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그리고 보석이 박힌 금빛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드높은 곳에 계신 여신이시여……. 요하네스 자우어의 이름을 걸고 여쭙습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외제니의 홀에 울려 퍼졌다.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에게 슈뢰더의 피가 흐른다면, 계시를 내려 주십시오……!”
요하네스 대신관이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요하네스가 예상했던 대로.
더불어, 귀족들의 예상과 달리.
“…….”
“…….”
“…….”
“……뭐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충격은 느리게 퍼져 나갔다.
가장자리 의석에 앉아 있던 로브 쓴 남자가 벌떡 일어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신성력이……?”
“이봐! 뭐 하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남들이 무시하고 지나쳤을 그 작은 소란을 귀담아들으며 미아는 눈을 빛냈다.
‘이제 시작이야.’
지금부터는 절대로, 단 한 순간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수를 숨겨 두고 있다는 게 탄로 나는 순간, 꾀어내야 할 대상은 도망가 버릴 테니까.
‘지금부터 나는 하드 배팅으로 인생 망한 사람인 거야.’
연기의 시간이었다.
미아는 크게 심호흡한 뒤, 요하네스 대신관 앞으로 뛰어들었다.
“자, 잠깐만요!”
그리고 무례하게 보이리란 것을 알면서도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이, 이게 왜 이러지. 마, 말도 안 돼요! 잠깐만요! 취소!”
그녀는 울상을 지은 채 외쳤고, 그제야 사람들은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요하네스 대신관이 명제 증명을 시도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즉, 아딜로트 겐첸 슈뢰더는 사실 황족이 아니라는 뜻.
그건 그가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 *
요하네스 대신관이 여신에게 기도하던 그 순간, 크라우스 공작은 대신관이 아닌 황제와 재상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 덕에 그는 황제와 재상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표정을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황제, 아딜로트는 놀람과 동시에 그러한 상황에 괘념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의 시선은 회의 내내 미아 셀레스티얼에게만 붙박여 있었다.
크라우스 공작이 보다 주의 깊게 살핀 것은 재상이었다.
황제의 책사이자 두뇌인 요아힘 키르히. 냉정하고 엄격하며 재위 내내 사사건건 자신의 방해해 왔던 철혈의 재상.
“무슨…….”
그 재상이 경악하고 있었다.
그는 1초 뒤에 곧바로 표정을 정돈하고 평소의 부드럽고 예리한 낯으로 돌아왔지만, 크라우스 공작은 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미아 셀레스티얼의 계획이 뭐였는지는 몰라도 실패했다. 그리고 이는 재상의 상정 외.’
크라우스 공작의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퍼즐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즉, 이건 저들로서도 예상치 못한 상황인가 보군.’
그의 녹색 눈이 금속성으로 빛났다.
이렇게 빨리 라쉬트 평야에서의 굴욕을 씻을 기회가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냐! 뭔가 잘못됐단 말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다, 당신 사기꾼이지!”
“무슨 모욕을! 겸허히 결과를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아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당황하는 미아 셀레스티얼과, 벌컥 화를 내는 요하네스 대신관.
그 모습을 보며 크리소르는 미친 듯이 웃었다.
레아 황비가 레벤토르에 입궁했을 때부터 그녀를 싫어했던 크리소르는, 심지어 레아 황비가 불륜까지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몹시 신난 듯했다.
“거짓말하지 마! 레아 황비 전하는 불륜 같은 거 안 했단 말야! 당신이 사기꾼인 게 분명하잖아! 아, 아니면 한 번 더 해!”
미아 셀레스티얼은 쩔쩔매며 요하네스 대신관에게 매달리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크라우스 공작은 혀를 찼다.
‘오만이 화를 불렀군.’
아무래도 라쉬트 평야에서 크라우스 공작가를 무릎 꿇린 것이 그녀에게 과한 만용을 심어 준 듯했다.
요하네스 대신관과 실랑이하던 미아는 이내 주변의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곧 의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 연기해 주세요!”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국무 회의는 과반수의 동의하에 안건을 연기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이번 안건을 다음 주로 연기해 주세요! 우리 쪽에서도 신관을 데려올 테니……!”
“하!”
라인하르트 백작이 소리를 높여 코웃음 쳤다.
“이제 와 그렇게 주장한대도, 우리가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렇게 해야 한단 말이오?”
“그건……!”
말을 잇지 못하던 미아 셀레스티얼은 이내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작은 새처럼 훌쩍이던 그녀는 이윽고 흐느끼며 외쳤다.
“……기, 기술을 줄 테니까!”
동시에 귀족들의 눈이 번득였다.
‘기술?’
미아 셀레스티얼은 지금껏 혁명에 가까운 기술을 여럿 선보여 왔다.
그런 와중이니만큼 그녀의 한마디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별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기술 말이오?”
관중 중 누군가가 슬쩍 물었다.
