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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25화 (125/193)

125화

“미아 님.”

“요아힘!”

미아가 그제야 인기척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요아힘은 의자를 끌어와 그녀 옆에 앉았다.

“시야가 좋네요. 제가 끼어도 될까요?”

“네!”

미아가 구김살도 없이 방긋 웃었다.

“…….”

한동안 두 사람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치형의 넓은 통창으로 아래를 구경하면서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른 달빛 속에서 요아힘이 입을 열었다.

“혼자라도 나가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좀 말을 잘 듣죠!”

미아가 우쭐대며 말했다. 셀레스티얼 백작 영애가 과거에 크게 아팠더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흘리고 지나갔을 말이었다.

요아힘은 축제를 구경하는 미아의 빛나는 눈을 바라보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시나요? 이 세계에서 육신의 아픔은 영혼이 지나치게 정결하기 때문이라고들 합니다.”

“전 아팠다가 나았는데. 그럼 제 영혼은 이제 더러워진 건가요?”

“그 표현은 제 취향은 아니군요. 좀 더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표현할까요?”

나긋나긋한 요아힘의 음성에 미아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아딜이나 페르였으면 당황했을 텐데, 역시 요아힘은 다르네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짓궂은 말씀이었습니다.”

“알아요. 저 가끔 이렇게 심술부려요.”

미아는 실실 웃으며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희고 도톰한 뺨 위로 거리에서 흘러나온 색색의 불빛이 드리워졌다.

평소보다 어른스럽고 차분한 분위기 때문인지 요아힘은 괜히 미아를 흘끔거렸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쳤다.

“요아힘?”

미아가 속삭이듯 물었다. 흠칫한 요아힘은 가까스로 할 말을 찾아냈다.

“머리를 새로 땋아드릴까요?”

“앗. 지금 이상해요?”

“아뇨. 갑자기 제 손재주를 자랑하고 싶어져서요.”

뜬금없는 말에 미아가 잠깐 놀란 토끼 눈을 했다가 까르르 웃었다.

“요아힘은 말 정말 예쁘게 하네요. 그럼 부탁해도 돼요?”

“칭찬 감사합니다.”

요아힘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미아의 머리카락을 풀어 내렸다. 그리고 화장대 위에서 빗을 가져와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빗어 나갔다.

“머리를 만질 줄 아시네요.”

“어릴 땐 여장을 했습니다.”

“와! 정말요? 잘 어울렸을 것 같아요.”

“잘 어울렸을 겁니다. 누구도 저를 남자라고 의심하지 않았고, 그 덕에 징병을 피해 갔으니까요.”

“오…….”

미아가 말끝을 흐렸다. 예상외로 담담한 반응에 요아힘이 피식 웃었다.

“욕하지 않으시는군요?”

“요아힘이라면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다른 사람이었으면 욕했을 테지만.”

“하하.”

그의 입술 새로 작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람이었다.

‘나도 처음부터 그 안에 있었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요아힘의 입꼬리가 빙글 위로 말려 올라갔다.

미아와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있던 그녀는 자신을 보자 분홍색 눈을 반짝이며 호감을 내비쳤었다.

원래 요아힘은 그런 비합리적인 행위를 경멸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싫지 않아.’

그때, 그의 손가락이 제 머리카락을 스치는 감각에 집중하는 듯하던 미아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묶는 방식이 특이하네요?”

“이편이 더 귀여워요.”

“앗.”

주먹으로 입을 가린 미아가 실실 웃었다. 설렌다는 듯한 태도지만 그게 아니란 것을 요아힘은 알았다.

저것은 그저 잘생긴 이성이 달콤한 말을 할 때 나오는 반사적인 행동에 불과하다. 저런 것으로 그녀의 심장은 움직이지 않는다.

“폐하를 너무 미워하진 말아 주십시오.”

“전 아딜 좋아하니까 그럴 일은 없어요. 그치만 아딜한텐 비밀이에요. 기고만장해지면 열 받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미아가 샐쭉 웃었다.

요아힘은 실소했다.

설마요. 그는 오늘도 혹시 당신이 보일까 봐 3분에 한 번씩 창밖을 보던 사람인걸요.

“압니다. 아마 키토 후작도 좋아하시겠고, 저도 좋아하시겠죠. 지로티 공작도 좋아하실 테고요. 세레니티 듀레인 양은 아주 좋아하시고.”

“와. 족집게!”

“그런 거 하라고 나랏밥을 먹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미아는 분명 자신을 포함해 몇몇 사람에게는 첫 만남에서부터 이유 모를 호감을 드러내 주곤 했었다.

그래도 그녀의 눈이 가장 반짝이는 건 역시 아딜로트를 볼 때였다.

‘그걸 정작 당사자도, 상대도 모르고 있다니.’

