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오르퀘니나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모든 귀족이 참여하는 국무 회의가 열린다.
황제가 귀족과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 위해 만들어진 회의로, 그곳에서는 계급이 낮아도 자유롭게 발언하고는 했다.
그 회의장인 외제니의 홀.
말을 꺼낸 것은 황태후 파 인사인 라인하르트 백작이었다.
“저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 섰습니다.”
이제 막 50대로 넘어가는 중년은 오늘따라 유독 화려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체구가 워낙 건장했기에 그는 평소보다 두 배로 더 커 보였고, 덕분에 사람들은 손쉽게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바로…… 우리가 모시는 황제 폐하가 오르퀘니나의 황가인 슈뢰더의 적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제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말에 회의장은 단숨에 고요해졌다.
“…….”
“…….”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적막한 외제니의 홀.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상석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서 오르퀘니나의 젊은 황제,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는 서늘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대가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인가? 라인하르트 백.”
“물론입니다, 폐하.”
라인하르트 백작이 과장되게 허리를 굽히며 답했다. 그러면서도 눈은 내리깔지 않고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폐하.”
말없이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아딜로트를 옆에서 요아힘이 만류했다. 이 황제는 너무 강한 나머지 종종 무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해결될 게 아니었다.
‘카를 라인하르트 백. 혈통을 중시하는 구 귀족. 권력욕이 많은 것에 비해 근시안적인 남자…….’
그리고 대표적인 황태후파 귀족.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왔다는 건 필경 뭔가 준비해 놓았다는 뜻입니다. 저쪽의 패를 전부 봐야 합니다.”
“…….”
요아힘이 빠르게 속삭였다. 골자는 살심이 들어도 참으란 이야기였다.
다행히 아딜로트는 소름 끼칠 정도로 무심한 낯을 하긴 했어도 검을 빼 들진 않았다.
그렇다고 요아힘의 요청을 수락한 것도 아니었다.
요아힘은 라인하르트 백작이 이 젊은 황제가 기어코 돌아 버리기 전에 용건을 끝내 주길 바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백작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레아 황비 전하는 멸망한 젠타리아 출신의 외국인입니다. 그리고 같은 젠타리아 출신의 기사를 호위로 두고 있었지요. 그 둘의 사이가 매우 돈독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돈독했다’고 말할 때의 라인하르트 백작은 심술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의미를 눈치챈 아딜로트의 입매가 굳었고, 요아힘은 조용히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여차하면 황제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행히 아딜로트는 아직 말로 할 정도의 이성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템프라우 경을 말하는 거라면 그는 어머니와 부적절한 관계 따윈 없었어.”
“폐하께서 그걸 어찌 확신하십니까? 폐하께서 태어나시기도 전 일인데 말입니다.”
라인하르트 백작은 시큰둥하게 말하곤 다시 좌중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소문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황제라고 생각하고 떠받들었던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는 황제의 자격이 없습니다!”
연사의 외침이 외제니의 홀을 울렸다.
귀족들은 당장이라도 황제의 기사들, 혹은 황제 본인이 달려들어 라인하르트 백작의 목을 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아딜로트는 정말 그럴 뻔했다. 그를 말린 것은 요아힘의 나직한 말이었다.
“여기서 라인하르트 백작을 죽여 봤자 또 나올 겁니다. 그리고 백작의 죽음을 걸고넘어지며 폐하를 더 심하게 몰아가겠죠.”
“내가 그런 걸 신경 쓸 것 같아?”
“폐하는 무사하실 겁니다. 하지만 크라우스 공작가에선 누가 다쳤습니까?”
“…….”
아딜로트는 검 손잡이를 놓아 버렸다.
요아힘은 부드러운 눈매로도 가려지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런 아딜로트를 응시했다.
“어중간하게 곁가지를 잘라내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좀 더 들어 보시지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기에 귀족들의 눈에는 황제가 뭔가를 눌러 참는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황제가 뭔가를 참다니.
‘반응이 없네?’
‘설마…… 진짜야?’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노귀족들은 과거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레아 황비 전하 뒤에 늘 기사 한 명이 있던 것도 같았죠.”
“예. 그랬지요. 외국에 시집왔으니 동향 사람이 호위하는 것 정도는 루드비히 선황제 폐하께서도 허용해 주셨습니다만…….”
