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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92화 (92/193)

92화

예니는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가 힐데가르트의 방으로 향했다.

“아, 아가씨. 예니예요. 들어갈게요…….”

“들어와!”

방에 들어선 예니는 흠칫했다. 방 안이 엉망진창이었다. 힐데가르트는 그 엉망진창인 방에서 삼백안을 부릅뜬 채 예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바로 오라고 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요제프 그놈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왜 그렇게 나를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힐데가르트가 그렇게 외치며 촛대를 내던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가재도구가 부서져 나갔다.

그렇게 꽤 한참을 씩씩거리던 그녀는 겨우 침착을 되찾고는 실내복 위에 숄을 둘렀다. 칼날 같은 푸른 눈이 예니를 향했다.

“그래서. 늦은 만큼 일은 제대로 했겠지? 누가 다쳤다던데?”

그 말에 예니가 침을 삼키곤, 느리게 모자를 벗었다.

“아가씨……. 죄송해요.”

곧 불빛 아래 예니의 얼굴이 드러났다.

“욱.”

힐데가르트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일순 예니가 울컥했지만,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힐데가르트의 말을 기다렸다.

‘나를 걱정해 주시겠지?’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토할 것 같다는 얼굴로 입을 가렸다.

“너…… 실패한 거야? 아예?”

“……네?”

“하! 실패……, 실패했다고?”

힐데가르트가 다시 탁자 위의 보석함을 내던졌다.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이 그것에 맞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갔다.

“아아아악! 어떻게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멍하니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예니에게 뒤늦은 분노가 찾아왔다.

‘먼저 괜찮냐고 해야 하지 않아?’

힐데가르트의 행동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예니. 못생긴 애들이나 외모가 상관없다고 말하는 거야. 넌 알지?’

‘당연히 알죠. 아가씨.’

분명 힐데가르트는 못생기거나 흉측한 것을 혐오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상 상처로 뒤틀린 얼굴이 되니, 외모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예니는 힐데가르트 역시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다. 자신은 힐데가르트가 아끼던 시녀니까.

‘내가…… 흉측해져서 싫다는 거야, 지금? 난 열 살 때부터 네 시녀였는데!’

예니는 침착하게 마음을 갈무리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체 왜 실패한 거니? 숨겨 놓은 마법 물품이라도 있던 거야?”

“네……. 철두철미한 여자였어요…….”

“하……!”

힐데가르트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지르다가, 탄식과 함께 신경질적으로 은발을 쓸어넘겼다.

“예니. 어쨌든 그 계집애 때문에 이렇게 된 건 맞는 거지?”

“네.”

“그래……. 차라리 잘됐어. 그러면 내가 기회를 만들어 줄 테니, 사람들 앞에서 미아 셀레스티얼이 널 그렇게 만들었다고 까발리자.”

“네……?”

“오늘 얘기 들었니? 요제프가 미아 셀레스티얼에게 청혼했다지 뭐야? 난 무도회에서 걔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몰아갈 거야.”

힐데가르트는 제 생각에 감탄한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래! 나는 그러지 말라고 하려고 너를 붙였는데, 뻔뻔스럽게도 네게 약을 뿌린 거지!”

예니는 잠시 망설였다.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던 미아의 눈이 떠올랐다.

‘힐데가르트가 널 진심으로 걱정해 줄지 한번 시험해 봐.’

이윽고 예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좋아. 그럼…….”

“그런데 아가씨! 혹시…… 신관을 불러 주시면 안 될까요?”

“신관?”

힐데가르트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신관을 부르는 것에는 큰돈이 들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선지 힐데가르트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일이 끝나면 불러 줄게. 당연히 그래야지. 예니는 내 사람인걸?”

내 사람.

예니는 그 단어에 감동했다.

‘그래. 역시 나는 아가씨의 사람이야!’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럼 바로 시중을 들게요, 아가씨!”

하지만 예니의 미소는 마법 때문에 뭉개진 얼굴이 꿈틀대는 것으로만 보였다. 힐데가르트가 다시 약하게 헛구역질했다.

“아니. 예니. 그러지 마.”

“네?”

“그러니까……. 얘는! 뭘 그런 걸 묻고 그러니? 오늘은 좀 쉬어!”

힐데가르트가 숄로 감싼 손을 예니에게 뻗었다.

“내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렴, 예니. 그냥 그 주제넘은 것이 네게 무슨 짓을 했는지 남들 앞에서 말해 주면 돼. 알겠지?”

힐데가르트의 손이 예니의 뺨 위에 닿았다. 예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비록 숄이 사이에 껴 있긴 했지만, 흉측한 것을 싫어하는 그 아가씨가 무려 자신을 쓰다듬어 준 것이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우리 아가씨는 변함없이 날 생각해 주고 계신 거야!’

예니가 격해진 마음을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그럼 저는 방으로 돌아갈게요!”

“그러렴. 나중에 사람을 보낼게.”

예니는 시큰한 눈시울을 누르며 방을 나섰다. 눈의 여왕처럼 아름다운 아가씨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도 뺨을 쓰다듬어 주다니…….

믿기지 않았다.

