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물론 사형까지 가진 않겠지. 실제로 나도 셀레스티얼 백작과 황태후의 제대로 된 연결점은 모르니까.’
그렇다고 해도 황태후 크리소르에게 미아는 주의할 인물이다. 수틀리면, 크리소르는 바로 미아를 죽이려 들 것이다.
“생각할수록 시즈 너랑 손잡은 게 잘한 일 같아.”
그 말에 멈칫한 율리시즈가 곧, 배시시 웃었다. 미아 역시 그를 따라 방긋 웃었다.
“네가 나랑 협력 중인 건 안 들키겠지?”
“그, 그쪽은 마법이 걸린 계약서로 저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저를 의심하진, 않을 거예요…….”
“응? 그런데 어떻게 계약서를 위반한 거야?”
“그것도, 기업 비밀이에요…….”
율리시즈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뭔진 몰라도 저쪽 세계 전문가들의 기술인가 싶은 미아가 더는 토 달지 않고 메달을 내밀었다.
“그보다 이거 받아 가, 시즈.”
“……이걸요?”
“은행에서 발급해 가. ‘율리시즈’니까 추적 안 당하게 출금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이건 왜……?”
“구휼 사업이 제대로 안 되고 있댔잖아.”
율리시즈가 멈칫했다. 그거랑 이 돈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시선이 미아에게 향했다.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이거 가져가서 사람들을 도와줘. 너무 늦게 신경 써 줘서 미안해.”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아의 말이 끝나고도 율리시즈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미아가 율리시즈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냥 받으래도!”
율리시즈가 잠깐 움찔했다. 곧 소매로 가려진 손바닥 위에 메달이 얹어졌다.
“……길드의 자금으로도, 할 수 있는데…….”
율리시즈는 한참을 침묵하다 중얼거렸다.
“응? 됐어! 복지 사업은 원래 나라가 했어야 할 일이잖아.”
율리시즈와 미아의 눈이 마주쳤다. 율리시즈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고마워요, 미아 님.”
평소와 다른 여리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미아는 멋쩍게 시선을 피했다.
“……장부 써 와야 해! 확인할 거니까. 나중에 아딜한테 제출할 거야. 원랜 내 과자값이란 말야.”
“용돈기입장도 아니고…….”
“그리고, 앞으로는 기다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그냥 말 걸어. 심심하잖아!”
“제가 부업으로 사람을 좀 죽이고 다니는 건 알고 계시죠……?”
“나 죽일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런가요…….”
이후로도 율리시즈는 꽤 한참 동안 메달을 만지작거렸다. 손바닥의 납작하고 동그란 것의 감각이 생경하다는 듯, 그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나지막이 미아를 불렀다.
“……미아 님.”
“응?”
“황태후를 죽이고, 무사히 황권이 강화되면……, 떠날 거라고 하셨죠……?”
“으음, 그래야 하지 않을까?”
미아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말했다. 입술을 연신 달싹거리며 뭔가를 망설이던 율리시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율리시즈’에 오실 생각은…… 없으세요?”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질문에 미아가 놀란 얼굴을 했다.
“너희 길드에?”
율리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높은 자리를 드릴 수도 있어요……. 미아 님의 능력이라면.”
미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오므렸다.
‘파격적인 제안이긴 한데……. 왜지?’
자신이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란 것 정도는 율리시즈도 알고 있을 텐데.
게다가 미아는 아직 미래의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지로티 공작가를 맡아 볼 생각 없냐고 했지만, 그게 내 길인지도 모르겠는걸.’
하지만 길드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건 아닌가?
“연봉 많이 줄 거야?”
그 말에 율리시즈가 키득거렸다.
“받는 게 아니라, 주는 입장이 되실 텐데요……?”
“난 받는 게 좋은데!”
“그럼 드릴게요……. 그러면 오실 거예요……?”
말하면서 율리시즈가 점점 미아에게 다가왔다. 발그레한 얼굴에 소매로 입까지 가린, 자못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윽. 귀여워…….’
소매 안에 뭐가 숨어 있을지 모르지만, 겉모습만큼은 작은 새처럼 여려 보이는 편이었다.
‘볼 한번 만져 보고 싶다.’
미아는 순간 저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을 지워 내며 헛기침했다.
“나중에 얘기할까?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잖아!”
에둘러 표현했지만 거절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율리시즈가 눈웃음치던 것을 멈췄다. 가늘게 뜬 눈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황제가 마음에 걸리세요?”
“아무래도? 일이 다 끝나도 내가 뭔가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미아 님은 왜 그렇게 황제에게 헌신적이신 거예요?”
“응?”
“아버지의 원수, 가문의 원수 아닌가요……? 게다가 황제는, 처음에 미아 님을 죽이려 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야 아딜이 잘돼야 내가 크리소르한테서 살아남으니까…….”
하지만 율리시즈가 고개를 저었다.
“저를 너무…… 우습게 보지 마세요. 그런 게 아니란 것 정도는…… 보여요, 미아 님.”
연한 갈색 눈에서는 절대 이 화제를 얼렁뚱땅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미아는 난처함을 숨기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으음! 이거 참.’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다고 여기가 소설 속 세계고, 내 존재로 주인공들의 해피 엔딩이 불확실해져서……라고 대답할 순 없지 않은가.
