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하지만 크리소르는 흐느끼듯 웃느라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에게 이용당하고 죽어 가던 셀레스티얼 백작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아무 망설임 없이 그를 죽이던 율리시즈의 모습도 같이 말이다.
“셀레스티얼 백작이 진작 죽었다는 것을 눈치챈 이들은 없겠지?”
크리소르가 그렇게 말하며 율리시즈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어느새 율리시즈의 동요는 사라져 있었다.
“……물론이죠.”
“역시 ‘율리시즈’답군. 뒤처리가 마음에 들어. 딸년 하나 회유하지 못해서 죽은 무능한 작자랑 다르게 말이야.”
“…….”
“하지만 그렇다면 답은 하나군.”
뿌득.
크리소르가 이를 갈았다.
미아 셀레스티얼. 그 계집애가 뭔가 수를 써서 율리시즈의 눈을 속인 게 분명했다.
자신이 암살자를 붙여 놓았다는 것 역시도 진작 눈치채 놓고 속였으리라. 그렇다는 건, 황제 편에 붙은 게 생각보다 훨씬 전일지도 몰랐다.
“두말하지 않겠다. ‘율리시즈’에 의뢰하지. 미아 셀레스티얼 죽여.”
그 말에 율리시즈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의뢰는, 받아들이죠……. 하지만 그녀 곁에는 황제가 있어요……. 어려울 거예요…….”
크리소르도 그 점은 예상했는지 혀를 찼다.
“따로 수를 써야겠군. 본인뿐만 아니라 그 주변도 전부.”
“…….”
“다른 암살자를 미아 셀레스티얼에게 보내도록. 그리고 너는 내 명령을 수행해야 하니 근처에서 대기해.”
“……그러지요, 지고하신 황태후 폐하…….”
율리시즈는 곧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하.”
크리소르는 그제야 지친 듯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벼락같이 분노를 내뿜던 몸이 힘겹게 들썩였다.
어느새 담요를 가져온 루넬이 그런 크리소르의 어깨 위에 담요를 덮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크리소르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크리소르는 지친 몸으로도 끓어오르듯 형형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녹색 눈이 마치 증오의 항아리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루넬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혹시 듀레인 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듀레인?”
크리소르가 멈칫하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세레니티 듀레인…….’
원래 첩자를 겸해 미아 셀레스티얼의 말벗으로 붙인 이였다.
미아 셀레스티얼과 과하게 친한 듯 보이긴 했지만, 자신이 묻는 말에는 제대로 대답하곤 했다. 미아가 뭘 했고,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등등.
별 소득은 없는 정보였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을 보는 세레니티의 사슴 같은 눈망울은 늘 맑았고, 슬퍼 보였다.
크리소르가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그것은 내버려 둬라.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방해할 부류의 인간이 아니야.”
“…….”
그 말에 루넬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알겠습니다.”
* * *
마차는 넓었다. 어마어마하게. 황제의 마차니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지금 그 마차가 엄청난 양의 서류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었다.
“폐하. 트레베레움에서 사절의 방문을…….”
“그 건은 좀 더 놔둬.”
미아는 미친 듯이 서류를 보는 아딜로트와 요아힘을 조금 질린 듯이 쳐다보았다.
아딜로트의 에트루리나행을 결사반대했던 요아힘은 한동안 그들의 여행에 함께하기로 했다. 오로지 급한 서류를 어떻게든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까지 바쁜 거라면 굳이 에트루리나까지 갈 필요 없을 텐데.
“하아…….”
미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아딜로트가 기민하게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지만, 미아는 우울한 눈으로 창밖을 보느라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시즈가 잠입하기 어려울……, 아. 시즈는 없지.’
창밖의 기사들은 황제의 행차라고 하기엔 수가 적었다.
에트루리나로 떠나기 전, 율리시즈는 황태후와 관련하여 중요한 일이 있다며 황궁에 남았다.
‘대, 대신 길드의 다른 아이들을 호위로 몇 붙여드릴게요…….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율리시즈‘의 지부를 찾아가세요…….’
율리시즈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미아는 여전히 의문스러웠다.
‘계약 때문이라며 내내 곁에 있었으면서, 왜 이 타이밍에 굳이 나랑 떨어진 거지?’
최근 율리시즈의 행동은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혹시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에트루리나 문제를 해결해야겠어.’
미아가 아딜로트를 흘끔거렸다.
‘이미 어느 정도는 눈치챈 것 같으니까 자수하고 같이 그라스 후작을 치는 거야!’
결심을 마친 미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딜?”
서류를 보던 아딜로트가 시선을 올렸다. 요아힘 역시도.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붉은 눈에 미아는 잠시 움찔했으나, 곧 용감하게 말했다.
“에, 에트루리나는 왜 가는 거야?”
