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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09화 (109/193)

109화

‘그냥 나 이대로 전속…… 해 버릴까?’

레미냑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어차피 황권은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황제의 전속이 된다는 건 큰 영예가 되리라. 실력에 자신도 있었다.

황제가 폭군인 게 문제였지만, 미아 셀레스티얼이 이런 사람이라면 그녀의 총애를 받으면 황제에게서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미아가 옆에 앉은 아딜로트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근데 진짜 저 혼자 봐도 되는데! 바쁜 거 아니에요?”

“요아힘이랑 슐츠 공이 가라고 했잖아. 알아서들 하겠지. 어차피 사교 시즌이라 모든 부서가 다 노는 분위기고.”

“흐음……. 다들 왠지 안쓰럽게 아딜을 바라보더라니. 아딜이 너무 일을 많이 해서 그런가 보다!”

역시 애완동물은 힐링이지! 미아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미냑은 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으나 옆에서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비볐다.

“그러면 일단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은 저희 양장점의 야심작을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와!”

미아가 손뼉을 짝짝 치며 호응했다.

이어서 여러 개의 마네킹이 주르르 접견실 안으로 날라져 왔다. 모두 <512 프뤼게>의 야심작이었다. 미아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드레스를 가리켰다.

“가까이서 봐도 돼?”

“물론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아가 총총 마네킹으로 다가갔다.

“오! 이건 약간 샤넬……?”

그녀는 계속 뭔가를 중얼거리며 드레스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레미냑은 가벼운 몸짓과 달리 그녀의 눈빛이 아주 냉정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보통 양장사라면 쓸데없이 꼼꼼하게 본다고 투덜거릴 법했으나, 자수 하나하나, 달린 보석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었기 때문에 레미냑은 당당했다.

이윽고 드레스 하나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던 미아가 중얼거렸다.

“와. 당신 진짜 솜씨 좋네요.”

기를 세워 주려고 일부러 칭찬하는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듯한 말이었다. 그 덕에 레미냑은 미소를 참느라 입가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미아는 드레스를 내려놓으며 딱 잘라 말했다.

“그런데 좀 아니야!”

“……!”

레미냑이 충격받은 얼굴로 서서 굳었다. 뒤에서 황제가 다가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괜찮은 거 같은데.”

“너무 눈에 띄어!”

그 말에 아딜로트는 레미냑과 똑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에 흠집이 난 레미냑이 비장하게 물었다.

“그 말씀은, 눈에 안 띄는 드레스를 만들어 달라는 말씀입니까?”

“응! 눈에 안 띄게!”

반면 황제는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너 또 무슨 꿍꿍이로…….”

“꿍꿍이가 아니라!”

미아가 당당하게 외쳤다.

“안 띄어야 구석에서 몰래 아딜이랑 뽀뽀라도 한번 해 보지!”

‘그리고 간 김에 조사도 좀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빛내는 미아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딜로트가 스르르 레미냑을 돌아보았다.

“안 띄게.”

“…….”

헛기침하는 황제를 보며 레미냑은 이 커플에 대해 세간에 떠도는 마지막 소문을 떠올렸다.

‘황제와 애완동물이 그렇게 금슬이 좋다던데?’

진짜였구나.

그렇구나.

레미냑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드레스를 만들어 와야 하는지 깨달았다. 레미냑이 빠르게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최고의 드레스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엄청난 오해가 성사되었다.

* * *

시간이 흘러, 곧 호흐실트 후작가에서 주최하는 무도회 날이 되었다.

일찍이 황제가 그곳에 참여한다는 뜻을 비쳤기 때문에, 무도회는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평소 중립을 유지하던 귀족들도 이번에는 몸이 달아 너도나도 초대장에 답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는 이런 무도회에 참석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무려 미아 셀레스티얼이 공식적으로 그의 파트너로 참석한다는 말이 진작부터 떠돌고 있었다.

“글쎄 <512 프뤼게>에서 폐하와 그 여자의 옷을 지었다고 하지 뭐예요!”

“어쩐지 프뤼게가 주문을 안 받더라니!”

“진짜로 황후 후보인가 봐요. 셀레스티얼 백작가를 무너뜨린 것도 사실 그 영애 때문이라던데!”

“에이, 설마요! 그 정도는 아니겠죠. 둘은 이전에는 아예 교류도 없었다고 들었는걸요? 만난 적도 없다던데…….”

“거야 모르는 거죠, 어디서 봤을지!”

말을 꺼낸 귀부인이 부채를 펼치고 입을 가렸다.

“게다가, 아시잖아요? 원래 반역자는 일가친척을 몰살시키던 분이, 셀레스티얼 백작가의 가솔들과 친인척은 내버려 뒀잖아요!”

“언젠가 신분을 복권시킬 게 뻔해요.”

“잘 보여 둬야 할 것 같은데…….”

누군가의 말에 다른 누군가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보통의 방식으로는 안 되는 모양이에요. 일찍이 온갖 귀한 걸 바리바리 싸 들고 그녀를 만나러 간 사람들은 도리어 화를 입었다지 뭐예요?”

“아아! 부정청탁은 안 받는 분이신가 보군요.”

“사실 테레지아 카르디날레 양과 있었다는 일만 봐도…….”

사람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카르디날레 공작가의 위세 때문에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카르디날레의 멧돼지가 미아에게 그야말로 잘근잘근 밟혔다는 소식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뿐이겠어요? 힐데가르트 릴레 양도 있었죠.”

“그러네요. 뒤에서 수작을 부리다가 그런 꼴이 되었다던데.”

