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문제는, 그게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는 목소리고, 절대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이의 목소리였다는 점이다.
뚜벅. 뚜벅.
무게감 있는 구둣발 소리가 고요한 볼룸에 울려 퍼졌다. 모두의 목이 삐걱거리며 그곳으로 향했다.
“데리러 왔어.”
그곳에서, 아딜로트를 팔짱을 낀 채 심드렁히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
“지,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을 뵙습니다!”
자리에 있는 모두가 벼락같이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미아와 세레니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딜이 여긴 왜?’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딜로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친 데는?”
그리고 다소 조급하게 물으며 손으로 미아의 뺨을 잡았다.
“없―”
“누가 시비를 걸었다며.”
“그―”
“상처는?”
미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미아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좌우로 휙휙 돌렸다.
“없다니까요!”
미아가 빽 외치고 나서야 아딜로트는 그 짓을 멈췄다. 그는 그러고도 미아를 제자리에서 팽그르르 돌려 온몸을 살피고 나서야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친 곳 없어?”
그제야 미아는 양손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
“보시다시피, 없어요! 그 얘기 듣고 온 거예요?”
“누가 너한테 수작질하고 있다길래.”
“별일 아니었는데…….”
미아의 말에 아딜로트의 표정은 더 가라앉았다.
“누가 너를 해치려 한 게 별일이 아니야?”
“맞아요, 미아. 그건 별일이 아닌 게 아니에요.”
옆에서 세레니티가 진지한 어투로 끼어들었다.
‘이런 때만 죽 맞지 말라고!’
미아가 애써 태연한 척하며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치만 안 맞았고!”
“안 맞으면 다야? 다음에도 이런 사태가 생기면 또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살롱을 보내놨더니 왜 원수를 만들어 와?”
아딜로트치고는 드물게 말이 길었다. 그는 인상을 쓰고서 미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치만 정확히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범죄를 당할 뻔했던 쪽보다는 저지른 쪽이 더 나쁜 거 아닌가!?’
반박하려던 미아는 아딜로트의 눈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타박하는 듯한 어투와 달리 떨리는 붉은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 죄소옹합니다…….”
“게다가.”
아딜로트가 한숨과 함께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미아를 볼 때와는 다른 선득한 붉은 시선이 요제프 크네히트에게 향했다.
“네가 남의 약혼자와 눈이 맞았다질 않나.”
아딜로트의 낯에 묵직한 피로, 질린다는 듯한 권태, 말하자면 그가 누굴 죽이기 직전에나 짓는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본 미아가 잽싸게 아딜로트의 손을 붙잡았다.
“아하하! 아하하하!? 누가 그런 헛소문을!?”
“헛소문이지?”
“당연하죠! 제가 어떻게 폐하를 두고!”
“그럼 저건 뭐고?”
‘저거’가 된 요제프가 움찔했다.
“보면 모르세요? 꽃다발 받침대예요!”
미아는 단호하게 외치며 요제프의 꽃다발을 낚아채 아딜로트에게 내밀었다.
“예쁘죠! 폐하 드리려고 준비했어요!”
“…….”
그러나 아딜로트는 싸늘한 표정 그대로 미동도 없었다. 미아는 얌전히 꽃다발을 다시 내려놓았다.
“음……, 에헤, 폐하……?”
“…….”
“그게, 제가 살롱을 좀 다니느라 적을 만들기도 했지만, 그게 다 제가 너무 귀여워서 벌어진 일 아닐까요? 원래 저처럼 앙증맞은 사람에게는 시기 질투가 옵션으로 따라오는…….”
“그러네.”
“……거라서 저 같은 미인은 네?”
아무 말이나 해서 어떻게든 회피해보자는 마음으로 내뱉은 말이었으나, 의외로 아딜로트에게서 짜증 섞인 헛웃음이 들려왔다.
“……남들이 눈독 들일 줄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미아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요사스런 눈매를 찡그린 채 서늘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미아가 아니라 아딜로트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난데없는 아딜로트의 말에 미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주변인들은 숨을 들이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폭군이었다.
황태후가 암살을 위해 미인들을 줄줄이 보내도 다시 줄줄이 되돌려 보내고, 이제껏 누구와도 염문 한번 뿌려 본 적이 없는 남자.
공식 석상에서는 늘 심드렁히 냉소하는 게 전부인 황제가 이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놀람. 당혹. 설렘.
온갖 감정이 뒤엉킨 볼룸 한가운데서 아딜로트는 좌중을 향해 몸을 돌렸다.
“모두 고개 들어.”
그제야 모두가 힐끔거리던 것을 그만두고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딜로트는 어느새 무심해진 얼굴로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팔짱을 낀 채, 오만한 눈으로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크네히트 백작.”
“예? 예! 폐하!”
“내가 처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오늘의 주연은 특별히 다른 이에게 양보하지.”
“예에……?”
영문 모를 소리에 요제프 크네히트가 고개를 기울인 순간.
그에 대한 답은 뒤쪽에서 들려왔다.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입구에서부터 울렸다. 곧 은발에 벽안을 가진 중년이 농갈색 망토를 펄럭이며 들어섰다.
