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미아의 기대심리가 급격하게 시들었다.
“이것은 왜……?”
미아가 익힌 시금치처럼 파들거리며 구슬을 받아들었다.
“앞으로는 몸에 가지고 다니게. 하나는 혹여나 자결이 필요할 때 쓰고, 다른 하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황제를 빨리 죽이라는 뜻이겠지.
미아가 허허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주려면 작고 반짝이는 걸 주실 것이지…….”
“음? 뭐라고 했느냐?”
“아닙니다아…….”
미아가 질린 눈으로 구슬 같은 약을 내려다보았다.
‘보통 이런 거 받으면 자기가 먹게 되던데.’
절대 그런 일만은 없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미아가 눈썹에 힘을 줬다. 크리소르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긴장되나?”
“네에……, 뭐.”
“걱정하지 말고 힘써 주길 바라네. 대의를 위해 말일세. 모든 게 끝나는 순간, 내 반드시 후사할 테니.”
그 말에 미아는 잠시 침묵했다. 슬슬 여기 온 목적을 꺼내야 할 때였다.
“황태후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하라.”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클라우디오 선 황태자 전하께 일어난 그 사건……. 의원은 사인이 후두부 충격으로 인한 뇌출혈이라고 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순간.
크리소르의 얼굴에선 지금까지의 관대한 빛이 싹 사라지고 베일 듯 싸늘한 무표정만 남았다. 완연한 병색 덕에 그녀의 모습은 살아 있는 시체처럼 보였다. 목소리 역시 몹시도 건조하고 날카로웠다.
“그래서?”
“그게……. 그렇다면 황제 폐하께서 선황태자 전하를 죽인 건 아니지 않을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뻔하지 않나!”
쾅!
주먹으로 팔걸이를 내리친 크리소르의 녹색 눈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아딜로트 그 근본 없는 것이 내 아들을 밀쳤겠지! 질투에 눈이 멀어 말이다!”
하지만 미아도 지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딜로트 폐하께서는 그때 딱히 정치적 움직임이 없으셨다고 들었…….”
“뭐라고!”
“……든가 어쨌든가 사실 그날 외출은 계획에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고…….”
“때를 기다린 것 아니겠나!”
“으음……. 그러니까 클라우디오 선황태자 전하께서 자신을 찾아올 걸 알고 계셨다……?”
“우리 클라우디오는 어지간히 착한 아이였으니 말이네!”
이 여자 확인할 방법 없다고 정말 아무 말이나 하네…….
원작에서 클라우디오 황태자가 얼마나 궁인들을 못살게 굴었는지 아는 미아의 말문이 막혔다.
그사이 크리소르는 거친 숨을 내쉬며 노기에 몸을 떨었다.
“그래. 가진 거라곤 반반한 얼굴밖에 없는 타국의 계집이 황비가 되었을 때부터 예상했지…….”
“폐하……?”
“그 여자는 마녀고! 그 아들도 마찬가지야!”
“으으음!”
미아가 곤란하다는 듯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니까 증거는 없지만 아딜로트 폐하께서 수작을 부려서 클라우디오 저하를 죽였다는 거군요? 증거는 없지만?”
“그래!”
물론 크리소르나, 보통 황자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가긴 했다.
태자와 황자의 실종. 사고. 그리고 태자의 사망.
절대 왕위에 오를 것 같지 않던 황자는 황제가 된다. 딱 봐도 뭔가 뒷이야기가 있을 것 같지만…….
‘문제는 아딜은 정말 아니었다는 거지.’
미아가 좀 더 호소하듯 입을 열었다.
“황태후 폐하. 괜찮으시다면 좀 더 조사를…….”
“미아 셀레스티얼!!”
기어이 크리소르가 노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시녀들이 부축하려 했으나, 크리소르는 시녀들을 쳐내곤 광인처럼 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넌 그냥 내 명령대로 아딜로트를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게 네 역할이야! 주제넘게 굴지 말고 아딜로트의 목이나 가져와! 사냥개로 써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것이지 어디 감히 내가 하는 일에 어깃장을 놓으려 들어!!”
뇌성 같은 외침이 끝나자, 찬바람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크리소르는 놀란 얼굴의 미아를 보며 뒤늦게 흠칫했다.
“……흠. 미아 양. 내 말은…… 그러니까.”
그러나 미아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곧장 명랑하게 외쳤다.
“잘 알겠습니다!”
“…….”
크리소르가 다시 한번 흠칫했다. 보통 그녀가 노호를 내지르면 다들 벌벌 떨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미아에게서는 두려워하거나 울컥하는 기색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도무지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군.’
아비는 그렇게나 알기 쉬운 이였는데 말이다.
“……쯧.”
미묘한 압박감과 껄끄러움을 느끼며 크리소르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아 양, 내가 흥분했군. 미안하네. 내게도 너무 민감한 주제인 나머지…….”
“그렇죠, 아무래도!”
“미아 양의 노고는 내가 알지. 때가 되면 내 크게 치하할 것이니 힘내 주게.”
“제 나름대로 힘을 내고 있지만, 더 해 볼게요!”
“그래…….”
말꼬리를 늘이던 크리소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이 잘 끝나야 무사히 그대의 아비를 만나지 않겠는가.”
미아가 다시 놀란 듯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것마저 크리소르의 예상과는 달랐다.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셀레스티얼 백작의 이름을 꺼내면, 적어도 그리움이라도 비출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미아는 마치 남 이야기라도 듣듯이 방긋 웃었다.
