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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96화 (96/193)

96화

남을 해치려 하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

미아는 힐데가르트를 더 망하게 해 주고 싶었다. 다행히 세상에는 무고죄란 좋은 게 있어서 가능할 것도 같았다.

‘내가 인권은 좀 없지만 황제의 애완동물씩이나 되니까.’

하지만 고드릭 릴레 후작은 발이 빨랐다. 그는 그날이 다 가기도 전에, 직접 미아를 찾아왔다.

“제 성의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미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릴레 후작이 잠자코 남색 벨벳으로 감싼 상자 뚜껑을 열었다.

번쩍.

‘흐억.’

미아가 눈을 감았다 떴다. 상자 안에는 아이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핑크 다이아몬드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투명도, 커팅, 크기……. 빠지는 게 없네. 역시 릴레 후작가.’

감탄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그뿐.

“예쁘네요! 자랑하러 오신 건가?”

미아는 미로미스 상회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미로미스 상회는 광산 개발권을 가진 상회였다.

말인즉 이 정도 보석에는 큰 감흥이 없다는 뜻이다.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말에 릴레 후작이 멈칫했다. 그는 이내 상자를 좀 더 밀며 말했다.

“이번 일로 몹시 마음이 상하신 줄은 알지만, 이렇게 요청드립니다. 힐데가르트를 고소하는 것을 참아 주십시오.”

미아가 픽 웃었다.

“확실히 폐하께선 제 뜻에 따르겠다고 말씀해 주셨죠. 하지만 제가 보석이나 돈이 부족해 보이세요?”

“그런 의미로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의 성의 표현일 뿐입니다.”

“전 다른 식의 성의 표현이 더 좋은데요!”

“뭘 원하십니까?”

냉정하고 빠른 대답에 미아는 내심 감탄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태도가 훌륭했다. 세레니티의 아버지였던 듀레인처럼 미아를 무시하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기보다 한참 어린 여자애, 그것도 이젠 귀족이 아닌 자를 상대로 깍듯한 존재를 하면서도 싫은 기색 하나 없는 것.

세상에는 생각보다 그 쉬운 걸 못하는 작자들이 많다.

‘릴레 후작이란 이름을 그냥 얻은 건 아니라 이거지?’

미아가 빙긋 웃었다.

“제가 원하는 건 후작 각하예요.”

미아의 말에 릴레 후작이 멈칫했다. 그는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미아를 바라보았고, 미아는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딱 한 번. 아주 중요한 순간에, 폐하를 지지해 주세요.”

릴레 후작의 눈빛이 돌연 날카로워졌다.

“관련 없는 문제를 끌어오시는군요. 위자료는 어떠십니까?”

“다시 한번 여쭤보는데, 제가 돈이 부족해 보이시나요?”

미아가 해맑게 웃으며 보석함의 뚜껑에 손을 얹었다.

탁.

뚜껑이 닫히는 순간, 미아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후작 각하께서 왜 중립을 지키시는지 알아요.”

갑작스런 미아의 말에 릴레 후작이 흠칫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권력이 너무 한곳에 집중되는 게 좋다고만은 할 수 없죠.”

“……위험한 발언을 하시는군요.”

지탄하는 듯한 어조였으나, 미아는 그 문맥 너머에 있는 희미한 기대감을 읽어 냈다. 그녀가 밝게 웃었다.

“후작 각하께서는 아시지 않나요? 멍청한 우두머리가 한 나라를 통치하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

“그렇다고 대중에게 권력을 넘겨주면, 질 나쁜 선동에 휘둘려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고요. 그걸 걱정하시는 거죠?”

릴레 후작의 푸른 눈에 묘한 빛이 감돌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미아는 소설 속의 고드릭 릴레 후작을 떠올렸다.

<장미 정원의 세레니티>에서 고드릭 릴레 후작은 그렇게 비중이 큰 등장인물이 아니다. 그는 소설의 거의 마지막에 등장해, 세레니티에게 짧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세레니티 듀레인. 그대는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이 상황이 두렵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네?’

‘그렇다고 민중에게 모든 걸 맡겼다간 벌레 같은 귀족들의 혓바닥에 놀아나겠지.’

그렇다. 고드릭 릴레 후작은 놀랍게도 군주제와 공화제의 맹점을 동시에 간파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소설 속 세레니티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릴레 후작은 애초에 누가 자신을 이해해 주리라 기대하지도 않는 듯했다. 전제군주제 사회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황족도 귀족도 그리 특별할 게 없다는 걸 깨달은 릴레 후작이 돌연변이에 가까웠다.

‘그래서 권력의 분산을 위해 황태후가 날뛰는 것을 막지 않았지만…… 그녀가 벌인 일들을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내 실책이었군.’