“흠……. 사실 루드비히 황제 폐하는 레아 황비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의심이 섞인 눈초리가 아딜로트에게 와닿았다. 수려한 용모의 젊은 황제는 환멸이 비치는 눈으로 말했다.
“그 선대 황제인 루드비히도 내가 슈뢰더의 적통임을 공증했을 텐데. 역사를 배우지 않았나 보지?”
“물론! 황실 역사가는 그리 기록해 놓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공증 서류가 없지 않습니까!”
라인하르트 백작이 외쳤다.
“제가 알기로 그걸 공증하는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은 폐하와 당대 대신관, 그리고 레아 황비 본인뿐입니다. 아, 시녀들도 있군요. 하지만 모두 돌아가셨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거기서 ‘돌아가신’ 건 내 아버지와 대신관뿐, 나머지는 살해당한 거 아닌가?”
“……흠! 흠. 말씀을 더 곱게 해 주시지요, 폐하.”
헛기침한 라인하르트 백작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어쨌거나 공증은 소실되었습니다. 저희는 폐하가 정말로 오르퀘니나의 합당한 주인이신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신의 천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외치는 라인하르트 백작을 보며 귀족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줄을 잘 서야겠는데.’
‘어느 쪽을 골라야 하지?’
당연히 그들은 아딜로트가 황족이 아니라고 믿지는 않았다.
어느 나라에서든 황족은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다.
아딜로트 역시도 비범한 재능과 출중한 능력을 가졌기에 그가 슈뢰더의 적통이 아닐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명분이었다. 크리소르 황태후가 황제 아딜로트를 끌어내릴 명분 말이다.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다들 너무 긴장하셨군요.”
재상 요아힘이었다. 그는 다정한 미소를 띤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드럽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외제니의 홀에 울려 퍼졌다.
“저희끼리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애초에…… 증거도 없이 폐하를 황족이 아니라 몰고 가다니. 우스운 일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는 요아힘의 눈빛은 예리하기 그지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인하르트 백작이 코웃음쳤다.
“하! 그 문제라면 이미 제가 답을 들고 왔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저건, 대신관의 인장?”
“신전의 교문이잖아!”
백작의 품에서 나온 종이를 본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신전이…….”
요아힘이 작게 중얼거리는 사이, 라인하르트 백작은 목을 가다듬고는 교문을 읽어 내렸다.
「카를 라인하르트 백작에게.
대신전은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가 슈뢰더 황가의 적통인지를 확인해 달라는 그대의 요청에 따라 ‘신의 명제 증명’을 수락하겠습니다.
당신의 용기를 응원하며, 여신께서 당신과 함께하기를.
대신관 요하네스 자우어.」
* * *
국무 회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미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원작에서의 마지막 사건.
‘그놈의 혈통이 뭐라고. 참 나.’
미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몽블랑 케이크를 우물거렸다.
눈앞에서는 아딜로트와 요아힘, 슐츠 공작이 심각한 얼굴로 토의 중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명제 증명을 사용하면 오히려 폐하께서 슈뢰더의 적통임이 확실해질 텐데…….”
“미리 접근해 보고 싶지만, 요하네스 대신관은 현재 황태후 궁에 묵고 있습니다…….”
“하아.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미아는 몽블랑 케이크를 꿀떡꿀떡 넘기며 생각했다.
‘무슨 생각이긴. 쥐뿔 아무것도 없으면서 허세 부리는 거지.’
명제 증명.
치유와 더불어 신관들이 가진 가장 특별한 능력 중 하나다.
일정 수준 이상의 신성력을 지닌 신관은, ‘지평선 너머의 여신’에게 기도해 명제의 참‧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
신 본인이거나 신관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이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참이 아닌 명제를 확신하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요하네스 대신관은 지금과 똑같이 ‘명제 증명’을 이용해 아딜로트를 궁지에 몰아간다.
‘여신의 신실한 종, 요하네스 자우어의 이름을 걸고 고합니다…….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는, 슈뢰더 황가의 적통이 아닙니다.’
‘……!’
‘아무 일도 없잖아……?’
‘설마 정말 황족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사실 거기엔 허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