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농담이에요! 다음에 쓸 연기력 기르고 좋지 뭐!”
“……내가 옆에 있는 게 거북하다면 나가서 기다릴 수도 있다.”
“그러면 더 의심받을걸요? 그리고 뭐 어때요! 아딜이랑도 맨날 같은 침대 쓰는데!”
……그리고 왜인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뭐지. 한기?’
미아가 페르디안을 흘끔거렸다. 어쩐지 페르디안의 얼굴도 그 말을 기점으로 더 딱딱해진 느낌이 들었다.
‘……왜? 맘에 안 드는 내가 자기 폐하랑 한 침대에서 잔다고 해서!?’
아차 싶은 미아가 눈치를 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 근데 아무 일 없었고……!”
“…….”
“제, 제가 황후 하겠다고 막 나대는 것도 아니고!”
“…….”
아무리 둘러대도 페르디안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모르겠다. 여기서 더 얼마나 쭈그러들라는 거야…….’
미아가 입을 삐죽 내밀고서 다리를 끌어안았다. 그때, 잠자코 있던 페르디안이 물었다.
“황후가 될 생각이 없나?”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답은 명확했다.
“네!”
미아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딜로트는 좋다.
하지만 황후는 싫다.
일도 해야 할 테고, 무엇보다 힐데가르트처럼 여전히 자신을 아니꼽게 보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세레니티가 애써 주긴 했지만, 사람의 인식이란 게 그렇게 쉽지 바뀔 것 같진 않았다.
‘기껏 살아남았는데,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야.’
페르디안의 잿빛 눈이 기묘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럼 크리소르를 처단한 이후엔 뭘 할 생각이지?”
“완전히 살아남으면요? 으음~ 할아버지가 지로티 공작가를 맡아볼 생각이 없냐고 하긴 했는데…….”
“지로티 공이?”
“네!”
미아가 실실 웃었다.
“그치만 아닌 거 같아요! 셀레스티얼 백작가 맡는 것도 너무 힘들었는데 또 가문을 맡으라니! 전 그냥 놀고먹고 싶어요. 안 아프고, 건강하게! 이거저거 다 해 보면서!”
그 말에 페르디안이 움찔했다. 어느새 한기는 사라지고, 그는 조금 낯선 말을 내뱉었다.
“이전엔 몸이 약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가?”
미아가 움찔했다.
“이전이요?”
“셀레스티얼 백작가가 남아 있을 때 말이다.”
“아아. 그때.”
딱히 그때를 말한 건 아니었지만.
미아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곤 웃었다.
“네! 아프면 서러우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제일이고 건강이 최고!”
“…….”
말없이 미아를 바라보는 잿빛 눈에 묘한 감정이 스몄다. 미아는 그 감정이 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안쓰러움. 안타까움. 동정.
전생에 익히 보아 왔던 눈빛이었다.
‘――야. 이번 약만 맞으면 다 나을 거야.’
머리를 스치는 기억에 미아는 배시시 웃으며 페르디안의 눈을 피했다.
“뭐가 됐든 페르 방해는 안 할게요! 귀찮게도 안 하고, 이것도 인연인데 돈 좀 빌려 달라고도 안 할 테니까 안심하세요!”
그때, 물끄러미 미아를 응시하던 페르디안이 툭 던지듯 물었다.
“원래 그렇게 사람에게 정을 두지 않나?”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페르디안이 가면 아래로 잿빛 눈을 내리까는 것이 보였다.
“너를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
“늘 그렇게 거리를 두는 듯해서 하는 말이다. 언제라도 떠날 사람처럼.”
피할 곳도 없는 직접적인 물음에 미아는 당황으로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한참 뒤,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그, 그게 왜 궁금한데……?”
멍청한 반문이었지만 의외로 페르디안은 허점을 찔린 사람처럼 침묵했다. 잠시 숨을 멈췄던 그가 눈을 살짝 찌푸리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겠다.”
페르디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겠어.”
낮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미아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페르디안 역시 그것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그는 갈증이라도 나는지 벌떡 일어나 잔에 든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방금 한 말은 잊어버려라.”
미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잊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않은데?”
“……방금 마신 거야?”
그제야 제 행동을 눈치챈 페르디안의 잿빛 눈이 커졌다.
“젠.”
그리고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 * *
질 나쁜 약을 삼킨 모양이었다. 시야가 뿌옇고 흐릿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희고 가냘픈 목덜미가 움찔거렸다.
“잠깐……! 금방……! 눕혀 줄……! 흐아……! 더럽게, 무거워……!”
