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미아의 물음에 지로티 공작이 그녀를 흘끗거렸다. 그러고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술을 그럼 맛있어서 먹지, 그냥 먹나?”
“맛있는 거 오래 드시려면 적정량을 지켜야죠!”
“자네 의원인가?”
“아뇨! 손녀인데요!”
미아의 당당한 외침에 지로티 공작이 움찔했다. 그의 검은 눈빛이 묘한 빛을 띠더니, 그가 이내 픽 웃었다.
“자넨 정말 어디 가서 밥 못 얻어먹고 살진 않겠구만.”
미아는 그제야 자신이 의료원을 찾아온 원래 목적을 떠올렸다.
‘원랜 엠브라를 찾아온 거지만, 할아버지도 의원이니깐?’
그녀가 잽싸게 침대 한 귀퉁이에 앉아 눈을 빛냈다.
“그런 김에 손녀가 할아버지한테 부탁드릴 거 있는데!”
지로티 공작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또? 이젠 자네가 뭘 부탁한다고 하면 무섭기부터 하네!”
“아니, 사람을 무슨 동네 사고뭉치 취급을…….”
반박하려던 미아가 멈칫했다.
폭발석을 받아간 뒤엔 세크레 호수 야유회에서 황제 시해 미수 사건이.
반사 마법 브로치를 받아간 뒤엔 레기아 용액 사건이.
……사고뭉치 맞나?
“……그치만 미아는 조실부모한 외톨이라 달리 부탁할 곳이 없는걸요?”
미아가 잽싸게 태도를 바꾸고 훌쩍였다.
지로티 공작은 가당찮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내가 그거 나한테는 안 통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칫.”
미아가 우는 척을 그만두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치만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걸요? 할아버지 전공 분야인데!?”
“쯧……. 알겠네. 이번엔 뭔가? 굳이 나한테 부탁할 정도면 또 군사적인…….”
“그건 아니고요!”
미아가 냉큼 대답하곤 주변을 살폈다. 의료원 사무실과 붙어 있긴 하지만, 다행히도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소음도 이 정도면 적당했다.
“손바닥 줘 보세요! 남들한테 보이면 안 되는 거라!”
미아의 속삭임에 지로티 공작이 손바닥을 펼쳤다. 미아는 주머니에서 손수건 뭉치를 꺼내 그 위에 올려놓았다.
“흠, 흠. 이게 뭔가?”
지로티 공작이 굵은 손가락으로 손수건을 펼쳤다. 그러자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투명한 알약이 모습을 드러났다.
그것을 보자마자 지로티 공작은 흠칫했다.
“이거…….”
“음. 극독이라던데요!”
미아가 준 것은 일전에 크리소르가 ‘선물’이라며 미아에게 내어준 약이었다.
‘좀 늦긴 했지만, 미리 해독약을 구해 놓으면 어딘가에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깐.’
받은 건 두 개지만 지로티 공작에게는 일부러 한 개만 건네주었다. 그걸로도 분석은 충분할 테니.
“혹시 이걸 분석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보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났나?”
미아가 다시 한번 주변을 살피곤 작게 속닥거렸다.
“황태후가 줬어요!”
그 순간, 지로티 공작의 얼굴이 형언할 수 없이 딱딱해졌다.
“……이걸 자네에게 주었다고? 언제?”
“꽤 전에요!”
“…….”
“할아버지?”
미아는 떨리는 지로티 공작의 눈을 보고 약간 당황했다.
‘왜 그러는 거지?’
그때, 지로티 공작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 그럼 진작부터 황태후에게 의심받고 있던 겐가?”
미아가 눈을 깜빡였다.
‘의심이라.’
지금까지는 율리시즈가 그 의심을 막아 주었다.
그는 황태후에게 ‘미아 셀레스티얼의 움직임이 수상하지 않더라’고 보고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번 무도회로 내가 아딜 편이라는 게 확실해졌겠지.’
미아는 미로미스 상회의 주인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정치적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단순히 황제를 암살하고 싶은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시즈가 걱정이긴 한데, 괜찮다고 했으니깐.’
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그치만 괜찮아요! 연막도 제대로 치고 있고…….”
“괜찮긴 뭐가!”
그 순간, 지로티 공작이 크게 외쳤다. 바깥에 있던 의원들이 놀라서 물건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당황한 미아가 지로티 공작을 불렀다. 하지만 지로티 공작은 어느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아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슬픔?’
그 얼굴에 가득한 게 분노가 아니라 슬픔인 것을 눈치챈 미아는 한 번 더 당황했다.
“지금 자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몰라서 이러는 게야?”
“모, 모르는 건 아닌데…….”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하질 않아!”
“그, 어, 그게…….”
말했어야 했나?
그때, 병실과 사무실을 가르는 커튼이 걷혔다.
“어휴! 우리 공작 각하께서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요?”
“미아. 큰 소리가 나길래 걱정되어서 들어와 봤어요.”
