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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22화 (122/193)

122화

“제 짐작도 그렇습니다.”

과거 세빌 상회는 미로미스 전로 때문에 에트루리나 광산 개발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미로미스 상회는 셀레스티얼 백작의 반역으로 황실에 귀속. 에트루리나 광산 개발 사업은 그대로 내무부를 담당하는 그라스 후작에게 넘어갔다.

‘그러다 그라스 후작이 지원금을 횡령하는 걸 알고 호흐실트 후작이 냉큼 거래를 제안했겠지.’

시기를 보면 아마 처음에는 단순히 철광석을 빼돌려 라지푸트에 넘기려 한 듯했다. 하지만 철광석이란 아무리 세빌 상회더라도 유통이 쉬운 물건이 아니다.

“기술자를 데려와서 전로를 만들게 하고 전로 자체를 팔아 먹는 걸로 노선을 바꾼 거네……. 그것도 라지푸트에…….”

미아의 중얼거림에 아딜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직 장부에 뜨지 않았구나.’

사실 미아는 무도회가 끝난 다음 날 바로 상무부의 크리스티아네를 찾아갔다. 세빌 상회의 매출입 장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딱히 이상한 점이 없어서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미아가 기억을 돌이키는 와중 요아힘이 말했다.

“해서, 호흐실트 후작이 태후파인 걸 숨긴 거라면 아무래도 보통내기가 아닌 듯하니, 저도 에트루리나에 함께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보다.”

그때 아딜로트가 끼어들었다. 서릿발 같은 시선이 미아를 향했다.

“그걸 알아내려고 무도회에 갔다는 거야? 위험했으면 어쩌려고.”

“응? 그치만 아딜이 옆에 있으니까…….”

미아의 말에도 아딜로트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미아는 괜히 쫄아서 입술을 말았다.

요즘은 내내 이랬다. 아딜로트는 뭔가에 화가 나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게 뭔지는 말해 주지 않았고, 덕분에 미아만 죽을 노릇이었다.

‘왜 그러냐고 묻고는 싶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아딜로트의 눈에서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듯한 초조함이 느껴져서.

그래서 미아는 얌전히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근데 이젠 조사도 거의 다 했고…….”

“그럼 정리해. 대금을 요구하면 재무부로 돌리고.”

그 말에 아딜로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미아는 당황했다.

“그, 그치만 나도 정보원은 필요한데?”

“황실의 비밀정보부원을 하나 붙여 주면 되잖아.”

옆에서 요아힘이 미쳤냐는 눈으로 아딜로트를 바라보았다. 미아가 잽싸게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그리고 시즈는 나한테 잘해 준다니까!?”

“잘해 주는 게 더 이상하다고는 생각 안 해?”

“응?”

또다시 아딜로트는 답답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저번에 같이 술도 마셨지.”

“……그랬지?”

“호흐실트 후작저에서는 밤에 같이 산책을 했고.”

“……그랬지.”

“그리고 너한테 손을 댔고.”

응?

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호흐실트 후작에게 들킬 뻔했을 때. 율리시즈가 자신을 놔주지 않긴 했다.

“근데 그건 약간 실수에 가까운…….”

그 순간 아딜로트의 얼굴에 찬기가 서렸다.

“대긴 댔다?”

“…….”

유도신문이었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미아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은 순간이었다.

딸그랑.

뭔가가 맑은 소리를 내며 미아의 품에서 떨어졌다. 자연히 세 사람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본 요아힘이 놀라 중얼거렸다.

“키토 후작가의 문양…….”

“헉. 흠집 나면 안 되는데!”

미아는 잽싸게 떨어진 신분패를 주워들어 후후 불었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요아힘이 물었다.

“……키토 후작이 주신 겁니까?”

“네! 혹시 신분 때문에 애매한 일 생기면 쓰라고 빌려주셨어요!”

“예? 하하……. 그게 그렇게 쉽게 빌려줄 물건이 아닌데……?”

“네?”

“…….”

그리고 그 모습에 아딜로트는 기어이 입을 닫아 버렸다. 이어진 지옥 같은 침묵 속에서 미아만이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미아와 아딜로트, 요아힘이 탄 마차는 저녁나절에 수도 근교의 도시인 뤼넨하임 시의 공관에 도착했다.

미아에게 기사 여럿을 붙여 방으로 이동하게 한 뒤, 아딜로트와 요아힘은 잠시 공관의 복도를 거닐었다.

“……내가 이상해?”

그러다 별안간 아딜로트가 물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요아힘이 자연스레 그 말을 받았다.

“……그렇겠지. 자연스러운 거겠지.”

제국의 그린 듯 아름다운 황제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제대로 뜨면 말간 루비처럼 빛나는 눈이, 내리깐 속눈썹 그림자에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건 사람의 심장을 꽤 선득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점점 그냥 전부 다 죽이고 끝내고 싶어지는 것도.”

그 말에 요아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죽이고 끝낸다’의 범위가 어디까지일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설마 그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이자 오랜 친우인 페르디안 키토까지 포함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모르는 일이지.’

요아힘이 아딜로트에게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시즈라는 그 정보원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페르디안은 정말이지 의외였다.