우스운 연극이다. 너무 우스워서 괜히 끼어들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머릿속과는 다르게 황제의 신임받는 재상 요아힘 키르히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겁니다.”

“…….”

“블루문 페어는 수도 울름이 더 화려하기도 하고요. 처음 겪는 축제가 볼품없어서야 안 될 일이죠.”

때마침 리본이 다 묶였다.

미아는 양손을 들어 동그랗게 매달린 머리카락을 들썩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축제의 불빛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요아힘.”

그렇게 말한 그녀는 깃털 부채 같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가, 살짝 눈을 뜨곤 배시시 웃었다.

‘천만에요.’

그렇게 답하려던 요아힘은 까닭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의 가슴 속에 희미한 갈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 * *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새벽. 아딜로트는 뻐근한 뒷덜미를 문지르며 공관을 나섰다.

원래는 새벽까지 일할 생각이었으나, 쉬라고 보낸 요아힘이 도로 돌아와서는 혀를 차며 말했다.

‘특별히 일은 제가 해 드릴 테니 가서 직접 보십시오.’

미아를 보란 뜻이겠지.

떠밀리다시피 하며 공관 뒤쪽의 별채로 향하면서도 아딜로트의 발걸음은 느릿느릿했다. 제 잘못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축제를 못 가게 할 것까진 없었나.’

기대하는 눈치였는데.

황태후의 끄나풀 때문에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누가 봐도 그건 명목에 불과했다.

그냥 자신이 꼴사납게 질투했을 뿐이다.

미아가 온갖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 진즉 알고 있었는데도.

‘어쩌면 나도 페르처럼 그냥 호의에 착각하고 있을 뿐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딜로트가 입을 꾹 다문 그 순간, 구슬끼리 부딪치듯 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와! 비둘기!”

미아의 목소리.

별채로 향하던 아딜로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곧 별채 옆 작은 정원에서 미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기사들과, 그 앞의 광대까지도.

아딜로트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자, 그럼 여기선 뭐가 나올까요?”

미아는 광대 한 명이 모자를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것을 반짝이는 눈으로 지켜보는 중이었다.

기사들이 그런 미아를 흘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축제를 구경 못 하게 되어서 일부러 데려온 건가.’

그의 반려동물은 정말 어지간히 인기가 많다. 저 많은 기사를 대체 언제 어떻게 자기편으로 만든 걸까.

“준비된 것은 여기서 끝입니다! 마지막으로 선물을 드리죠!”

쇼의 마지막이었는지, 광대는 품에서 마법처럼 온갖 풍선을 꺼냈다.

“와! 고마워요!”

미아가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

아딜로트는 잠시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미아가 색색의 풍선을 장난으로 기사들에게 휘두르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였다.

아딜로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아!”

아딜로트는 보았다.

풍선을 들고 이리저리 흔들던 미아가 살짝 손가락의 힘을 푸는 것을.

아딜로트의 눈이 커졌다.

‘방금 일부러?’

“이런! 리베로 경, 그쪽으로 갑니다!”

“하나라도 잡아!”

당황한 기사들은 뒤늦게 풍선을 잡아채려 폴짝거렸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풍선은 빠르게 더는 어찌할 수 없는 높이까지 날아가 버렸다.

미아는 아쉬워하는 기사들을 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죄송해요, 기껏 선물해 주신 건데! 그치만 정말 재밌었어요!”

“어떡하죠?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리시길 바랐는데…….”

“제 실수인걸요! 그리고 방 안에만 있으면 풍선이 불쌍하니깐!”

그 말에 아딜로트는 벼락을 맞은 듯 자리에 멈춰 섰다. 베일리에게 들었던 미아 셀레스티얼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아주 어릴 때 발병했다고 합니다. 돌봐 주지 않으면 안 되는 불치병이라 대부분 방에서만 지냈다고 합니다.’

불치병으로 모친은 일찍 죽었고, 부친이란 작자는 그 모양이었다.

‘초반에는 셀레스티얼 백작이 사람을 초대해 주거나 광대를 불러 주었다고 합니다만, 점점 그런 일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가세가 기울어서인지 본인이 사양해서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날아가는 풍선을 바라보는 미아의 모습에 아딜로트의 심장이 선득해졌다.

‘방 안에만 있으면 풍선이 불쌍하잖아요.’

분명 알고 있었는데.

아딜로트가 마른세수했다.

‘내가…… 실수했군.’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뒤돌아볼 것 없이 성큼성큼 미아에게 다가갔다.

“폐하?”

기사들이 놀라 경례하는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딜로트는 즉각 미아 앞에 섰다.

“나가자. 축제.”

자신이 생각해도 꼴사나운, 조바심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분홍색 눈이 어리둥절하게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딜로트는 희미한 기대감을 가졌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그러나 다음 순간 미아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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