떨기…… 가 아니라 친분을 쌓기!’

아딜로트가 자리를 떠야 자신도 세레니티를 찾아갈 수 있을 텐데.

아딜로트는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누군가와 대화라도 나누면 좋으련만, 아무도 아딜로트에겐 다가오지 않았다.

아딜로트 자신도 그것에 괘념치 않는 듯했다.

“이런 건 남자가 먼저 신청하는 거죠? 예쁜 영애들이 많은데, 가서 춤이라도 추시는 게!”

“나중에 바이지겔과 한번 추고 말 거야.”

바이지겔은 미아도 아는 이름이었다. 대표적인 아딜로트의 기사이자 여백작이다. 미아가 울상을 지었다.

“다들 아쉬워할 텐데!”

“그럴 리가.”

그 말에 아딜로트는 코웃음을 쳤다.

“너 같으면 사람 죽이고 다니는 황제랑 춤추고 싶겠어?”

“네!”

“…….”

“잘생겼으니까!”

아딜로트가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했다.

“그런 겁 없는 여자는 너밖에 없어.”

“그건 아닐 텐데…….”

“아니라고?”

미아가 말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손가락으로 X자를 그려 입 앞에 대었다.

‘곧 여주인 렌이 나타날 테니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던 미아가 딴청을 부리며 무도회장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누군가가 가장자리를 돌아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은?’

미아가 곧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몽땅한 키에 굵은 몸통. 무성한 턱수염과 손에 든 술병.

미아도 아는 누군가가, 아딜로트 앞에 다가왔다.

“폐하. 충신 루치아노 지로티, 인사드립니다.”

“아. 노인네.”

미아가 황제궁의 정원에서 만났던 노인이었다. 그는 전과 달리 제대로 예복을 차려입고서, 깍듯이 아딜로트에게 인사했다.

‘저 할아버지가 지로티 공작이었어!?’

적잖이 친근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미아가 경악했다. 지로티 공작이라면 미아도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몇 번 언급된 적이 있었으니까.

루치아노 지로티 공작.

오르퀘니나 북부 라지푸트와의 국경을 다스리는 자.

아딜로트와는 그가 북부 전선에서 구를 때 인연을 맺었으며, 그 이후로도 꾸준히 아딜로트를 지지해 왔다. 라지푸트와의 전쟁이 대승으로 끝난 덕에 지로티 공작가의 세는 어마어마하게 강해졌다.

아딜로트가 무사히 황제가 된 것의 삼 할은 지로티 공작의 지지 덕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원작에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미아는 그게 지로티 공작이 너무 잘생겨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대중 소설에서 북부 공작이라고 하면, 흑발에 벽안을 가진 잘생긴 미남의 이미지니까.

‘그런데 미남은커녕 술주정뱅이에! 할아버지에! 심지어 의원이라니!’

아딜로트에게 인사를 마친 지로티 공작이 미아에게 씩 웃어 보였다.

“큼, 큼. 정체까지는 추측하지 못한 모양일세?”

“너무 행동거지가 자유분방하셔서…….”

“자네, 돌려 까는 거구만?”

“들켰네요…….”

“숨기지도 않아 놓구선!”

지로티 공작이 박장대소했다. 그러다 그가 문득 눈을 빛냈다. 공작의 미소가 눈에 띄게 능글맞아졌다.

“허어……. 제법 괜찮은 반지구만? 누가 줬나?”

“아, 이건…….”

“노인네, 슬슬 가지?”

아딜로트가 즉시 끼어들었다.

“이런 곳에 오기엔 너무 늙지 않았어?”

하지만 지로티 공작은 강적이었다.

“젊은이들이 정분이 나려고 하는데 그럼 노인네가 신나서 들여다봐야지요!”

“……누가 누구랑 정분이 난다고?”

“당연히 요 미아 양이랑 그녀의 전 약혼자 말입니다.”

“…….”

“설마 폐하라고 생각하신……, 큼, 큼! 나이를 먹으니 주책이 늘어선!”

서늘한 시선에 지로티 공작이 바로 꼬리를 말았다. 오르퀘니나의 젊은 황제는 가끔 정말로 무섭다.

“그래, 자네 전 약혼자는 와 있나?”

지로티 공작이 황제 쪽을 포기하고 미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그런 사람 없는데 왜 이리들 집착해! 차였다고 말했으면 됐잖아!’

남의 치정 사건 좋아하는 건 소설 속도 다를 게 없나 보다. 당황한 미아는 빠르게 머릿속에서 계산을 펼쳤다.

‘무도회장 가로가 약 90미터! 세로가 약 15미터! 단위면적당 사람 수를 계산했을 때, 무도회 참석자 수는 약 삼백여 명! 오르퀘니나의 중앙 귀족 수를 고려하면……!’

참석했다고 말하는 쪽이, 있지도 않은 ‘전 약혼자’를 찾기에 더 어렵다!

계산을 마친 미아가 방긋 웃었다.

“네! 온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어요!”

설마 이 많은 사람 중에서 찾아보진 않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이러다 가상의 약혼자라는 거 들키면 이상한 취급 받을 거 아냐!’

그런데 아딜로트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와 있다고?”

“……네에!”

“흐음.”

그가 예쁜 루비 같은 눈을 빛내며 무도회장을 훑었다. 심드렁하던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붉은 눈에서 나른함이 걷히자 그 밑에 깔려 있던 송곳 같은 예리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대체 왜!?’

미아가 속으로 절규했다. 그리고 재빨리 아딜로트 앞을 가로막았다.

“나, 남의 전 약혼자는 왜 찾으시는데요!”

“딱히 찾은 건 아니고.”

“아닌데! 찾았는데!”

이쯤 하면 대충 포기하고 넘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왜 그렇게 반응해?”

아딜로트의 얼굴에 묘한 잔인성이 떠올랐다.

“새 사랑 찾을 거라더니. 아니면 아직 못 잊었나 보지.”

“그, 그게 아니라……. 혹시라도 폐하가 해코지하면 안 되니까……!”

“내가 왜.”

“……그럴 이유는 없지만! 만에 하나!”

“그래서 새 사랑은 찾았고?”

“네?”

아니 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어.

미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울상지었다.

“크흡, 크, 흐흐흐, 으흐흐흐.”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지로티 공작은 흐느끼다 못해 입을 가렸다. 아딜로트는 짜증스러운 웃음소리를 무시하고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생각해 봐. 혹시라도 네가 반역자면, 그 약혼자도 반역에 가담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러니까 내가 그 남자를 찾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크흐흑! 으하, 흐흐흐…….”

“네에!?”

미아가 억울함에 입을 벌렸다.

‘정말로 아직도 날 의심한다고!?’

미아가 억울하다 못해 서운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표정을 보고 나서야 아딜로트도 실수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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