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그거야말로 미아가 원하던 일이다.
“좋아! 대환영! 아딜이 잘할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잘해?”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구연동화 날이랍니다.”
세레니티가 미아를 향해 다정히 웃었다.
‘일부러 쉽게 돌볼 수 있는 방법으로 신경 써 준 거구나!’
구연동화라면 아딜로트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남자주인공답게 목소리부터가 끝내주니까.
세레니티는 넓은 놀이방에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아이들이 아딜로트 앞에 옹기종기 앉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나라에서 제일 높으신 분이라는 걸 에리히만 원장이 미리 말한 모양이었다. 억지로 끌려와서인지 눈에 불신과 권태가 가득하긴 했지만.
‘미안, 얘들아! 끝나면 아딜한테 복지 예산 좀 올려 달라고 말해 볼게!’
아딜로트가 동화책을 펼쳤다. 미아는 뒤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용기 있는 공주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구연동화를 시작하자 아이들은 순식간에 아딜로트에게 집중했다. 같이 지켜보던 세레니티가 약간 놀랄 정도였다.
“……생각보다 잘하시네요?”
“그러게……?”
“발성이 좋으신 줄은 진작 알았지만, 아이들 호흡에 잘 맞춰 주시네요.”
미아가 괜히 뿌듯해졌다. 역시 남자주인공은 못 하는 게 없다.
“……금빛 공주는 검은 여왕을 빛나는 칼로 푹 찔렀어요.”
하지만 잘하던 아딜로트가 곧 눈살을 찌푸렸다.
“이 동화책은 고증이 형편없군. 작가가 누구지?”
미아가 놀라 아딜로트 옆으로 다가갔다.
“왜요, 폐하?”
“칼에 찔리면 비명을 못 질러.”
“그걸 어떻……, 아닙니다, 안 묻겠습니다…….”
잊지 말자. 상대는 폭군이다.
‘어쩐지 정서 교육에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말리는 게 좋을까?’
그 순간, 가장 앞줄에 앉아 있던 아이가 눈을 빛냈다.
“그럼 칼에 찔리면 어떻게 돼요?”
“적어도 비명은 못 질러.”
“빛나는 칼이라서 되는 거 아니에요?”
“소재가 뭔데?”
그걸 애한테 묻니?
그런데 아이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이아몬드……?”
‘윽, 귀여워!’
미아가 제 심장을 움켜잡았다. 자기가 아는 제일 비싼 게 다이아몬드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딜로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때마침 내가 가진 다이아몬드 검이 있네. 다를 것 같진 않지만,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시도해 보고 알려 주지.”
“와!”
아이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모두가 좀 더 아딜로트와 미아 곁으로 다가왔다.
“다이아몬드 검이 있어요?”
“그래.”
“얼마짜리예요?”
“133억 골드.”
그게 얼마지, 하는 얼굴에 아딜로트가 첨언했다.
“정무직 관료로 66년 정도 일하면 살 수도 있어.”
‘……그거 황제 아니면 재상 아니면 장관이잖아.’
……라고 말하기엔 아이들의 눈이 너무 반짝거렸다. 미아는 양심에서 눈을 돌렸다.
그때 아이 중 한 명이 우물쭈물하며 손을 들었다.
“저희가 그런 대단한 게 될 수 있을까요……? 저흰 엄마, 아빠가 없는데…….”
“나도 없어.”
야.
경악한 미아를 두고, 아딜로트와 아이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와! 그런데도 황제 폐하 할 수 있어요?”
“응.”
“어떻게요?”
“칼로…….”
“벤 듯이 철저한 시간 관리와 예습, 복습을 통해서랍니다!”
이 이상은 안 된다! 미아가 재빨리 아딜로트의 입을 막았다. 아딜로트가 불퉁한 시선을 보냈지만 무시했다. 다행히 아이들의 순수한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 보였다.
“우리도 공부 열심히 하면 정……, 정……, 관료 할 수 있대……!”
“와……!”
“황제 폐하가 하신 말이니까 진짜겠지?”
“난 관료 되면 과일 들어간 빵만 하루에 백 개 먹을 거야!”
놀랍게도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참으로 신묘한 공감대 형성이었다. 미아의 손에서 힘이 풀리자, 아딜로트가 동화책의 마지막 장을 읽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아이들은 입을 모아 합창했다.
“다이아몬드 칼을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자!”
* * *
“구연동화는 끝났나요?”
“응! 생각보다 집중도 잘하고 귀엽더라! 지금은 폐하가 잠깐 놀아 주고 계셔.”
말하던 미아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리고 미안……. 의도치 않게 자본주의의 추종자들을 만들어 냈어…….”
“네?”
“아냐…….”
세레니티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고마운걸요. 저를 너무 따라서 곤란했는데…….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아이들이 세레니티를 많이 좋아해?”
“그런 편이에요. 신기하죠? 다른 봉사자들에게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 왜 그렇지?”
미아가 방 안의 아딜로트와 세레니티를 번갈아 보았다. 아딜로트의 얼굴을 보는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얼굴인가!’
묘하게 삶의 깨달음을 하나 얻은 기분이었다. 곧 아딜로트가 다가왔다.
“생각보다 어렵진 않네.”
“순한 아이들이랍니다.”
“맡고 있는 아이의 수는?”
“백십여 명 가까이 됩니다.”