‘고드릭 릴레 후작!’
그의 모습을 발견한 미아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진짜 거물의 등장이었다.
‘사건이 엄청 커지는데?’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럴 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니는 평민이었다. 미아 역시, 어쨌든 현재는 귀족 신분이 아니었다. 귀족 사회에서 그리 관심 가질 일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제프와 힐데가르트 사이의 일은 달랐다. 그가 제멋대로 힐데가르트를 무시한 점은 절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요제프는 대귀족인 릴레 후작 영애를 완전히 바보 취급했고, 그건 릴레 후작가를 우습게 본 것과도 같았다.
‘파혼 요청서도 뒤늦게 보냈다고 하니, 말 다 했지.’
고드릭 릴레 후작은 볼룸에 들어서자마자 아딜로트에게 인사했다. 아딜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릴레 영애는?”
“신전으로 보냈습니다. 그곳에 제가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저는 이쪽의 처리를 우선하려 합니다.”
딸의 신변이 위급해진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냉철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의 푸른 눈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서늘했다.
“뜻대로 해.”
아딜로트의 허락이 떨어지자, 고드릭 릴레 후작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크네히트 백작.”
요제프 크네히트는 그제야 낭만에서 빠져나온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후, 후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자네의 파혼 요청서가 이제야 내게 도착했더군.”
릴레 후작의 태도는 싸늘하고 정중했다.
“수소문해보니, 자네가 절차를 무시하고 살롱에서 내 여식이 아닌 이에게 청혼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후작 각하께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제프가 미아를 돌아보았다.
‘보지 마! 보지 말라고!’
미아가 아딜로트의 등 뒤로 숨었다. 릴레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아딜로트가 몸으로 슬쩍 미아를 가리며 냉정하게 말했다.
“이쪽이 피해자인 건 알 거라 믿어. 후작.”
“……알고 있습니다.”
아딜로트의 차가운 말에 똑같이 차가운 말로 받아친 릴레 후작이 요제프를 돌아보았다.
“변명이 있다면 해 보게.”
요제프 크네히트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곤 교사 앞의 아이처럼 파르르 떨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미아 님께 첫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
후작의 파란 눈이 다시 미아에게 향했다. 딱히 악의는 없어 보이지만, 묘하게 사람을 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기색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는 다시 요제프를 주시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자네는 내 딸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네. 실망스럽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없어야지. 그럼, 이 시간 부로 크네히트 백작가에 빌려준 사업 자금을 모조리 회수하겠네.”
요제프가 입술을 짓씹었다.
“큭! 각오하고 있습니다!”
고드릭 릴레 후작은 그런 요제프를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네의 일방적인 파혼에 대한 위자료로 54억 골드를 청구하겠네.”
“……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상대로 승부라도 걸 것 같던 요제프의 입에서 떨떠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몹시 당황한 상태로 말을 더듬었다.
“후작 각하. 그건 좀 심하신…….”
“더하여 크네히트 백작가의 사업에 섰던 릴레 후작가의 보증 및 담보를 모두 취소하네. 백작가에서 납품하는 물건의 거래 역시 즉시 끊을 것이네.”
“후, 후작 각하! 그랬다간 저희 가문은 파산 신청을 해야 합니다!”
“그렇겠지. 그걸 알면서 감히 내 딸을 모욕해? 자네는 대귀족을 욕보이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몸으로 깨달아야 할 거야.”
서슬퍼런 말에 요제프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릴레 후작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미아는 아딜로트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혀를 찼다.
‘그러게 왜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어선. 주제에 릴레 후작 영애랑 약혼했으면 감사한 줄을 알아야지.’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뭐가 됐든 약혼녀를 그런 식으로 내팽개친 놈은 죽어도 싸니까.
게다가 릴레 후작이 어떤 성격인지는 사교계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는 이치와 합리를 따지며, 철저하게 받은 만큼 되갚아주는 성미였다.
“법정에서 보지.”
망연자실한 요제프를 두고 릴레 후작이 몸을 돌렸다. 그대로 떠나리라 생각한 릴레 후작은, 의외로 바로 미아에게 다가왔다. 미아가 움찔했으나,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자기 딸을 아끼는 것과는 별개로 딸이 잘못했다는 건 아는 거겠지.’
고드릭 릴레 후작은 심지어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손을 내밀었다.
“미아 님. 힐데가르트의 잘못을 아비로서 대신 사과드립니다.”
그의 행동에 아딜로트가 팔과 옆구리 사이에서 고개를 내민 미아에게 눈짓했다. 어떡하겠느냐고 묻는 눈치였다.
미아는 머뭇거리다, 빼꼼 몸을 내밀어 릴레 후작의 손을 맞잡았다.
“……사과는 받을게요!”
릴레 후작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생각 외로 인자한 모습에 미아가 감탄하려는 찰나.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이 일은 끝난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이 아저씨 보게?
그의 속셈을 깨달은 미아는 똑같이 수줍게 웃었다.
“아뇨. 상해미수로 고소할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