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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애완동물이 되었다-144화 (144/193)

144화

‘분명 뭔가 더 있어!’

‘지로티 전로에 이어서 크라우스의 비법까지 알고 있다니.’

‘또 뭘 알고 있는 거지? 이번엔 우리 가문이랑 손을 잡아 줄 순 없을까?’

고작 말뿐일 리는 없었다. 그녀는 지로티 전로를 만든 사람이었으며, 릴리벳 크라우스가 보인 태도만 봐도 확실했다.

미아가 저 작은 머리통 안의 뭔가를 현실에 내놓는 순간, 오르퀘니나의 판도는 또다시 뒤집힐 터였다.

“미아 님.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고 운이라도 띄워 주시지요.”

“그러게요. 너무 궁금하다!”

그 흐름에 함께하고 싶었던 귀족들은 눈을 빛내며 적극적으로 미아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더는 누구도 릴리벳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뿔싸.’

릴리벳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이대로 둬선 안 돼. 크라우스 공작가가 이렇게 취급받을 순 없어!’

우선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해야 했다.

난생처음 주도권을 뺏겨 본 릴리벳은 일부러 강하게 손뼉을 짝 쳤다. 매서운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릴리벳은 태연하게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이동할까요?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어요. 우선, 승마복으로 갈아입으시겠어요?”

“승마복이요?”

“와! 기대되네요!”

몇몇 귀족들이 환한 얼굴로 호응했다.

황제가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귀족들은 영지의 컨트리 하우스가 아니라 수도의 타운하우스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었다. 덕분에 귀족들이 승마를 즐기던 시간도 줄어든 참이었다.

그들을 먼저 보내고 난 후, 릴리벳은 급하게 집사를 찾아갔다.

“에른스트!”

그녀의 급박함을 하인들이 미리 알려 주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크라우스 공작가의 집사 에른스트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공작 각하는 어디에 계시지?”

“울름의 타운하우스에 계십니다만.”

릴리벳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바로 매를 띄워. 각하께 의견을 구해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미아는 너무나 가볍게 말했으나, 만약 인공 비료를 만들어 내는 게 그렇게 쉬웠다면 공작가가 어떻게 지금까지 이 위세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의 말에 에른스트는 고개를 스르르 움직여 창밖을 보았다.

“먹구름이 몰려드는군요……. 비가 내릴 모양입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릴리벳이 저택에서 분주하게 편지를 휘갈기고 있을 무렵.

남들의 눈을 피해 저택 뒤로 빠져나온 아딜로트 역시도 매 한 마리를 팔목에 얹고 있었다.

“다행히 제때 도착하겠군.”

아딜로트의 중얼거림에 곁에 있던 기사 리베로 클라티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두 폐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 * *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뒤 일행이 이동한 곳은 리기모어 언덕이었다. 그쯤 이미 하늘은 꽤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원래는 크라우스 공작령의 광대한 땅을 자랑하려고 한 건데…….’

릴리벳은 남몰래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의 대화 때문인지 누구도 평원의 모습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귀족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식사 때만 해도 자신에게 잘 보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이들이 ‘재밌게 됐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아야 해. 저렇게 안이하게 구는 이들에게 일일이 반응할 필요 없어.’

릴리벳은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다잡았다.

미아 셀레스티얼 머리통 속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건 릴리벳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중요한 건 황제와의 혼인이야. 그것만 제대로 이뤄지면 돼.’

릴리벳이 마차에 동승한 아딜로트를 흘끔거렸다. 그는 팔짱 낀 자세로 얼굴을 굳힌 채 말이 없었다.

미아가 비료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딜로트가 반응을 보인 건, 페르디안이 미아를 보호하듯 나섰을 때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나를 선택했을 때의 이득을 보여 주려고 했지만, 이제 그걸로는 안 돼.’

릴리벳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쩔 수 없이 저열한 방법을 택해야 할 모양이었다.

리기모어 언덕에 다다른 릴리벳은 우아한 태도로 모두 앞에 나섰다.

“앞쪽에 보이는 숲은 리기모어 숲이에요. 안쪽에 길이 여러 갈래로 있고, 식생이 다양해서 승마하기에 좋답니다. 날이 조금 어둡지만, 역시 귀족이라면 이런 취미를 즐기면서 돈독해지는 게 아닐까 해서요.”

그때, 미아가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

“저는 말을 못 모는데…….”

그 말에 릴리벳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죠? 마차는 이미 돌려보냈는데. 아마 저희가 승마를 끝마칠 때쯤 돌아올 거예요. 다시 부를 수도 있지만, 굉장한 민폐겠군요.”

“아…….”

