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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49화 (49/193)

49화

“그, 하하……. 그보다 골치 아픈 일이요?”

무시할 수 없는 단어에 미아가 물었다. 그 즉시 페르디안의 얼굴에 미약한 짜증이 배어 나왔다.

“세크레 호수에서 야유회가 있다.”

“……?”

잠시간의 멍한 표정 뒤.

“……타이타닉!”

미아가 벼락같이 외쳤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원작의 내용이 차르르 펼쳐졌다.

타이타닉 사건.

독자들이 지어 준 이 별명은 세레니티가 테레지아 때문에 고생하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바로 세레니티가 세크레 호수 야유회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것.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젊고 잘생기고 미혼인 황제 아딜로트는 아직 황후를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들은 어떻게든 자기 딸을 황후로 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온갖 종류의 야유회였다.

‘사냥 대회, 꽃 축제, 뱃놀이, 요리 대회, 사육제……. 정말 별게 다 있었지.’

그중 대망의 세크레 호수에서 열리는 뱃놀이 날.

아딜로트와 가장 가까운 여자인 세레니티를 질투한 테레지아는 세레니티의 배에 폭발석을 설치해 놓는다. 뱃놀이용 보트를 담당하는 관리인을 매수해서 말이다.

세크레 호수는 맑지만, 깊다. 그런 호수 중심에서 세레니티의 배는 폭발했다.

수영을 못하는 세레니티는 그대로 물에 빠져 죽을 뻔하고, 가까스로 구출된 이후에도 폐렴과 익수 합병증으로 오래 고생하고 만다.

‘와. 그 사건 일어나는 거야?’

물론 흐름이 바뀌었으니 똑같이 진행될 것 같진 않았지만, 그거야 모르는 일. 미아가 테레지아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너…… 가만 안 둬.’

음산하다 못해 귀기까지 보이는 번들번들한 눈동자.

그 말을 하면서도 미아를 후려칠 기회를 노리던 주먹까지.

“…….”

응. 백프로 뭔가 벌이겠네.

미아가 바로 페르디안의 소매를 덥석 잡아끌었다.

“가요. 페르 님.”

“가자고?”

“네! 할아버지한테!”

“……이렇게 갑자기 말인가?”

“운명은 원래 갑작스러운 거예요!”

개소리라고 뿌리칠 줄 알았는데, 페르디안은 의외로 얌전히 미아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 지나지 않아, 미아는 페르디안을 돌아보며 해맑게 물었다.

“참. 보트 관리소가 어디예요?”

* * *

세크레 호수에서의 야유회 날이 되었다. 미아는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세레니티와 함께 뱃놀이 장소로 향했다.

호숫가에는 오늘 뱃놀이에 참여하는 귀족 영애들이 삼삼오오 모여 황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아. 주머니가 무거워 보이는데 제가 나눠 들까요?”

“아니! 괜찮아. 다 필요한 거야!”

세레니티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더 말하지 않고 정면을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정말 아름다운 호수네요.”

그 말 그대로였다. 흰 햇살이 보석처럼 부서지는 파란 호수는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하지만 미아의 눈에는 다른 게 더 들어왔다.

“응. 그리고 개미 떼 같네!”

바로 그 아름다운 호수 둘레에 진을 친 귀족들의 차양이었다. 차양에 수 놓인 상징만 봐도 내로라하는 가문은 다 모였음을 알 수 있었다.

“딸 있는 귀족은 다 모였나 본데?”

“그러게요. 그렇게들…….”

세레니티가 뒷말을 삼키고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비속어 하나 없이 표정만으로 모든 걸 말할 수 있다니, 정말로 로판 여주다운 품격이었다.

“그래. 그렇게들 아딜 욕을 하면서 말이야! 양심은 집에 놓고 다니나?”

하지만 나는 로판 여주가 아니니깐.

미아의 낭랑한 목소리에 영애들 중 몇 명이 힐끔거렸으나 그들은 이내 차림새를 손보는 것에 몰두했다. 모두 들떠 보였다.

야유회는 말하자면 황제의 비공식 다중맞선.

어떻게든 황제랑 자기 딸을 엮어보려는 귀족들의 집념이 담긴 구애의 장이라 할 수 있었다.

분명 많은 대귀족은 아딜로트를 싫어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딜로트에게 줄을 대기를 원했다. 아딜로트의 황권은 나날이 공고해지고 있었으니까.

‘뭐. 그거 말고도 워크홀릭인 황제한테 다리 좀 놓아 달라는 영애들도 많았겠지만 말야.’

개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테레지아 카르디날레다. 미아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잘 보이지도 않는 그녀를 살피는데, 세레니티가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미아도 오늘 야유회를 많이 기대한 거죠?”

“응?”

“배를 구경하러 일부러 보트 관리소에 다녀왔다고 했잖아요.”

세레니티의 말에 미아가 움찔했다. 사전 작업을 위해 보트 관리소에 들렀던 걸 그렇게 둘러댄 게 떠오른 것이다.

“뭐, 그, 그렇지!?”

“후후. 미아가 호수를 좋아하는 걸 알았다면 진작 와 볼 걸 그랬어요.”

