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좌중의 소리 없는 경악, 보다 직접적으로는 재상의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하는 눈빛을 배경으로 두고 아딜로트가 말했다.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의 이름을 걸고, 나는 내 어미의 결백을 증명하겠다. 만약 내가 슈뢰더의 핏줄이 아닐 경우, 그 자리에 자진하도록 하지.”
“폐하!”
“군사적 보복도 없을 것이며, 내 기사들은…….”
재상의 다급한 고함을 무시하고 아딜로트는 홀을 호위하고 있는 붉은 사자 기사단을 훑었다.
그리고 너무나 가볍게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나랑 같이 죽어 줘야겠어.”
그 말에 기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 번 두드렸다.
외제니의 홀은 다른 의미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금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정말로 황제가 목을 건다고? 이 자리에서?’
‘재상의 놀란 얼굴을 보면 합의되지도 않은 일 같은데…….’
눈치를 보던 귀족들은 이제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그들은 황제의 기사들이 두려워 가만히 있었다.
여기서 크리소르 황태후의 말이 옳다는 것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황제가 그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다시 황위를 차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황제가 자신의 목을 건다면…….
꿀꺽.
누군가 침을 삼켰다.
그리고 미아 셀레스티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요하네스 자우어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걸어야죠!”
“……!”
대신관은 설마 자신에게로 화살이 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시, 신전은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
“안 할 거면 아예 나타나지를 말았어야죠. 이만큼 관여해 놓고 여기서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미아가 신랄한 말과 달리 표정만은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폐하가 슈뢰더의 적통인 게 드러나면 신전도 같이 날아가요. 애매하게 박쥐처럼 굴지 말고 선택하시죠?”
“하! 기개 하나만큼은 마음에 드는군. 얌전히 내 밑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크리소르가 눈을 희번덕대며 하는 말에 미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악당 밑에서 일하겠어요!”
그 와중에 크리소르까지 미아를 만류하지 않자 요하네스 대신관의 얼굴은 그의 수염보다 더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저, 저는……. 아, 아니. 신전은……!”
“대신관.”
그럼에도 요하네스 대신관이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크리소르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 건방진 년이 한 말을 듣지 못하셨소? 교만하기 짝이 없긴 하나 내용에는 그른 것이 없지. 대신관께서도 선택하셔야지 싶소만.”
목숨을 걸어서인지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도리어 생기가 넘쳤다. 반쯤 미친 사람 같은 생기였다.
요하네스 대신관은 지팡이를 든 손을 덜덜 떨었다.
“하, 하지만…….”
“대체 뭐가 문제요? 어차피 대신관의 명제 증명으로 저 오만한 아딜로트 놈이 슈뢰더의 적통이 아님을 밝혀 주면 그만이거늘.”
“……그게 말입니다…….”
“음?”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던 대신관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알겠습니다……. 신전은 황태후 폐하를 지지하겠습니다…….”
“훌륭한 안목이야.”
“자! 그럼 이제 다음 차례인가요?”
요하네스 대신관의 말에도 미아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손뼉을 짝 쳤다.
그리고 의석을 둘러보았다.
부채꼴의 의석에는 귀족들이 앉아 있었다.
가장 앞줄에는 국무 회의의 진행자인 슐츠 공작을 제외한 3공작이.
그 뒤에는 4후작이.
그 이후로 백작과 자작, 남작과 호민관이 앉아 있었다.
“그럼 이제 귀족 여러분께 물을게요.”
그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미아는 사랑을 고백하는 소녀처럼 수줍게 말했다.
“우리 폐하가 황가 슈뢰더의 올바른 후계자이자, 오르퀘니나를 다스릴 적법한 통치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폐하께 힘을 실어 주세요.”
양자택을 강요하는 잔인한 말과 달리 사탕을 녹인 양 달콤한 목소리였다.
“참고로 이 도박이 망하면 가문은 몰살입니당!”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난 순간.
놀랍게도 누군가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거수했다.
“페르디안 키토가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 황제 폐하를 지지하지.”
“……!”
“키토 후작이…….”
아딜로트의 가장 큰 충신이자, 그의 가장 오래된 우방인 페르디안 키토였다.
그는 마치 뭔가를 대비하듯 갑옷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고운 미모는 바래지 않았고, 동시에 그 차분한 낯은 그의 선택이 절대 충동적인 것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었다.
미아는 그가 그렇게 나올 것을 예상했는지 부드럽게 웃었다.
“후회하지 않으실 자신 있으세요?”
“무슨 일이 있든 폐하를 지지하는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럴 거다.”
“아마 자진해야 할 텐데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저야 뭐! 원래 폐하 애완동물이니까.”
미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페르디안은 그런 미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같이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음. 용감하시네!”
기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말에 미아는 어색하게 그 대화를 끝내 버렸다.
“그럼 다른 분은요? 폐하와 레아 황비님의 무결함을 지지해 주실 분, 더 없으세요?”
그때, 가장 앞줄에서 지로티 공작이 거수했다.
“지로티 공작가 역시 폐하를 지지하겠소.”