미아가 이를 갈며 페르디안을 침대 위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손도 까딱할 수 없었다. 누군가 도끼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은 두통에 신음을 참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멍청한…….’
아무거나 입에 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방심했다. 바에서는 바텐더의 손놀림에 그렇게 주의를 기울여 놓고서, 둘만 남았다고 이 지경이라니.
하지만 수치와 치욕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 왔다. 약 성분을 몸에서 거부하는 모양이었다.
“후우……. 큭.”
앓는 소리가 잇새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를 악물지 않으면 뇌를 헤집는 듯한 고통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페르? 페르! 죽는 거 아니지!?”
페르디안은 자신을 겨우 침대 위에 끌어 올린 미아 셀레스티얼이 이번엔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것을 느꼈다.
당황으로 점철된 목소리였다.
“어, 어떡하지? 무, 물이라도 마셔야 하나? 나, 나 물 가져올…….”
그 말에 페르디안이 번쩍 눈을 떴다. 뇌를 헤집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를 내보내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페, 페르?”
눈을 뜨자 당황한 미아 셀레스티얼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숫제 울고 있었다. 가면은 언제 내던졌는지, 갸름한 얼굴 안의 이목구비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것 같았다.
그것을 본 페르디안의 숨이 턱 막혔다.
‘폐하를 볼 때나 짓는 표정인 줄 알았는데.’
그게 지금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마, 많이 아파? 토하는 게 낫지 않을까? 무슨 약인지 알겠어? 물 갖다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릴래?”
“…….”
걱정 가득한 두 눈에서는 그가 고개만 끄덕이면 세상의 끝에서라도 물을 구해 올 것 같은 결사의 각오가 느껴졌다.
그 눈을 보며, 페르디안은 신기하게도 두통이 점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런 눈으로.’
마치 그녀가 생각하는 두 사람의 거리는 원래 그 정도였다고 주장하는 듯한 다정한 시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나 다정하게 굴면서, 왜 언제라도 떠날 사람처럼 구는 걸까.
페르디안은 정말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그 이유를 궁금해하기 시작한 자신이 낯설었다.
“페르?”
미아는 그가 답이 없자 불안한지 입술을 깨물곤 각오를 다진 얼굴을 했다.
“역시 내가 물을 구해 올게!”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에서 손을 뗀 순간.
“큭……!”
다시 두통이 찾아왔다.
“페르!”
미아가 기겁하며 다시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또다시 신기루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그가 살 것 같다는 듯한 한숨을 흘린 것이 미아에게도 들린 모양이었다. 미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은 거야?”
“……지금은.”
“뭐지……? 사람이랑 붙어 있어야 덜 아픈 약인가……?”
미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오해였지만 페르디안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그렇게 오해하게 두는 게 나았다.
두통은 면역 체계 때문일 테니, 미아가 옆에 있다고 상태가 호전되는 건 그저 심리적인 문제일 터였다.
즉, 자신이 미아가 옆에 있길 바라고 있다는 뜻이었다.
‘말도 안 돼.’
페르디안이 눈을 감았다. 그는 애써 임무를 생각하려 노력했다.
이 상태로 임무를 계속하긴 어려웠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미아는 뒷문에 대기 중일 켄달 경에게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페르디안은 좀처럼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미아가 나가서, 켄달 경을 부르고, 여기를 빠져나가면 그녀의 저 눈은 또다시 아딜로트에게로 향할 게 분명했다.
‘……그게 싫은 건가, 난?’
페르디안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문득 머리가 들리는 느낌이 났다. 그러고는 뭔가가 머리를 받쳤다.
“어때?”
놀란 페르디안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미아와 눈이 마주쳤다.
“좀 나아?”
그는 뒤늦게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게 미아의 무릎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난생처음 남에게 무릎베개란 걸 당해 본 그는 바짝 긴장했다. 두통이 희미해질 정도였다.
입을 딱 다문 그를 보고 미아는 멋쩍게 말했다.
“기, 기분 나쁜가? 그래도 좀만 참을래? 좋은 약을 쓰진 않았을 테니 약효가 오래 가진 않을 거야! 조금만 누워 있으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상대가 아프다고 생각해서인지 미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곤조곤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도 일말의 장난기조차 없었다. 있는 거라곤 자신을 향한 걱정뿐이었다.
“차, 차라리 한숨 자고 있을래……?”
그리고 그녀는 자신도 어색했는지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토닥이기 시작했다.
“…….”
페르디안은 대답하는 대신 팔로 눈을 가려 버렸다.
잔열처럼 남은 두통 아래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페르디안이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말았다.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