떠들던 이들의 머릿속에 테레지아 카르디날레와 힐데가르트 릴레의 모습이 떠올랐다. 둘 다 어마어마한 세도가의 영애였다.

그런데 미아 셀레스티얼은 그 둘을 날려 버리고도 태연히 황제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함부로 대하면 안 될 분 같죠?”

“네에. 저희로서는…….”

그때. 볼룸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황제 폐하 드십니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약간 당황한 듯한 도어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예? 아……. 미, 미아 님도 드십니다!”

* * *

데뷔탕트 볼이 아니고서야 무도회는 원래 방문객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지 않는다.

이름이 호명되는 건 그야말로 모두가 이 사람의 입장을 알아야 한다 싶을 정도의 대귀족뿐이었다. 황제야 이름이 불리는 게 당연했지만, 황제의 애완동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름이 불렸다. 그건 그녀가 단순한 ‘애완동물’이 아니라는 선포와도 같았다.

긴장과 기대의 눈초리 속에서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볼룸에 들어섰다.

차가운 빛을 띤 은발에 붉은 눈.

균형 잡힌 이목구비와 무심한 표정.

평소의 정복이 아닌 검은색 무도회용 예복을 입은 그는 평소보다 화려했다. 그를 따라 흐르는 주변의 분위기 역시 잔뜩 무르익어 농염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얼굴 근육이 부지불식간에 풀렸다.

“우리 폐하는 정말…….”

“네. 얼굴만은 정말…….”

“아니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말…….”

모두가 홈홈하게 웃으며 아딜로트를 관찰했다.

건드리면 안 되는 사자라는 건 알지만, 정면으로 개기지만 않으면 되니까. 생리적 거부감과는 별개로 황제는 외양만큼은 기가 막혔다.

바로 그때, 그 완벽한 남자가 옆에 있던 여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피곤하면 바로 얘기해.”

“엄청 재밌을 것 같은데요!”

다정한 모습에 사람들의 눈이 번득였다. 소문의 애완동물의 등장이었다.

“인상이 많이 달라졌네요?”

언젠가 미아 셀레스티얼 본 적이 있던 누군가 중얼거렸다.

등을 완벽하게 드러낸 검은색의 홀터넥 드레스를 입은 미아는 평소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소매가 없으니 길쭉길쭉한 팔이 더욱 부각되었고,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가는 목과 쭉 뻗어 우아한 뼈대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앳된 얼굴, 눈꼬리가 처진 큰 눈에서는 여전히 어린 소녀 같은 발랄함이 느껴졌다.

“누가 시비 걸면 얘기하고. 일부러 검 가져왔으니까.”

멀리서 보아도 황제가 그녀를 무슨 유리 세공품처럼 대하는 게 느껴졌다.

미아를 바라보는 표정 역시도 담백했지만 시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괜히 낯뜨거워질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참 나, 내가 누구 목을 칠 줄 알고.”

정작 미아 셀레스티얼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했지만 말이다.

그사이,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지고하신 오르퀘니나의 달을 뵙습니다.”

곱슬거리는 회색 머리카락에 장난스럽게 치켜 올라간 보라색 눈.

리누스 호흐실트 후작이었다.

그를 본 미아의 눈이 일순 반짝였다. 그를 눈치채지 못한 아딜로트가 호흐실트 후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해 주어서 고맙군.”

“이런, 폐하. 오히려 제가 왕림해 주셔서 감사하단 말씀을 드려야지요.”

“글쎄. 나 같으면 볼룸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하고 싶진 않을 것 같거든.”

호흐실트 후작이 히죽 웃었다.

“오늘따라 유머 감각이 뛰어나시군요! 이 땅 위에서 빵 먹고 술 빚고 책 읽는 모든 행위가 폐하의 은덕 덕인데, 누가 그런 불민한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

그렇게 말한 아딜로트가 뒤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런 김에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받아 주면 좋겠어.”

곧 시종 한 명이 병 두 개를 들고 와 호흐실트 후작에게 보였다.

그것을 본 호흐실트 후작이 눈을 크게 떴다.

“만델린의 모르제 코르보트 413?”

“마음에 드나?”

“들다마다요, 폐하! 이 귀한 걸…….”

만델린의 모르제 코르보트 413.

하늘이 내린 빈티지라고 불리는 술이었다. 당연히 와인 애호가라면 원할 수밖에 없었고,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건…… 글렌켈란이군요!”

앞에 보였던 선물에 비하면 값어치는 적을 텐데도 호흐실트 후작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즐겨 마시는 술이거든요.”

아딜로트는 무심하지만 무례하진 않은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추천받길 잘했네.”

“추천이요?”

“미아가 골랐거든.”

아딜로트가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던 미아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안녕하세요! 미아예요!”

미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호흐실트 후작의 보랏빛 눈에 이채가 서렸다.

주변에서는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

대귀족인 호흐실트 후작은 과연, 한낱 애완동물인 미아에게 예를 차릴 것인가?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호흐실트 후작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호흐실트 후작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미아 님.”

미아가 씩 웃었다.

“환대에 감사드려요!”

“저야말로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께서 오신다는 소문 덕에 모두가 무도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거든요.”

“그댄 정말 그런 걸 좋아하는군.”

“사람은 돈 아닙니까, 폐하. 물론, 미아 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테지만요.”

장난스럽게 답한 호흐실트 후작이 미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관객들을 흘낏한 뒤, 목을 가다듬곤 크게 말했다.

“미로미스 상회를 운영하셨던 분이니 말입니다.”

그 순간 장내에 정적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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