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X됐다.
난 X된 것이 틀림없다.
미아의 머릿속에선 온통 그 문장만이 떠다녔다. 무슨 정신으로 황궁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대체…… 왜!? 어디서 들킨 건데!?’
일전에 아딜로트가 미아에게 ‘에트루리나’에 대해 듣자마자 조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미아는 완전히 패닉 상태였다.
미아의 속도 모르고 아딜로트는 황궁 레벤토르로 돌아오자마자 당장 에트루리나에 다녀오겠다고 선언했다.
요아힘은 칼을 꺼내서 자기를 죽이고 가라고 말했고, 그 덕에 출발이 하루 늦춰지긴 했지만.
‘이, 이러다가 내가 시즈랑 이런저런 계약을 했다는 것까지 알면 곤란해지는데!?’
방으로 돌아온 미아가 외쳤다.
“시즈! 나와 봐, 시즈!”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율리시즈가 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미아는 득달같이 율리시즈에게 달려가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시, 시즈! 어떡해? 아딜이 눈치챘나 봐!”
“네에……. 그런 것 같네요…….”
율리시즈가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피했다.
황제가 화낼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러라고 일부러 미아의 리본을 새로 묶어 놓은 거니까.
미아가 늘 황제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이 조금 야속해서 부린 작은 심술이었다.
‘예상대로 눈치채긴 했지만…….’
지금까지 자기 옆자리에 미아가 있는 걸 당연시하다가 뒤통수를 맞은 표정에 쾌감까지 들었다.
‘……그렇다곤 해도 몸소 거기까지 가겠다고 할 줄이야.’
황제의 개들이 에트루리나의 냄새를 맡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관여하려 들 줄은 미처 몰랐다.
‘미아 님, 때문이겠지.’
율리시즈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율리시즈의 그런 생각을 전혀 모르는 미아는 그저 초조한 모습으로 눈을 깜빡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내가 뭐 실수한 걸까? 어떻게 알았지? 왜 갑자기 에트루리나에 가려는 걸까!? 안 들키기로 했는데, 나 때문에 들킨 거겠지?”
요리조리 눈치를 보던 미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율리시즈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거예요.
율리시즈가 천천히 손을 뻗어 미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애초에 제가 미아 님을 협박해서 강제로 계약하게 된 건, 기억하고 계시죠……?”
미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알지만 지금은 친구 아냐?”
“…….”
율리시즈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미아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시즈는 나쁜 사람 아니잖아. 에트루리나 일을 해결해 달라는 것도, 그라스 후작이 구빈 사업 지원금을 횡령하고 있어서고.”
“그랬죠…….”
“결과적으로 아딜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시작이 어떻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다만, 나 때문에 들킨 거 같아서……. ‘율리시즈’가 사업을 이관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여전히 자신 때문에 황제에게 덜미를 잡혔다고 생각하는 미아는 다시 풀이 죽었다.
지금처럼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귀엽긴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말이 율리시즈의 마음을 날카롭게 베고 지나갔다.
“……결국은 또, 황제…….”
“응?”
미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내가 아딜에게 도움이 되려고 하는 게 싫어?”
율리시즈의 갈색 눈이 커졌다. 미아는 아무 의미 없이 물은 것이겠지만, 현재 그의 상태를 설명해 주는 가장 정확한 말이기도 했다.
율리시즈는 당황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살피러 가야겠어요.”
“응? 잠깐만!”
그의 돌발 행동에 미아가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 좀 더 해야지! 아딜이 싫은 거야? 하지만 아딜은 정책도 잘 수립하고 있고, 네가 걱정하는 빈민들에 대한 지원도…….”
“그런 게!”
율리시즈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그런 게 아니에요.”
“…….”
미아는 놀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겠죠. 저도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율리시즈가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미아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면 화났어? 내가 뭐 잘못했어? ‘율리시즈’가 에트루리나 사업을 이관받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 그, 그건 내가 어떻게든…….”
“아니에요, 미아 님…….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황제가 알아도 괜찮아요……. 그건 미아 님 때문이 아니니까.”
“뭐?”
율리시즈는 그렇게만 말한 뒤 재빨리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속이 답답했다. 미아 옆에 당당하게 설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점점 그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율리시즈가 가고 난 뒤, 미아는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겼다.
‘시즈가 왜 저러지?’
확실히 근래 들어 율리시즈의 태도가 이상했다. 주로 자신이 아딜로트 이야기를 꺼낼 때 특히.
‘아딜이 싫은가? 왜?’
아딜로트 정도면 정말 좋은 황제인데 말이다.
이성적인 율리시즈의 성격상 뭔가 더 심오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하지만, 문제는 미아가 그걸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미아는 낭패감에 한숨을 쉬었다.
“시즈랑 틀어지면 곤란한데…….”
그도 그럴 게, 율리시즈는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계약 못 지켰네? 사형.