‘각하께서는 각하께서 생각하시기에 가장 좋은 선택을 하셨을 뿐이니 괘념치 마세요. 이제 모든 게 끝났으니까요.’

‘……나는 폐하를 믿지 않았네. 그분의 능력은 매우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잔인한 성품 탓에 이상적인 군주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지.’

‘그러신가요.’

‘하지만 네가……. 아니, 황후 전하께서 폐하 곁에 계신다면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즉, 원작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면, 중립 귀족인 릴레 후작이 중립을 지키는 이유는 황권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가 생각하기에 아딜로트는 지나치게 힘을 숭상하고 무력으로 사태를 진압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아딜로트가 이상적인 군주이기만 하다면 릴레 후작 역시도 그를 지지하리라는 뜻이었다.

미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거 아세요, 후작 각하? 어느 철학자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 상태가 훌륭한 전제군주가 통치하는 상태라고 해요.”

“폐하께서 그런 분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폐하는 후작 각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뛰어난 분이세요. 실제로 우려되는 몇몇 점을 제외하면, 다른 부분에서는 완벽하잖아요?”

“우려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대파나 범죄자를 처벌하는 방식이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시고요?”

“…….”

그 말에는 포커페이스인 릴레 후작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눈이 조금 커지고 주먹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미아가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폐하의 치세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아시잖아요? 폐하가 어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건…….”

아딜로트가 어릴 적 있었던 일에 대해 알고 있는지 릴레 후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신경 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지.’

합리와 이성을 따지는 릴레 후작이 크리소르 황태후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했을 리 없으니까.

그걸 관망해야만 했던 자신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 정도는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모두가 황족은 구름 위의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저 사람이라는 걸 후작 각하만은 아시잖아요? 보통 사람은 그런 일을 겪고 멀쩡하게 지낼 수 없어요. 그런데도 폐하는 지금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계세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시진 않을 거예요.”

미아의 조용하고 차분한 말에 릴레 후작의 푸른 눈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릴레 후작에게 방긋 웃어 주었다.

“조금만 더 폐하를 믿어 주세요. 저는 후작 각하께서 그저 중립을 위한 중립을 지키시는 분은 아닐 거라고 믿어요.”

* * *

고드릭 릴레 후작은 가만히 미아를 응시했다.

말을 마친 미아 셀레스티얼은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통통하고 흰 뺨을 가진 소녀 같은 외양에 어울리지 않는 담담하고 확신에 찬 말투.

그녀가 무도회에서 보였던 모습을 알기에 더더욱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릴레 후작이 헛웃음을 흘렸다.

“……외교 교육을 받았습니까?”

그 말에 미아가 다시 눈을 마주쳐 왔다. 말갛고 천진한 외모 때문에 표정만으로는 속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마냥 순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너무 귀여운 생김새라 심중을 파악하기가 어렵다니.

그는 생각만 하던 것을 확신했다.

“애완동물 역할은 눈속임이 분명하군요.”

미아가 놀란 듯이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분명 그마저 속임수이리라.

“셀레스티얼 백작가에서부터 교육을 받아 온 모양인데……. 그럼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반역도 사실은 황권 강화를 위한……?”

릴레 후작이 중얼거리며 미아를 뒷조사한 내용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힐데가르트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조사한 것이었으나, 조사하면 할수록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만 확실해졌다.

눈앞의 쥐톨만 한 여자는 힐데가르트보다 몇 수는 더 앞서 있었다.

미리 물과 반사 마법 브로치를 준비한 걸 보면, 힐데가르트가 레기아 용액을 사용하리란 것 역시도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레기아 용액은 절대 시중에서 흔히 돌아다니는 물질이 아니었다.

말인즉, 자신의 가문에 세작을 심어 두었다는 뜻.

‘하지만 대체 어떻게?’

게다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는 것 같은 말들.

전제군주제 사회에서 나오기 어려운 대범한 통찰이었다. 생각하지 않을래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군.’

릴레 후작이 좁아진 미간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최근엔 황제의 애완동물이 값진 정보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다는 소문도 많았다.

‘만약 그게 황제에게서 주워들은 정보가 아니라, 자신이 만든 흐름이라면?’

손을 내린 릴레 후작이 미아를 응시했다. 미아는 분홍색 눈을 깜빡이며 날고 기는 귀족들도 피하곤 하는 자신의 시선을 그대로 마주했다.

맑고 투명하고, 그래서 더 깊이를 알 수 없는 분홍색 눈은 더 이상 순진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노련한 정치가처럼 속을 알 수 없기만 했다.

보고 있을수록 긴장으로 척추가 곧추서는 게 느껴졌다. 절대로 황제가 단순히 사랑에 빠져서 데려온 것만은 아닌 게 분명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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