엠브라와 세레니티였다.
“엠브라. 렌…….”
미아는 여전히 당황한 상태였다. 오랜만에 보는 엠브라의 얼굴에도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엠브라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하단 듯이 웃었다.
“흐음. 같이 무지개 쿠키나 먹자고 할 분위기는 아니네요?”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의 갈색 눈이 지로티 공작에게 머물렀다.
“…….”
지로티 공작의 얼굴은 참담한 상태였다. 평소의 호방하던 그가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의 기력을 송두리째 앗아간 듯했다.
엠브라는 그런 지로티 공작의 안색을 보곤 뭔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자리를 옮길까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요.”
* * *
엠브라는 황립 의료원의 유리 정원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정원이라기보다 약초밭에 가까웠기에 주변은 허브 냄새로 가득했다.
그리고 아마 의원들이 쉬는 공간인지, 정원 가장 안쪽에 작은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할 테니 편하게 대화하세요. 저는 밖에 있을게요.”
“엠브라는 같이 안 있어요?”
당황한 미아의 물음에 엠브라는 또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기분 좋은 채로 있고 싶거든요.”
엠브라는 그렇게 말한 뒤 유리 정원을 나섰다.
남은 건 미아, 지로티 공작, 그리고 나갈 타이밍을 놓친 세레니티뿐이었다. 세레니티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미아. 저는 나가 있을 테니…….”
“자네는 듀레인의 딸이던가?”
몸을 돌리려는 세레니티를 지로티 공작이 불러세웠다. 그는 우묵한 눈으로 세레니티를 살핀 뒤, 미아를 바라보았다.
“믿을 만한가?”
그 말에 미아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세레니티의 손을 잡았다.
“네. 아딜만큼이나요.”
“……미아.”
옆에서 세레니티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미아는 지로티 공작의 시선만 마주했다.
“……그런가. ‘폐하’만큼인가. 자네의 기준은 늘 폐하에게 있구만.”
지로티 공작이 작게 킬킬 웃었다.
“그럼 그냥 듀레인 자네도 듣게. 어차피 귀족가 영애라면 다들 대충은 아는 얘기일 테니. 요 말썽꾸러기는 모르는 눈치지만 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허리를 더듬어, 혁대 안쪽에서 작은 휴대용 술병을 꺼냈다.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던 미아는 그걸 말리지 못했다. 마개를 뽑아 마시는 옆모습에서 까닭 모를 외로움이 느껴졌던 탓이다.
세레니티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니, 이미 알고 있었는지 그저 씁쓸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크하…….”
미아와 세레니티가 침묵하는 사이, 벌써 술을 반이나 들이켠 지로티 공작이 고개를 젖혔다.
그러고는 한참을 햇살이 들이치는 유리 천장을 바라보다가, 두껍고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할아버지?”
당황한 미아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지로티 공작이 휙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자네는 내가 왜 자네에게 지로티 공작가를 맡아 볼 생각이 없느냐 물었는지 아나?”
뜬금없는 질문에 옆에 있던 세레니티가 작게 신음을 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던 미아는 침묵했다.
‘……확실히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그도 그럴 게, 현재 지로티 공작은 손주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현역 공작이었다. 보통의 가주들이 나이가 들면 자녀에게 작위를 넘기고 원로공의 직위로 올라가는 것과 다르게 말이다.
게다가 자신에게 후계자 자리를 제안했다는 건, 지로티 공작가에 현재 후계자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녀가 없지 않고서야…….’
거기까지 생각한 미아가 멈칫했다.
“…….”
미아의 표정을 본 지로티 공작이 피식 웃더니 다시 술을 들이켰다.
“짐작이 맞네.”
허망한 목소리였다.
“내 아들 부처를 황태후가 죽였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미아의 숨이 멈췄다. 지로티 공작의 말이 이어졌다.
“독이었네. 위협하고 싶었을 걸세. 지로티 공작가는 폐하가 황자였던 시절부터 그분을 지지하기 시작했으니 말일세.”
“…….”
“내장이 전부 녹아내리는 맹독이었네. 아들도, 아들 며느리도 한꺼번에 당했지. 척박한 북부에서는 독에 대해 아는 의원을 찾는 것부터 어려웠다네. 해독약을 제때 구하는 건 꿈도 못 꿨고 말일세.”
“……할아버지.”
“할아버지라…….”
지로티 공작이 공허하게 중얼거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 일 없었다면 그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었겠지. 그때 내 아들 며느리의 배 속에는 손주가 있었으니.”
그렇게 말하는 지로티 공작의 등이 점점 굽어들었다. 그는 테이블 위의 술병을 꽉 쥔 채, 무릎에 코끝이 닿도록 몸을 수그렸다.
무릎 사이에서 화살에 맞은 짐승 같은 울림이 흘러나왔다.
“나는 내 자식이 살고 싶다고 말하며 죽어 가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