“그러게요!”
“…….”
크리소르는 어쩐지 이 조그만 영애를 상대하는 것이 노련한 정치가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한편 미아는 인사하는 척 고개를 숙이자마자,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사냥개라 이거지.’
자고로 사냥개는 사냥이 끝나면 버림받는 법.
하나만은 확실했다.
크리소르는 정말로 아딜로트 암살에 성공하면 미아에게 누명을 씌우고 팽할 것이다. 애초에 크리소르가 귀족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는 정통성 때문이었다.
태자를 낳았다는 정통성.
크라우스 공작가의 권위.
그런 그녀가 황제를 죽인 사람을 안고 갈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 바뀌지도 않을 것 같네.’
미아는 대화로 그녀를 회유해 보려는 마음을 접었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처지는 분명 안타깝다. 하지만 사실을 보려 하지 않는 크리소르의 행동은 집착에 불과했다.
이제 남은 건 정말로 싸움뿐이었다. 율리시즈의 말대로 말이다.
‘해 보자고. 마지막에 먹히는 건 물론 내가 아니겠지만.’
* * *
미아가 크리소르의 궁에 들어간 뒤.
세레니티와 아딜로트는 정원에 둘만 남았다. 세레니티가 바로 아딜로트에게 허리를 숙였다.
“폐하. 늦었지만 사죄드립니다.”
“사죄?”
무심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아딜로트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세레니티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싸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들어 있지도 않았다.
세레니티가 차분히 말했다.
“세크레 호수 야유회 날. 말벗이라고는 하나 미아 님의 시녀면서 미아 님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미아 님이 테레지아 카르디날레 양과 대립하게 된 것도 저를 보호해 주시려다 벌어진 일입니다. 전부 제 탓이에요.”
아딜로트는 물끄러미 세레니티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됐어. 그날은 그냥 내 배에 태웠으면 됐을 일인데, 나도 괜한 심술을 부렸고.”
그의 머릿속에 미아가 떠올랐다. 자연스레 단단히 굳어 있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게다가 어차피 본인은 신경 안 쓸 테고.”
예상치 못했던 관대한 대답에 세레니티는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미아를 떠올리고는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안 쓰겠죠. 그런 점이 너무 멋져요, 미아는…….”
“……그건 그래.”
두 사람이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 황제…….’
‘이 여자…….’
나름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상대에 대한 평가를 약간 고쳐 주기로 했다.
‘변태지만 생각보다 좋은 사람일지도…….’
‘보는 눈은 있네. 변태지만.’
* * *
세레니티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크리소르의 궁에 남았다. 아딜로트까지 정무를 보러 돌아가게 되자, 미아는 혼자 남았다.
“……산책이나 할까!”
나선 정원을 터벅터벅 걸으며 미아는 생각을 이어 갔다.
현재 해야 할 일은 총 세 가지.
첫째. 크리소르를 몰락시키는 것.
둘째. 아딜로트의 악명을 해결하는 것.
셋째. 율리시즈와의 계약을 위해 그라스 후작을 해치우는 것.
“뭔가 이어져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가장 급한 건 세 번째지만, 가장 답이 안 나오는 건 두 번째였다.
원작과 달리 세레니티가 아딜로트를 위해 힘써 주지 않을 테니.
원작에서 사람들이 마음을 바꾼 이유는 그게 세레니티였기 때문이다.
오랜 선행. 진심에서 우러나온 자선 활동. 아름다운 미모.
거기다 여자주인공다운 존재감까지.
그런 사람이 ‘사실 다 오해였다’고 고백하는데, 누구라도 한 번쯤은 귀 기울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방법은 안 돼. 황제의 애완동물이니까, 그냥 같은 편이라 편들어 주는 것처럼 보이잖아.’
그렇다면 평판을 올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엠브라는 미아가 계획한 전시 행정용 봉사 활동이 제법 효과를 보고 있다고 말했지만, 역시 결정적인 게 부족했다.
‘제일 좋은 건 나쁜 놈 하나 때려잡는 건데…….’
미아가 그렇게 생각하며 정원의 귀퉁이를 돈 순간이었다.
“더러운 냄새가 나는군.”
교만한 목소리가 미아의 귓전을 울렸다. 고개를 들자, 코앞에 서 있는 그라스 후작이 보였다.
“그라스 후작…….”
미아가 멍하니 그를 마주했다. 반면 그라스 후작의 시선에는 노골적인 경멸이 떠올라 있었다.
“존대도 품위도 모르는 멍청한 계집애 같으니.”
놀랍도록 싸늘한 빈정거림이었다. 누구라도 조금은 욱할 법한 말이었으나, 도리어 미아의 얼굴은 차츰 밝아졌다.
“……그러네! 아저씨가 있었구나!”
“아, 아저씨?”
충격적인 호칭에 그라스 후작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미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렇게 좋은 먹잇……, 이 아니라, 제물……, 도 아니고, 아무튼 아저씨를 생각 못 했지!?”
“감히 이젠 귀족도 아닌……!”
“너무 신난다! 고마워요, 내 눈앞에 나타나 줘서!”
“……게 감히 후작인 나에게……!”
“응응! 갑자기 모든 게 다 해결됐어! 나는 천재가 아닐까!?”
“사람 말을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