‘그냥 아무 말이나 하자.’
미아가 트레이드마크인 함박웃음을 지으며 경쾌하게 말했다.
“잘생기고 돈이 많아서!”
그 말에 율리시즈는 물끄러미 미아를 바라보았다.
‘뭐. 거짓말이라는 건 눈치챘겠지만.’
하지만 이 이상 선을 넘어올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율리시즈가 한숨을 쉬고는 물었다.
“잘생기고 돈만 많으면…… 되나요……?”
“응! 잘생기고 돈 많은 게 최고! 아딜은 나한테 잘해 주기까지 하니까 더 최고!”
방긋 웃으며 하는 말에 율리시즈의 입매가 삐뚤어졌다.
“……불공평해요.”
“자본주의는 원래 불공평한 거야.”
“그게 아니라…….”
율리시즈가 다시 얕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율리시즈의 뺨에는 더는 홍조가 없었다. 살짝 그늘진 옆모습은 조금 상처받은 듯했다.
“으, 으음……. 시즈……?”
미아는 어쩔 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에 율리시즈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미아 님은 정말로 그렇게, 늘 거리를 두시네요…….”
“……암살자랑 거리감을 좁히는 사람이 그렇게 흔해?”
“그런 의미 아니라는 거, 아시지 않나요……? 눈치는 누구보다 빠르시면서, 정말 이야기가 깊어지면 늘 회피하시네요…….”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더 난처해진 미아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 짓궂은 척 윙크했다.
“으음! 그건 나랑 깊은 사이가 되고 싶다는 소리?”
이러면 당연히 비수가 날아올 줄 알았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하지만 율리시즈는 담담하게 답했다.
“네.”
“…….”
이제 당황한 건 미아 쪽이었다.
“……엉?”
“…….”
율리시즈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실수했다는 듯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실수…… 예요.”
미아는 ‘그런 얼굴로 말실수라고 주장하면 누구도 믿지 않는단다.’하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더 이상 뭔가를 잘못 건드리면 폭탄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달리 부탁하실 일은요?”
다행히 율리시즈가 먼저 화제를 바꿨다. 미아는 동앗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빠르게 답했다.
“그, 일단 에트루리나 지역의 상황을 알아봐 줘! 그라스 후작이 요즘 누굴 만나는지도.”
“그라스 후작은 철두철미해요. ‘율리시즈’로서도 정보를 찾기 쉽지 않아요……. 마법 도구로 추적을 막고 있거든요…….”
“그럼 움직임 보고라도 좋아. 나도 내 나름대로 정보를 찾아볼게!”
그 말에 율리시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미아 님이요……? 오르퀘니나에서 다른 길드는 ‘율리시즈’보다 격이 떨어질 텐데…….”
“아니, 거기는 시즈에게 맡길 거야. 나는 내 영역에서 찾아봐야지!”
“……?”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율리시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미아는 아무 말 없이 하하 웃었다.
‘지금까진 귀찮아서 내버려 뒀지만, 이젠 슬슬 나서야 할 것 같아서.’
사실, 정보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때로는 정보 길드 ‘율리시즈’도 모르는 정보가 입술 위에 오르내리는 곳.
사교계.
온갖 정보와 물밑싸움이 오가는, 귀족들의 전쟁터 말이다.
* * *
데뷔를 마친 성인 귀족이 할 수 있는 가장 사교계 활동은, 다른 귀족에게 초대받는 것이다. 귀족들은 늘 살롱, 야회 등을 열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미아는 거기에 낄 생각이었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애완동물’이니만큼 미아가 살롱을 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미아 셀레스티얼’은 미아가 빙의하기 전에 데뷔를 마쳤다.
미아가 할 일은, 어디든 일단 참석해 사교계 활동을 시작했다고 알리는 것뿐이다.
소문의 주인공 미아 셀레스티얼.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반드시 있을 터였다.
“우연이네. 때마침 요청이 하나 들어왔는데.”
아딜로트가 초대장 하나를 건네주었다. 붉은 종이에는 장미 향이 났다.
붉은색. 장미 향.
그 두 가지 단서만으로도 미아는 초대장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시작부터 거물이잖아?’
로사 바이지겔.
바이지겔 백작가의 가주이자, 아딜로트의 기사다.
“바이지겔이 너를 살롱에 초대하고 싶어 하더라고.”
“바이지겔 백작님께서 저를요?”
“응. 그럴 사람이 아닌데.”
맞다. 로사 바이지겔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바이지겔 백작이 누구냐면, ‘리겐하이드 전투’로 단숨에 아딜로트의 측근이 된 기사 중의 기사다.
별명은 장미의 기사.
바이지겔 백작가의 상징이 붉은 장미여서이기도 하고, 그녀 자체도 장미 가시처럼 날카롭고 강인한 사람이다. 기사이니 당연하지만, 그녀는 아주 엄격하고 긍지 높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혹시 나 몰래 바이지겔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어?”
“만나 본 적도 없는데요!”
일방적으로 로자 쪽이 미아를 본 적은 있을 것이다. 아딜로트가 셀레스티얼 백작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왔을 때, 개선식에 그녀도 있었을 테니까.
‘로자 바이지겔의 유능함을 알아보고 기사에 발탁한 게 아딜로트지. 이 타이밍에 내게 초대장이 왔다는 건…….’
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