갑작스러운 난입이었으나 누구도 그걸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도 궁금했던 것이다.
그들의 태도에 당황한 건 크리소르뿐이었다.
“지금 뭣들 하는 거요! 저 말을 듣겠……!”
“대, 대신 말해 주면 꼭 미뤄 줘야 해요!”
크리소르의 말은 미아의 애절한 외침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다, 다음 주 국무 회의가 끝나면 알려드릴 테니까, 한 주 더 미루는 거예요! 우리 쪽에서도 신관을 데려올 테니까!”
요정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억울하다는 듯이 생떼를 쓰는 모습에 일부 귀족들은 냉소를 지었다.
“이제 와서 황제에게 명제 증명을 해 줄 신관이 어디 있다고…….”
“게다가 대신관급이 아니면 불가능하잖나. 뭘 몰라도 모르는군.”
“찾아보면 되잖아요!”
미아가 뺨까지 붉히며 외쳤다. 귀족들의 냉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 신관, 데려올 테니까 미뤄 줘요!”
“그건 거수를 통해 결정할 일이지.”
“맞지. 절차를 따라야지.”
“하지만 이건 진짜 귀한 기술인데! 절대 안 쓰려고 했는데…….”
그때 누군가 피식 웃었다.
“황제의 목이 귀하긴 한가 보군? 그런데, 대체 무슨 기술일 줄 알고 우리가 회의를 연기해 준단 말야? 그것도 지금까지 우리를 농락했던 사기꾼을 위해 말이야.”
“……!”
미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화약이에요…….”
귀족들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주 무시무시한 것을 기대했는데, 화약이라니.
“불꽃놀이에나 쓰는 그걸 말하나?”
“그 정도가 아니에요!”
미아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녀의 안색은 차츰 창백해지고 있었다. 마치 밝혀져선 안 되는 비밀을 고해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이트로글리세린으로 만든 폭약이요…….”
“흠? 폭발이야 폭발석을 쓰면 되지 않나.”
“폭발석과는, 달라요……. 질산 화합물이랑 글리세린을 이용하면 되는데 냉각은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고, 뇌관은…….”
미아가 이어서 뭔가를 주절거렸으나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귀족들은 수염만 쓸어내리며 알아듣는 척 했다.
그때, 옆에서 라인하르트 백작이 슬쩍 물었다.
“그래서 그게 그렇게나 대단한 기술이란 말인가?”
미아가 모든 걸 다 불태운 사람처럼 허탈하게 답했다.
“네. 물론이에요.”
“하지만 말만 들어 보면 그냥 폭발석이 나은 듯한데…….”
“그렇지 않아요.”
“아니라니, 뭐가 말인가?”
“이건 규조토를 사용해 가볍고, 덕분에 운송이 쉬우며, 마력이 감지되지 않아요. 그리고 대량생산이 쉬워요……. 이걸 어디에 쓸 것 같으세요?”
내내 대담을 지켜봐 오던 크라우스 공작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부 지각 있는 자들은 바로 미아가 말하려는 것이 뭔지 눈치챘다.
미아가 그들의 생각을 말로 옮기듯이 속삭였다.
“전쟁이에요.”
“……!”
“이건 대량살상용 무기거든요.”
미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낯설고 위험한 단어에 귀족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키우는 데에 많은 시간과 돈이 든다.
그들이 전쟁에서 자주 보이지 않으며 몸값이 비싼 이유다. 폭발석이 귀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정도의 폭발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면?
“……큼.”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너무 터무니없어서 믿기에 힘들고, 그러나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에 미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속삭였다.
“이걸 쓰면, 너무 많은 사람이 죽을 게 뻔해서……. 그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때 누군가 외쳤다.
“네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데?”
그에 힘입어 다른 이가 호응했다.
“맞네. 그냥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말 아닌가?”
그 말에 미아가 약간 발끈한 듯이 말했다.
“그, 그럼 확인해 보세요! 제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그렇게 외치고서 요하네스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제게 명제 증명을 써 주세요! 제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미아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요하네스 대신관이 움찔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얼굴은 밝아졌다.
“그러네. 때마침 여기 대신관이 있으니……!”
신의 힘을 빌린 명제 증명이라면 미아의 말이 진짜인지 가려낼 수 있었다.
라인하르트 백작이 요하네스 대신관에게 다가갔다.
“요하네스 대신관. 혹 저것이 한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해 주실 수 있겠소?”
“라인하르트 백!”
크리소르가 역정을 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었고, 그건 그녀의 연사였던 라인하르트 백작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요하네스 대신관은 일순 당황의 빛을 띠었다.
“하지만…….”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는 이내 유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라를 위한 일이니까요…….”
대량살상용 무기를 만드는 기술을 공개하겠다는 게 어떻게 나라를 위한 일이 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누구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그 말에 몸을 떤 것은 가장자리 의석에 앉아 있던 로브 쓴 남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