평소 힐데가르트는 못생기거나 상처가 있는 사람을 정말 싫어했기 때문이다.

‘역시 자기 사람에게는 다정한 분이셔.’

예니는 힘차게 걷다가, 발걸음을 늦췄다.

“역시 말씀드려야겠지……?”

미아가 어떤 제안을 했는지.

힐데가르트는 영리하니까, 그걸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한 예니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힐데가르트의 문 앞에 다다른 순간.

“아이 씨, 더럽게…….”

방 안에서 힐데가르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니는 본능적으로 숨을 죽였다.

“차라리 죽지 왜 돌아와서…….”

나직한 목소리에는 경멸과 혐오가 그득했다.

그러곤 잠이 들었는지, 힐데가르트의 방 안에서는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예니는 한참을 문 앞에 서서 멍하니 그녀의 중얼거림을 되새겼다.

‘내가 뭘 들은 거지?’

천천히 분노가 밀려들었다.

‘차라리 죽으라고? 내가 이렇게 된 건 네 명령 때문이었는데!?’

새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정작 사고를 당할 뻔한 미아는 신관까지 불러 주었다. 미리 물을 준비해 자신의 상처가 심해지는 것도 막아 주었다.

그에 비해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모셨던 아가씨는…….

‘……더럽다고? 차라리 죽지 왜 돌아왔냐고?’

예니의 어금니에서 까득 하는 잇소리가 났다.

“가만 안 둬…….”

* * *

무도회 날이 되었다.

원래는 무도회 출입 자체가 불가능한 애완동물의 신분.

그러나 앞에 ‘황제의’라는 소유격이 붙어서인지, 아니면 중립파 귀족의 우두머리인 릴레 후작가의 이름 때문인지 미아의 무도회 출입은 아무 문제 없이 성사되었다.

미아는 세레니티와 함께 로스 자작가의 볼룸으로 향했다. 오르퀘니나는 남녀가 페어를 이루어 입장해야 한다는 규칙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볼룸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미아에게 꽂혔다.

“미아.”

세레니티가 미아의 손을 쥐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평소와 달리 굳건했다.

“긴장하지 말아요.”

늘 자신이 하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한데. 미아가 픽 웃고는 세레니티의 손을 맞잡았다.

“렌도.”

세레니티가 그녀를 따라 눈매를 휘었다.

곧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우아한 연주와, 품위 있는 왈츠. 그린 듯한 무도회의 정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 안 있어 깨져 나갔다. 뒤늦게 도착한 힐데가르트 릴레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른 초대객들이 다 도착하고도 한참 뒤에야 무도회에 등장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신사들이 그녀 주위로 다가갔다.

“릴레 양. 무슨 일 있으십니까?”

“몸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괜찮아요.”

힐데가르트는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애처로운 몸짓으로 그들을 거절했다. 그리고 볼룸의 끝에서 미아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일순 그녀의 푸른 눈이 싸늘해진 걸 눈치챈 것은 오직 미아뿐인 듯했다.

“미아 님.”

힐데가르트는 그대로 천천히 미아에게 다가왔다. 점점 그녀 쪽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에 부응하듯이 힐데가르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 * *

은발의 처연한 미인. 그녀의 푸른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분명 몸서리쳐지게 아름다운 모습이리라.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미모와 연기력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전 미아 님을, 믿었고, 좋아했는데…….”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자신과 미아 사이를 비우며 물러났다.

힐데가르트는 그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며 내심 즐거움을 느꼈다.

‘관객은 충분하네.’

그 사이에서 미아는 태연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힐다 양?”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물음이었다. 별거 아닌 반응인데도 힐데가르트는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어디 언제까지 그렇게 태연할 수 있나 보자고!’

그녀는 곧, 찢어질 듯한 고음으로 외쳤다.

“제 약혼자와…… 바람을 피우셨잖아요!”

“……!”

사람들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무도회는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연주도 어느새 끊긴 뒤였다.

힐데가르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괴롭게 얼굴을 찡그렸다.

“헤롯 자작 영애에게서 전부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미아 님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어떻게 제 약혼자와……! 게다가, 미아 님께는 황제 폐하가 있으시잖아요! 어떻게 오르퀘니나에서 가장 지고하신 분을 두고 그런 짓을…….”

힐데가르트의 말이 흐느낌과 함께 잦아들었다. 곧이어 원하던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입을 놀리기 시작한 것이다.

“릴레 양이 애완동물에게 잘해 주긴 했다고 하더라고요. 따로 티 타임에도 초대도 하고.”

“어머. 그래요?”

“그런데 바람이라니.”

“게다가 폐하를 두고요?”

“그분이 알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텐데요!”

힐데가르트는 연기를 하면서도 주변의 소리를 귀담아들었다. 미리 바람잡이 몇에게 언질해 둔 덕분에, 분위기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흐르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나와 줘야지. 여긴 내 앞마당이거든.’

힐데가르트가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미아를 바라보았다.

‘요제프가 네게 청혼한 건 모두가 봤지. 황제의 총애가 네 독이 될―’

그러나 미아의 얼굴을 본 순간, 힐데가르트는 당황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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