이런 식으로 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이제야 겨우 일이 제대로 풀려 가는데, 율리시즈와 어긋나면 앞으로가 힘들어진다.
‘빨리 그라스 후작을 쳐내야겠어.’
미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일 당장 에트루리나로 향해야 하니, 급한 일을 오늘 다 처리해야 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황립 의료원으로 향했다.
“미아 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황립 의료원에 다다르자 바쁘게 일하던 의원들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얼핏 보면 이전과 비슷한 태도였지만, 미아는 그들의 눈에 색다른 감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존경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미로미스 상회를 내가 운영하고 있었단 소문이 퍼졌구나.’
속도를 보니 아딜로트나 요아힘 쪽에서 손을 쓴 게 틀림없었다.
그때, 누군가 데친 시금치처럼 흐느적대는 팔을 미아의 어깨에 올렸다.
“미아 님! 오랜만이에요……!”
미아가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했더니, 일전에 테레지아 카르디날레 때문에 눈을 다쳤던 의원이었다.
“안녕하세요! 분명 이름이…….”
“아! 렌나라고 불러 주세요, 헤헤.”
아, 맞아. 렌나.
렌나가 생긋 웃었다. 귀여운 미소였지만 왜인지 힘이 없었다.
미아가 그녀의 몰골을 살폈다. 대충 묶은 회잿빛 머리카락. 턱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저……, 일이 많이 힘들어요?”
미아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을 정도로 렌나는 죽어 가는 생선 같은 눈으로 배시시 웃었다.
“헤헤……. 수석 의원이니까요……. 이 정도쯤은 해야죠…….”
“그치만 예전엔 이 정도로 바빠 보이진 않았는데…….”
미아가 어쩐지 분주해 보이는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린 렌나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후 폐하께서…… 차도가 없으니 신약을 발명하라고 하셔서……. 그것도 일주일 안에…….”
“…….”
그건 진짜 심했네.
민중봉기로 칼 맞아도 이상할 게 없는 만행이건만, 렌나는 괜찮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그보다 세레니티 님을 찾아오신 거예요? 아니면 지로티 공작 각하를?”
그 말에 미아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할아버지가 여기 계세요?”
“네! 30분 전에 실려 오셨어요. 한동안 안 그러시더니 또 그러시네요…….”
“엑. 자주 있는 일이에요?”
렌나의 여상스런 대답에 당황한 미아가 반문했다. 그 말에 도리어 렌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모르세요? 가끔 이렇게 실려 오세요.”
“무, 무슨 병인데요?”
당황한 미아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쩌면 원작에서 지로티 공작이 안 나온 이유가 지병 때문에?’
하지만 렌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술병이요.”
“……네?”
“술병이요. 황궁 정원에서 술을 마시다가 뻗, 아니 그대로 누워 잠드시면 가끔 누가 신고를 하거든요. 그러면 기사님들이 여기로 데려오시곤 해요.”
“…….”
내 걱정 돌려줘.
미아가 한심하다는 눈을 하자 렌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병실 침대에 계세요. 주무시고 계실 텐데, 그래도 들러 보시겠어요?”
“네.”
미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을 낭비시킨 죄로 지로티 공작의 등짝이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렌나가 병실로 향하는 커튼을 막 걷으려 했을 때였다.
“지로티 공작 각하. 미아 님께서 방문 요청을…….”
“쿨럭, 컥!”
안에서 갑자기 사레들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공작 각하!?”
렌나와 미아가 급하게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눈앞에 보인 것은 휴대용 술병을 든 채 쿨럭거리는 지로티 공작의 모습이었다.
“공작 각하! 그건 또 어디서 나신 거예요! 술은 안 된다니까요!”
렌나가 득달같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내 술!”
지로티 공작의 저항에도 렌나는 그에게서 술병을 빼앗아 버렸다.
“의원으로서 이건 압수입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미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미아 님. 저는 나가 있을 테니, 공작 각하께서 또 술을 드시려고 하면 꼭 말려 주셔야 해요!”
“내가 이 나이에 술도 못 마시고!”
옆에서 지로티 공작이 외쳤지만 렌나는 무시했다.
그녀가 나간 뒤, 미아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지로티 공작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흠, 흠!”
술을 마시다 실려왔다는 게 멋쩍긴 한지 지로티 공작은 연신 미아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미아는 그런 그를 향해 팔짱을 끼고서 산뜻하게 웃어 주었다.
“저도 등짝 때려도 돼요?”
“예끼! 어디 할애비 등짝을!”
“제 등은 막 철썩철썩 때리시면서!”
“자넨 아직 어리지 않나!”
“그 어린애는 적어도 술 마시다가 정원에 퍼질러 누워서 자진 않거든요!”
“그, 그건……. 흠, 흠.”
지로티 공작이 헛기침했다.
‘그래도 잘못인 건 아나 보네.’
크게 한숨 쉰 미아는 그런 그에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드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