“그렇게 많아 보이진 않는데?”
세레니티가 살짝 곤란한 듯이 웃었다.
“운영비가 부족해서…… 나이가 찬 아이들은 나가서 일을 돕고 있어요.”
그렇군, 하고 아딜로트가 태연히 고개를 돌렸다. 일견 아무 감흥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예산을 끌어올 곳이 있던가…….”
지켜보던 세레니티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가 미아에게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좋은 분이세요. 미아 말대로.’
괜히 뿌듯해진 미아가 샐쭉 웃었다. 그래, 우리 아딜이 알고 보면 맘씨가 예쁘다니까!
구빈원에서의 다음 봉사활동은 젖먹이기였다.
“분유를 먹여 주시면 돼요.”
“어떻게?”
“안고서 젖병을 입 근처로 가져다주면 됩니다.”
세레니티가 시범을 보였다. 그녀는 머리도 못 가누는 아기를 안아 젖병을 물렸다.
“웃.”
‘눈부셔!’
성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왜 세레니티가 거리의 천사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나였다면 일단 무릎 꿇고 헌금부터 하고 본다. 아니면 발바닥부터 핥든가.’
시범이 끝나자 아딜로트의 차례였다. 미아는, 아딜로트가 그렇게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목이 떨어지지 않게 안아 주세요, 폐하.”
꼬물거리는 아기를 건네받은 아딜로트가 표정을 관리할 새도 없이 굳었다.
“목을……, 목을 받치라고?”
“힘내요, 아딜! 어어, 목 떨어져요!”
“잡으면 터질 것 같다고!”
“누르지를 마세요!”
“그럼 네가 해!”
“나, 나도 잘 모르는데!”
“나라고 알 것 같아?”
“……제가 자세를 좀 고쳐드릴게요. 자, 이렇게…….”
보다 못한 세레니티가 나섰다. 한 발짝 물러난 미아의 기분이 잠깐 묘해졌다.
‘원작 남주와 원작 여주.’
아직도 조금은 신경 쓰인다.
‘하지만 세레니티가 괜찮다고 말해 줬으니까.’
미아는 흔들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딜로트는 세레니티의 손이 팔에 닿자 흠칫 놀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곳을 더듬으면 즉시 벤다.”
“제가 왜 그런 짓을 하나요?”
“변태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선량한 의도를 의심하시다니, 폐하께서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겠군요.”
파직.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서로를 변태 취급하는 건, 좀 막아야 할 것 같지만!’
곧 아딜로트의 자세가 그럴듯해지자, 세레니티는 다른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떠났다.
아기는 온순했고, 작았다. 작고 통통한 풍선 같은 손가락이 연신 꼬물거렸다.
아딜로트는 묘한 얼굴로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작다.”
“느낌이 어떠세요?”
“부서질 것 같아.”
“사람이 그렇게 쉽게 부서지진…….”
상대가 폭군이라는 걸 떠올린 미아가 말을 바꿨다.
“……않지는 않겠지만, 아기니까 당연하겠죠?”
“……하얘.”
“하얗네요.”
“그리고 너랑 비슷한 냄새 나는 것 같아.”
“저요?”
기분이 살짝 애매해졌다.
‘젖비린내난다는 걸 돌려 말하는 건가?’
하지만 아딜로트의 표정은 평온했다. 미아는 눈을 흘기며 목을 가다듬었다.
“흠, 흠! 폐하? 제인 씨에게 여쭤봤는데, 저희 같은 향유 쓴대요. 그러니까 저한테서는 그런 냄새가 날 수가 없다니까요?”
“하지만 나는데.”
“착각이에요. 우리가 쓰는 향유는 네롤리 향이거든요! 당연하지만 폐하도 피 냄새 같은 건 안 나고요!”
“난 모르겠지만, 너한테서는 확실히 이런 냄새가 나.”
“아니라니까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허? 확인해 보시든가요!”
“좋아.”
“네?”
그렇게 말하며 아딜로트가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미아는 단박에 굳었다.
내리깐 눈, 반짝이는 은발. 키스할 듯 가까이 다가오는 고개의 각도.
아딜로트의 코끝이 미아의 목덜미에 닿았다. 피부에 숨결이 닿는 느낌에 미아가 숨을 헉 들이켰다.
“봐. 역시 나잖…….”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든 아딜로트는 흔들리는 분홍색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
“…….”
“…….”
좀처럼 당황하는 일이 없던 미아가 바짝 굳어 있었다. 어깨는 움츠러들어 있었지만, 뺨이며 귀며 목덜미까지 붉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 떨렸다.
‘토끼…….’
아딜로트의 기분이 순식간에 붕 떴다. 방금까지는 그놈의 선전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는데.
그냥, 미아의 표정을 본 순간, 오길 잘했다 싶었다.
“너…….”
“…….”
미아가 흠칫했다. 입술을 꼭 깨문 것이, 자기 반응에 자기도 놀란 모양이었다. 숫제 울 것 같았다. 어쩐지 짓궂게 굴고 싶어지는 얼굴이었다.
아딜로트가 떨어졌던 고개를 저도 모르게 다시 미아 쪽으로 움직였다.
“지금 엄청 빨―”
“죄송하지만, 폐하?”
그 순간, 세레니티가 북풍처럼 싸늘하게 둘 사이를 갈랐다.
“연애하시려면 밖으로 나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