“으응, 뭐, 앞으로 기회는 많으니까!”

“그런데 오늘 폐하와 같이 타는 거 아니었나요? 왜 여기서 저랑 같이 대기를…….”

“아……. 그건.”

미아가 뺨을 긁적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근래 들어 아딜로트는 자신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망명 의사를 타진했던 그날의 대화 이후, 그는 미아가 있는 침실에 돌아오지도 않았다.

‘일이 바빠서. 당분간은 혼자 자.’

시녀인 제인을 통해 그렇게 전해왔지만, 변명인 게 뻔했다. 미아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무리 인재 유출이 문제라지만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이야…….”

“네?”

“아니야! 괜찮으니 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별일 아닐 테니까.”

선을 긋는 듯한 미아의 말에 세레니티는 잠시간의 침묵 후 미소 지었다.

“그런가요. 미아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때, 인파를 가르고 기사들이 척척 걸어 나왔다. 그들은 좌우로 갈라져 길을 만들었고, 곧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 레벤토르의 주인,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황제 폐하 드십니다.”

궁내관의 외침을 필두로 마침내 아딜로트가 등장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숨을 죽였다.

뱃놀이라고 아딜로트가 평소와 달라진 건 아니었다. 어깨에 걸친 남색의 코트도, 느긋한 걸음걸이와 팔짱 낀 자세도. 진줏빛 은발과 무심한 붉은 눈도 여느 때와 같았다.

“허억…….”

“눈부셔…….”

“주님 한 명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숫가라는 이유만으로 평소보다 더 광채를 발하는 천하절색의 미남이긴 했습니다만.

‘렌은 어떨까?’

미아가 옆의 세레니티를 흘낏거렸다. 때마침 세레니티는 초점 없는 눈으로 빙그레 미소지은 채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눈부시네요……. 쓸데없이.”

“…….”

응. 그래. 너네 진짜 사이 안 좋구나.

미아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다시 아딜로트를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붉은 눈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

저도 모르게 미아는 숨을 멈추고 그 눈을 마주보았다. 묘하게 주변이 고요해지고 사람들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으나, 세상이 진공 상태가 된 것처럼 시선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아딜로트가 먼저 뭔가를 생각하듯이 입술을 꾹 다물곤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미아는 가만히 서서 그가 호숫가로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미아. 왜 그래요?”

“응? 아.”

미아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세레니티의 손을 꽉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으아! 미안해!”

하지만 세레니티는 미아의 얼굴을 가만히 살피더니, 이윽고 다정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아. 오늘 저랑 같이 배에 탈래요?”

“응?”

“폐하랑 같이 타지 말고 저랑 타요. 어때요? 저는 미아랑 좀 더 친해지고 싶어요. 할 말도 있고요.”

그 말에 미아가 멍하니 세레니티를 바라보았다.

‘아마 아딜은 나를 안 부를 텐데.’

그걸 세레니티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곧고 맑은 세레니티의 금빛 눈을 바라보던 미아는, 이내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자! 우리 둘만 오붓하게 타는 거야!”

“좋아요. 미아가 절 선택해 줘서 기뻐요.”

“이참에 결혼할까!”

“그럴까요?”

“아하하! 이럴 땐 거절하는 거야, 렌!”

그때 가장 선두에서 걷던 아딜로트가 보트를 매어놓은 선착장에 다다랐다.

“폐하. 어느 영애와 같이 타시겠습니까?”

궁내관인 슐츠 공작이 물었다.

그 말에 아딜로트의 뒤에 서 있던 영애들이 숨을 죽였다. 더러는 경멸감 때문이었지만, 대부분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폐하.”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헤치고 테레지아 카르디날레가 나섰다. 그녀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휘황찬란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뱃놀이보다는 연회에서 보는 게 더 적절할 법한 옷차림이었으나, 그를 바라보는 아딜로트는 심드렁했다.

“테레지아 카르디날레.”

“……네. 폐하.”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도 테레지아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곧 홍조 띤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제게 폐하와 함께 세크레 호수의 정경을 만끽할 기회를 주시겠어요?”

하지만, 아딜로트는 냉담했다.

“아니.”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답하고서 호수의 정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테레지아는 그 옆에서 그대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놓여졌다.

“…….”

이유를 설명하지도, 변명을 주워 담지도, 위로의 한마디를 건네지도 않는 냉정함.

테레지아의 귀 끝이 확 붉어지는 게 보였다.

빠직.

그녀의 손아귀에 들린 양산 손잡이가 부서지는 것도 보였다.

‘……쟤는 기사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뒤에서 미아가 남몰래 감탄할 때였다. 아딜로트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무심한 붉은 눈이 미아와 마주쳤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혼자 탈래.”

그가 다시 호수를 응시하며 하는 말에 슐츠 공작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혼자 타지.”

“재고해 주십시오. 이번 야유회의 목적을…….”

아딜로트가 슐츠 공작과 작게 실랑이하는 사이, 미아와 세레니티는 다른 곳으로 안내받았다.

“세레니티 듀레인 양의 배는 이쪽입니다.”

정박된 배 중 가장 끝자락에 있는 배였다. 그것을 본 순간, 미아는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의 내용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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