“바이지겔 백작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상했던 인물들이 손을 들었고, 그 외에도 몇몇 귀족들이 손을 들었다.
결코 많은 수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손을 든 것은 릴레 후작이었다.
“……릴레 후작가도 뜻을 같이하겠습니다.”
그는 이 상황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의 놀란 시선을 냉연히 무시하고서 남 일인 양 바른 자세로 되돌아왔을 뿐이다.
더는 손을 들 사람이 없었다.
카르디날레 공작과 크라우스 공작, 남은 후작들은 역시나 예리한 눈으로 상황을 살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 가문은 만약 여기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중립을 유지했다’는 말로 상황을 빠져나갈 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손 안 든 사람, 후회하게 될걸요!”
미아는 쌕 웃고서 요하네스 대신관 뒤로 물러났다.
이제 모두가 요하네스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요하네스 자우어 대신관은 번들거리는 시선을 받으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는 크리소르 황태후의 요청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일이 크게 번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내 말 한마디에 이 중 일부가 죽는다고…….’
속이 울렁거리고 로브 안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부 거짓말인데…….’
요하네스에게는 황제의 혈통을 검증할 방법 따위는 전혀 없었다. 신성력 따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드높은 곳의 여신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에 처음 금반지에 끼워진 때부터였던 것 같기도 했다.
뭐가 됐건 요하네스가 대신관 자리에 오른 뒤의 일이었기에, 요하네스는 신성력이 사라지고도 태연하게 대신관의 지위를 누려 왔다.
문제는 그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대신관님. 기부금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신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신관들의 급여를 좀 줄이면 되지 않느냐?’
‘……이미 지금도 많은 신관이 급여도 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습니다. 혹, 대신관님께서 황실에 교문을 띄우시는 건…….’
‘허튼소리! 대신관이 되어서 세속의 왕에게 굴복하라는 말이야! 여신이 그렇게 가르치더냐!’
‘하지만…….’
‘고얀 것! 나는 기도하러 가야겠으니, 참회의 방에 들어가서 제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금식하도록!’
‘대신관님!’
처음에는 권위로 눌렀으나 그마저 점점 어려워졌다.
‘요하네스 대신관님은 신전의 운영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 같아……. 이번에도 또 금으로 된 수반을 사셔야겠다고…….’
‘하아……. 얼른 드미트리 님이 대신관이 되셨으면 좋겠다.’
복도에서 신관들이 속닥이는 내용을 듣고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느꼈다.
‘돈! 돈 나올 구멍이 있어야 해!’
본디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내는 것은 황실이다.
그러나 아딜로트 황제는 집권 이후 신전을 계속해서 무시했다.
신전에 들이닥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기부금도 끊기고 정기 기도도 오지 않았다.
그는 그 돈으로 도시를 정비하거나 사회 보장 제도를 확충했다.
자연히 신전의 세는 줄어 갔고, 대신관으로서 요하네스는 선택해야만 했다.
‘요하네스 대신관. 황제를 압박하고자 하는데 도와주시겠소? 대신관의 이름값은 톡톡히 쳐 드리지.’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크리소르에게 약간의……. 아주 약간의 거짓말을 했다.
‘폐하가 슈뢰더 황가의 피를 잇지 않으신 걸, 결국 밝히실 모양이군요……. 하기야 이제 그걸 증명할 방법이 명제 증명밖에 없으니…….’
그는 그냥 크리소르 황태후에게 돈이나 좀 뜯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뭐요?’
그런데 그 한마디로 크리소르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지더니 그녀는 광증 들린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역시……. 역시 그랬군! 그 간악한 마녀 같은 계집이 젠타리아의 호위 기사와 붙어먹은 게야!’
‘…….’
‘그래! 대신관을 속이거나 매수했겠지! 이제야 모든 게 풀리는군! 아하하하!’
요하네스 대신관은 배를 잡고 웃어 대는 크리소르를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크리소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신관. 자리를 마련할 테니 모두 앞에서 그걸 밝혀 주시오!’
‘하, 하지만 황제에겐 군사가…….’
‘오르퀘니나의 백성들은 절대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황제가 슈뢰더의 적통이 아님이 드러나면 백성들부터가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럼 그때 그들을 선동해 황제를 끌어내리면 됩니다.’
요하네스는 망설였다.
하지만 크리소르의 다음 말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보상은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크라우스 공작 역시 이 일에 사활을 걸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그걸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크라우스 공작가의 위세가 최근 기우뚱했다고는 하나, 크라우스 공작가는 신전에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내고 있는 가문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신전을 유지하기에 버거웠다.
‘아무도 모를 거다. 질문만 교묘하게 하면……!’
자신이 손을 더럽히면 신전은 부를 얻을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요하네스 대신관은 국무 회의에 참여했다
다행인 점은 그가 그를 이어 대신관이 될 드미트리를 떼어놓고 참석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신성력이 발현되지 않는 것을 차기 대신관인 드미트리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되었다.
‘그래. 드미트리는 여기 없고, 내가 신성력을 잃었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요하네스 대신관은 사람 좋은 낯을 하고 천천히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