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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79화 (79/193)

79화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그는 너무 철두철미해서 무서울지언정, 일을 대충 처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은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미아는 이제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권태마저 느껴지는 얼굴은 묘하게도 황제를 조금 닮아 있었다.

“당신들이 저를 대하는 모든 행동이 폐하에게 반기를 것과 같아요. 제가 진짜로 황후가 되어도 이럴 건가요? 될 생각은 없지만, 당신들이 하는 걸 보면 누구라도 되고 싶지 않을 것 같네요.”

“그땐 당연히 이러지 않죠!”

“황후한텐 못 하고, 애완동물한텐 하고……. 그걸 충언이라고 할 수 있나?”

“그건……, 큭.”

말문이 막힌 앙겔라 클룸 대신 옆에 있던 에디트 보겔이 나섰다.

“미아 양은, 폐하의 마음은 신경 쓰지 않으시는 건가요?”

“폐하의 마음이요?”

“듀레인 남작가의 영애를 말벗으로 두고 있다고 들었어요.”

“네. 듀레인 양과는 막역한 사이랍니다.”

“그녀는 황태후 폐하가 들인 사람입니다. 이 의미를 모르시진 않잖아요?”

즉, 적을 내부에 품고 있어야 하는 황제의 속은 어떻겠느냔 말이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지적이었다. 이에 대한 대답도 당연히 미아는 준비해 놓았다.

“일전에, 세크레 호수 야유회에서 보트가 폭발한 사건이 있었죠.”

“……테레지아 카르디날레 양이 저지른 짓 말씀이시군요.”

미아가 생긋 웃었다.

“폐하의 배에 붙은 마법석은 왜 불발이었을까요?”

그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상황을 차분히 지켜만 보고 있던 로사 바이지겔의 눈도 처음으로 커졌다.

“설마, 듀레인 양이 미리 언질을……?”

“사고가 있기 전에 제가 배를 살피러 갔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을 거예요. 제가 왜 굳이 갔을까요?”

“하지만 미리 알았다면 굳이 폭발석을 그대로 둘 이유가……, 아.”

“아시겠지만, 이쪽으로 정보가 새어 나가고 있다는 걸 굳이 들킬 필요는 없잖아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불발될 폭발석을 설치한 건 미아다. 세레니티는 아무 연관도 없다.

하지만 미아는 이들이 오해하길 바랐다. 세레니티가 사실은 황태후 파가 아니라고.

‘미래를 생각하면 세레니티의 입지도 마련해 줘야 하니까.’

미아는 일부러 확답을 피하며 애교 있게 어깨를 으쓱했다.

“현명한 여러분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셨으리라 믿어요. 물론, 비밀로 해 주시리란 것도요.”

“저흰…… 미처 몰랐어요.”

영애들이 뒤늦게 당황으로 말을 삼켰다. 방금 말한 게 정말이라면, 미아와 세레니티 듀레인은 누구보다 위험한 곳에서 황제를 돕고 있다는 뜻이 된다.

미아는 눈에 힘을 풀고서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여러분. 폐하의 주변엔 폐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이미 너무 많아요. 여러분까지 거기에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

“물론 제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걸 알고 있어요. 반역자의 딸에, 황후 후보로 거론되고 있으니까요.”

미아가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분홍색 눈은 약간 젖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 여러분을 별로 적대하고 싶지 않아요……. 폐하를 도와주시는 분들이잖아요?”

“미아 양…….”

“그러니 저희……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될까요?”

시무룩한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꼬리가 있다면 축 처져 있었을 것이다. 혼란으로 뒤엉켜 있던 영애들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자신들은 그녀를 시험하려 했는데, 먼저 화해를 청하다니. 어색한 시선 교환 끝에 알렉사 콜이 머뭇거리며 나섰다.

“미아 양……. 저희가 실수했어요. 앞으로는 얼마든지…….”

그 순간 로사의 목소리가 대화를 갈랐다.

“그만.”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인데도 범상치 않은 압박감이었다. 로사 바이지겔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미아를 바라보았다.

“미아 양. 잠깐 둘이서 이야기나 할까요?”

* * *

미아는 로사와 함께 바이지겔 백작저의 산책로로 향했다. 붉은 장미가 가득한 아름다운 산책로였다. 산책로 입구를 지나자마자 로사가 입을 열었다.

“책사였니?”

“그럴 능력은 안 돼요.”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미아는 태연히 대답하곤 장미향을 만끽했다.

“정원이 정말 예뻐요!”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미아를 로사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았다.

“생긴 것과 달리 야무지더구나.”

“지로티 공작 각하와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분과는 이미 아는 사이인가 보지? 어쩐지 네 얘기가 나올 때 침묵하더라니.”

“제 얘기요?”

“그래. 국무회의에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로사가 걸음을 옮겼다.

“네 이야기가 몇 번 나온 적이 있지. 너를 들였을 때 한 번, 폐하께서 네 신분을 복권시키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때 한 번.”

“벌써 그런 이야기까지 나왔나요?”

언젠가 반드시 신분을 돌려주겠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나 보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난 지금도 괜찮은데.’

“우린 당연히 반대했단다.”