그는 이런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여자 하나가 뭐라고.’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신붓감으로서 미아 셀레스티얼의 가치가 그 정도로 높지도 않았다. 요아힘으로서는 아딜로트와 페르디안이 이런 조잡한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아딜로트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요아힘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면 너는 안 말리는군.”

“예?”

“도움이 될 만한 황후를 들이라고 돌림 노래라도 부를 줄 알았는데.”

팔짱 낀 자세. 나른한 동작.

희미한 잔인성이 드러난다는 것을 빼면 놀랍도록 수려한 얼굴이 자신을 가만히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시선이 주는 기묘한 압박감에 요아힘은 괜히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말린다고 들으실 것 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역시 너는 나를 잘 알아.”

“요즘은 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폐하도, 키토 후작도.”

페르디안을 떠올린 요아힘이 미간을 좁혔다.

“키토 후작은 좀 더 감정을 잘 통제하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페르는 귀하게 자랐거든.”

아딜로트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보는 눈이 높지.”

“그건 제가 보는 눈이 없다는 걸 돌려 말씀하시는 건가요, 폐하?”

“아니.”

아딜로트가 중얼거렸다. 내리깐 눈 아래로 기이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너까지 적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리야.”

명징한 진심만이 담긴 그 말에 소름이 요아힘의 등골을 내달렸다. 요아힘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 멈춰 섰다.

아딜로트는 그런 그를 두고 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요아힘은 뒤늦게 오한에서 벗어나 아딜로트가 남기고 간 말을 되새겼다.

자신이, 미아를?

요아힘이 실소를 흘렸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 * *

며칠 뒤, 드디어 여행이 끝났다. 에트루리나 광산 초입의 가장 큰 도시인 다르켈 시였다. 마차 창 너머로 거리를 보던 미아의 안색이 곧바로 밝아졌다.

“축제네요!”

“그렇군요.”

요아힘이 수긍하며 차양을 걷고 창밖을 보았다. 수도 울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초라한 거리지만 사람들이 분주히 주변을 꾸미는 것이 보였다.

“블루문 페어라고 그랬죠? 타이밍 엄청 좋다!”

미아의 말대로 때마침 블루문 페어가 시작한 날이었다. 오르퀘니나에는 1년에 한 번, 나흘 연속으로 창백한 푸른 달이 뜬다.

전설에 따르면 요정 여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달이 푸른 빛을 띠는 것이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사람들은 모두 일을 멈추고 축제를 즐긴다.

아딜로트는 소란스러운 창밖을 보고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별론데.”

“그러게 말입니다.”

요아힘이 차분히 긍정했다. 축제는 많은 것을 가린다. 주민들의 불만이나 평소의 생활 모습까지도.

“꼬치! 솜사탕! 서커스! 저건 뭐지?”

반면 미아는 창문에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제일 솜사탕같이 생긴 사람이 솜사탕을 탐내는 모습에 요아힘은 실소했다.

‘하다못해 어린애도 저렇게 기뻐하진 않을 텐데.’

수도 울름의 블루문 페어에 비하면 한참을 못 미치는데도 미아는 마냥 신기한 듯했다.

‘어릴 때부터 앓아서 이런 걸 경험한 적이 없는 건가.’

그리 생각하니 요아힘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아는 늘 웃고 다니기에 그런 과거가 있으리라곤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다. 지금도 축제는 처음이라거나 하는 말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녀는 마치 과거를 쉽게 잘라낼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지간히 냉정한 성격인가 보군.’

아딜로트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마차 여행 내내 복잡한 생각 중인 것 같던 그는 이제 정말 미아에 대해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에 요아힘이 슬쩍 운을 띄웠다.

“폐하. 나중에 시간을 내서 미아 님과 축제에 다녀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

그 순간, 미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없죠.”

“그치만 일도 바쁠 거고……, 아딜은 황제고…….”

“오는 동안 급한 용무는 어느 정도 처리했습니다. 남은 건 제가 할 수 있고, 폐하는 강하시니까요.”

“그, 그래요?”

미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딜로트를 흘끔거렸다. 축제에 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요아힘이 피식 웃었다.

‘냉정하다는 건 장점이지. 적어도 폐하의 발목은 잡지 않겠어.’

게다가 요아힘이 눈에도 미아는 은근히 냉정할 뿐, 속을 알기 힘든 건 아니었다. 생김새는 귀엽고, 행동은 더 귀여운 편이었다.

딱히 사람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자신이 이 정도니, 다른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으리라.

아딜로트 역시 차마 미아의 기대 어린 눈을 외면하지 못하고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러든가.”

“헉.”

눈을 크게 뜬 미아가 입술을 꼭 앙다물고 눈을 부릅떴다. 신이 났다는 걸 숨기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입꼬리가 꼬무락거리고 있었다.

그녀도 그걸 느꼈는지, 얼마간은 참는 듯하더니 결국 뺨을 발갛게 물들이곤 웃음을 터뜨렸다.

“헤헤.”

그 투명한 기쁨에 요아힘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걸림돌에 불과한 축제지만, 어쩐지 이런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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