그녀의 질문에 요아힘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아딜로트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도 정확한 내막은 모르는 듯했다.
반면 아딜로트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네가 가고 싶어 했잖아.”
“그, 그래? 그것 때문에?”
미아가 반색했다.
‘그럼 시즈가 관련됐다는 건 모르는 걸까?’
그러나 다음 순간 아딜로트는 쌀쌀맞게 말했다.
“그래. 남에게 말하기 곤란한 직업을 가진 네 친구랑 전부터 조사 중인 것 같던데, 이참에 가 보면 좋지 않겠어?”
“…….”
미아가 신음했다. 뭔가를 숨길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린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언제부터 알았어……?”
“네가 에트루리나에 가 보고 싶다고 말한 순간부터.”
와. 나 정말 초장부터 간파당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뭔가 조사 중이라는 티는 안 낸 것 같은데……. 그냥 여행 차 가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 안 했어?”
그 말에 지금껏 묘하게 침착하던 아딜로트가 처음으로 냉소를 흘렸다.
“넌 목적 없는 짓은 안 하잖아.”
“내가?”
“갑자기 무도회에 가고 싶다고 한 것도 수상했고.”
미아가 눈을 삼박였다.
‘그거까지 알고 있었다고?’
새삼 그가 생각보다 많은 걸 내다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재밌을 것 같아서 갔을 수도 있잖아.”
“누차 말하지만 넌 목적 없는 짓은 안 해.”
아딜로트가 미아의 말을 끊고서 묘하게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
“날 좋아한다고 말은 하지만, 용건이 없으면 집무실에도 안 오지. 네가 움직일 때는 항상 뭔가 목적이 있어서야.”
“…….”
그, 그랬나. 그렇게 비정하게 보였단 말야,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에 미아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아딜로트는 희미한 쓴웃음을 지었다.
“신경 쓰지 마.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기는 했으나 마차 안의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가라앉았다. 요아힘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 찼다.
‘내가 아무 얘기도 안 해 주니까 속상했던 걸까?’
조금 지쳤는지 창밖을 바라보는 아딜로트를 훔쳐보던 미아가 주먹을 꼭 쥐었다.
자신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없이 지원해 준 아딜로트다. 물론 그를 위한 거였지만, 역시 더는 속이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눈치를 보던 미아의 입이 열렸다.
“일단…… 맞아. 에트루리나에 가고 싶다고 한 것도, 호흐실트 후작저에 가려고 한 것도 다 조사 때문이었어.”
“…….”
“근데 나쁜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나는 그냥 아딜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랬어.”
아딜로트는 반응이 없었다. 듣고 있는 걸까? 긴가민가하면서도 미아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게 아니었으면 호흐실트 후작이 태후파인 것도 못 알아냈을…….”
“예?”
그때 불쑥 요아힘이 끼어들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네. 제가 들은 바로는요.”
미아가 고개를 끄덕이곤 호흐실트 후작저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요아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세빌 상회야 원래부터 예의주시 중이었지만, 후작이 태후 쪽 세력일 줄은 몰랐군요. 기우는 달에 배팅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그러네. 단순히 손만 잡은 게 아닌가 보지?”
두 사람의 대화에 미아가 놀랐다.
“에트루리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아딜로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어, 어떻게?”
그럼 나 괜히 개고생한 거야?
미아의 울상을 보고는 아딜로트가 심드렁히 말했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네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서 집중적으로 조사하다가 알아낸 거니까. 그리고 최근 감찰부에서 보고가 하나 들어오기도 했고.”
“보고?”
아딜로트가 무심히 대답했다.
“미로미스 상회에서 전로 제작에 참여했던 기술자들이 사라졌어.”
“……!”
미아가 단숨에 진지해졌다. 그만큼 심각한 일이었다.
미아가 전생의 지식으로 고안해 낸 미로미스 전로는 오르퀘니나의 독점 기술이다. 그 구조와 제작법을 알고 있는 기술자들이 사라졌다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술자들은 엄중하게 보호받고 있지 않아?”
“그게 이상한 거야. 자발적으로 도망친 게 아니고서야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아딜로트에 말에 따르면 사라진 기술자들은 전부 남부에 있던 이들이라고 했다. 북부 지로티 공작령의 기술자들은 모두 무사했다.
“평범한 실종이 아니구나.”
“그래.”
“게다가 대외비긴 하지만, 최근 라지푸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네?”
갑작스러운 요아힘의 말에 미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지푸트의 졸장부 만리타 장군이 갑작스럽게 군비 강화를 주장했죠. 이 정보와 전로 기술자들의 실종, 그라스 후작의 횡령, 세빌 상회의 유통망을 조합하면 무슨 결론이 나올까요?”
너무 스케일이 큰 얘기에 벙쪄 있던 미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
“호흐실트 후작이 라지푸트랑 손을 잡은 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