미아가 시무룩해져서 손을 내릴 찰나.

“나와 함께 타지.”

페르디안 키토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는 이번 나들이에서 단 한 번도 남과 말을 섞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페르디안이 성큼성큼 미아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어깨를 잡아라.”

“응?”

그리고 미아의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말 위에 앉혔다.

“흐억.”

놀란 미아가 안장 위에서 바들바들 떨기 시작하자 그는 피식 웃고서 미아 셀레스티얼 뒤에 올라탔다.

“고삐를 잡고. 당기진 말아라.”

“이, 이렇게?”

“그래.”

페르디안은 그대로 미아를 감싸듯 고삐를 잡았다.

페르디안과의 체구 차 때문에 미아는 거의 폭 끌어안기듯이 그의 앞에 앉게 되었다.

미아는 긴장으로 눈만 깜빡였고, 그런 그녀를 향해 페르디안이 밀어를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정 불안하면 그냥 몸을 기대라.”

“…….”

평소의 키토 후작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태도였다.

“…….”

미아는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어색한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 모습에 괜히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 역시도 붉게 물들었다.

“이동하지.”

페르디안은 그렇게 미아를 태운 채, 앞서 말을 몰기 시작했다.

“…….”

남겨진 건 귀족들과 릴리벳, 그리고 굳은 얼굴의 황제뿐이었다. 남은 이들은 뒤늦게 그 자리에 있는 황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딜로트는 주먹을 꾹 쥔 채 제법 멀어진 페르디안을 눈으로 좇기만 했다. 표정은 없었지만, 누가 봐도 살기가 맴도는 얼굴이었다.

“저, 저희도 슬슬 갈까요?”

“그, 그게 좋겠습니다!”

황제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귀족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렇게 먼 곳의 호위 병력을 제외하면 둘만 남자 릴리벳이 한숨을 쉬었다.

“폐하.”

그 음성에 삐걱대듯 아딜로트가 릴리벳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자, 공기까지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숨쉬기가 어려워진 릴리벳은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모습을 보이신다고 해서 미아 양은 폐하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유언이 별로군.”

그러면서 아딜로트는 허리춤의 단검으로 손을 옮겼고, 그 행동을 본 그녀가 움찔했다.

“그러니까 차라리 다른 방식을 제안 드린다는 뜻입니다!”

릴리벳이 급하게 외쳤다. 황제는 섬뜩한 붉은 눈으로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방식?”

“네! 이를테면, 고전적이고 유치하지만 늘 효과가 있는 질투 유발 같은 거요.”

그렇게 말한 릴리벳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그 효과는 지금 폐하께서도 느끼고 계시겠죠.”

약간은 주제넘은 말이었으나 아딜로트는 무심하게 고개를 모로 기울일 뿐이었다.

“그로 인해 네가 얻는 건?”

“이 결혼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제 노력이 참작될 수 있겠죠. 또한 가신들에게 크라우스 공작가의 위세가 여전히 확고하며, 폐하와 적이 아니라는 걸 보여 줄 수 있고요.”

“미래의 공작가의 입지 말인가.”

“네.”

릴리벳이 당당하게 말했다. 무심결에 꺼낸 제안이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계획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다음 순간 차갑게 말했다.

“거절하지.”

“……거절하신다고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잠시 굳었던 릴리벳이 뒤늦게 반문했다.

“응.”

“―대체 왜요!”

릴리벳이 외쳤다.

자신도 모르게 나간 무례한 말투에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내 부아가 치밀었다.

도대체가 이 황제는. 미아는. 그리고 저 멍청한 귀족들은!

대체 왜 이렇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하단 말인가!

“…….”

아딜로트는 감히 무례하게 자신에게 호통친 릴리벳의 목을 베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녹색 눈을 들여다보듯이 응시했을 뿐이다.

그러다 툭 던지듯 말했다.

“논리를 대고. 따지고. 간을 보고 이득을 계산하고…….”

“……?”

“그게 가능한 마음이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지.”

담담하게 말하는 아딜로트를 보며 릴리벳은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들이 보이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그녀에겐 너무나 불가해했기 때문이다.

그때,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아딜로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런 걸 제안한 이유는 정말 그것뿐인가?”

“네?”

아딜로트는 대답 없이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말 위에서 릴리벳을 내려다보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그댄 그냥 미아를 깔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까 나를 끌어들여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 아닌가?”

“……!”

릴리벳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딜로트는 무섭도록 눈을 부릅뜬 얼굴의 릴리벳을 보고는 픽 웃더니 냉소적으로 말했다.

“아주 대국적이군. 크라우스 공작가의 미래가 밝아.”

그리고 무심하게 릴리벳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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