미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할 만하죠.”

“그래. 하지만 폐하는 완강하시더군. 아무리 그래도 바로 뜻대로 하진 못하셨지만 말이야.”

“아딜은 그래 보여도 고집이 세니까요…….”

미아가 뺨을 긁적였다. 로사가 미아를 흘끗거렸다.

“폐하를 잘 아니?”

“남들만큼은요!”

로사는 훗 하고 웃었다.

“외교관이나 할 법한 대답이구나.”

로사가 앞을 보며 말을 이었다.

“폐하는 대단한 분이시지. 그 연세에 그 정도 강함……. 뿐만 아니라 정치 감각도 탁월하시고.”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황제가 되었는데도, 정말 잘해 냈죠. 아딜은.”

“그래. 나는 그분이 나를 기사에 발탁시켜 주셨을 때부터, 평생 그분을 섬기기로 마음먹었단다.”

대답할 말이 없었던 미아는 그저 웃기만 했다.

기사 이전의 로사 바이지겔은 한낱 백작 영애였다. 그녀는 창을 아주 잘 다뤘지만, 기사가 되지는 못했다.

그녀가 여자라서는 아니었다. 그냥 바이지겔 백작의 뜻이었다. 그는 자신의 딸이 요조숙녀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로사는 당시 바이지겔 백작의 뜻에 정면에서 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기를 쓰고 혼인만은 막았지만, 백작도 만만찮았다. 당시 바이지겔 백작은 로사가 기사가 되는 것을 번번이 방해했다. 로사는 점점이 나이를 먹었고, 기사 임명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로사를 자신의 기사로 앉힌 것이 아딜로트였다. 아딜로트는 로사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데리고 출정했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누구도 아딜로트가 성공하리라, 로사 바이지겔이 제 몫을 하리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전투.

기사 로사 바이지겔의 첫 전투인 리겐하이드 산악전.

리겐하이드 산악전은 현재, 수적인 열세와 지형적 불리함을 이겨 내고 대승한 전설적인 전투로 회자된다. 아딜로트가 오르퀘니나의 군권을 틀어쥐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로사는 어마어마한 공적을 세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바이지겔 백작이 되었다.

“오르퀘니나의 황제는 그분뿐이야.”

아딜로트에 대해 말하는 로사의 눈에 정열이 엿보였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미아에게, 로사가 물었다.

“너도 나와 같은 뜻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미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로사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어설픈 각오로…….”

“그게 아니라…….”

미아가 뺨을 긁으며 시선을 피했다.

“저는 그냥 아딜이 행복하길 바라요.”

계속 생각하고 있던 거지만, 남한테 말하는 건 어쩐지 조금 부끄러웠다.

“그럴 일은 없지만 아주 만약에 아딜이 황제가 하기 싫다고 하면, 전 그걸 도울 거예요. 그러니까 바이지겔 백작님과 완전히 뜻이 같다고는 할 수 없어요.”

로사가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다 곧 낮게 웃었다.

“……그분이 너를 왜 곁에 두는지 알 것 같구나.”

때마침 장미 정원의 산책로가 끝났다. 멀리 있는 입구 쪽에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미아가 바이지겔에게 손을 내밀었다.

“늦었지만, 리겐하이드의 살아 있는 전설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악수해 주실 거죠?”

미아의 미소는 어린아이같이 천진했다. 분홍빛 눈에서 거짓이 아닌 진짜 존경심이 엿보였다.

‘이런.’

로사는 자신이 졌다는 걸 깨달았다. 티 타임에서 그런 수모를 겪게 한 자에게 이런 대범한 포용력이라니.

‘백작가의 금지옥엽이라 제법 자존심이 상했을 텐데도.’

미아는 울지도, 소리 지르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으로 크게 한 방 먹이기까지 했다.

과연 황제가 인정한 사람이랄지.

‘과거의 나도 이랬지. 폐하가 아닌 그 누구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어.’

역시, 자신의 주인은 제대로 된 사람을 고른 모양이었다. 로사가 미아의 내민 손을 잡았다.

“얼마든지.”

악수를 마친 로사는 한 발짝 물러나, 절도 있는 동작으로 허리를 굽혔다.

“다음에 뵐 땐 모자랐던 예를 갖추겠습니다, 미아 님.”

* * *

살롱을 끝내고 돌아오자 이미 늦은 오후였다. 그리고 미아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미아 님.”

“요아힘 님!”

요아힘 키르히. 재상.

‘그리고 렌의 세 번째 남자!’

미남이라기보다 미인에 가까운 남자였다. 어깨 위에서 결 좋은 연갈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가는 테의 안경 너머에선 연둣빛 눈동자가 시선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휘어졌다.

“초면은 아니지만,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재상 요아힘 키르히입니다.”

멈칫한 미아가 치마 끝을 잡고 요조숙녀처럼 인사했다.

“미아입니다! 애완동물이에요!”

다정한 시선에 미아가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을 때였다. 옆에서 손가락 하나가 미아의 뺨을 폭 찔렀다.

“요아힘 닳아.”

“……사람은 안 닳아요, 아딜.”

아딜로트가 콧방귀를 뀌고서 테이블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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