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미아뿐만이 아니었다.
황제 아딜로트, 지로티 공작, 키토 후작, 재상 요아힘과 슐츠 공작. 그리고 릴레 후작이며, 총 시녀장 제인까지 모조리…….
‘……이게 말이 돼?’
렌나가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다들 좋은 사람들인데, 왜 그런 사람들이 죽어야 해?’
렌나도 일전에는 지금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황제는 그냥 무서운 사람이었고, 황태후와 똑같은 악한에 불과했다.
그 생각이 바뀐 건 미아를 만나고 나서였다.
정확히는, 미아가 엠브라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였다.
‘자기 몸을 던져서 남을…….’
감탄을 넘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황제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그제야 눈에서 뭔가가 한풀 벗겨진 듯, 렌나는 아딜로트를 바로 볼 수 있었다.
‘우리 폐하……. 맨날 일하시네.’
황궁 의료원도 일찍 퇴근하는 직장은 아니었지만, 황제의 집무실은 늘 그보다 더 늦게 불이 꺼졌다.
다른 부분에서도 소소하게 바뀐 점들이 많았다.
‘기초 의학 연구비 지원이 늘어났어!’
‘빈민 구제 사업이 늘어나서인지 빈민이 많이 준 것 같아.’
‘황제가 저번에 앙겔루스 구빈원에 다녀온 뒤로부터 저소득층 지원도 늘어났더라.’
‘들었어? 요한슨의 딸한테 몹쓸 짓을 한 그놈, 평생 노역한다더라.’
분명 많은 게 좋아지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서 아딜로트의 이름은 잘 거론되지 않았다.
마치 최고의 통치는 백성이 통치자 존재만 알 뿐이어야 한다는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말이다.
반면 크리소르는 달랐다.
‘왜 이리 차도가 없는 게야! 네년들이 나를 죽일 셈이냐!’
너무 오래 아팠기 때문일까. 그녀는 의원들에게 손찌검도 서슴지 않았고, 폭언은 예삿일이었다.
가끔 황태후의 측근 시녀인 루넬 피아가 따로 렌나를 부르기도 했다.
‘시녀님? 부르셨어요?’
그러면 그곳에는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상처를 입은 하녀나 하인이 울고 있곤 했다.
‘이 아이를 치료해 주십시오.’
‘……황태후 궁의 하녀군요. 황태후 폐하께서 하신 일인가요……?’
‘…….’
입을 꽉 다문 시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렌나는 점점 황태후 궁이 악마의 소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기 들것에 누운 것도 환자인가요? 제가 봐드릴게요!’
‘……저건 환자가 아닙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네? 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한 달에 두어 번, 황태후 궁에서 뭔가 들것에 실려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더더욱.
‘미아 아가씨도, 그렇게 되겠지…….’
렌나는 엠브라와의 대화를 급히 끝내고 황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슨 정신인지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마차를 잡아타 오두막집으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뭘 원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두막집의 문을 열고, 탁자 앞에 주검처럼 앉아 있는 바루스 그리말디를 본 순간.
“……아버지……!”
렌나는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쩐지 오늘따라 유난히 평온한 낯을 하고 있는 바루스의 무릎에 기대어 펑펑 울었다.
“으흑. 저는……. 전, 어떻게 해야 할지…….”
“…….”
바루스 그리말디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런 렌나를 토닥여 주었다.
한참 뒤에야 울음을 그친 렌나는 토끼 눈을 하고서 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렌나.”
그런 렌나를 향해 바루스가 말했다. 늘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던 평소와 달리 초연함이 느껴졌다.
“황제와 그의 애완동물이 일주일 뒤 죽을지도 모른다지.”
“……알고 계셨어요……?”
“빵을 사러 시장에 나갔다가 들었다.”
“…….”
“미아 셀레스티얼이라면, 너를 도와줬다던 사람 아니니.”
“……네.”
렌나가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희미한 예감을 받았다. 아마 그들의 도망 생활이, 이제 곧 끝나리라는 예감이었다.
“렌나.”
늙은 아비가 담담히 말했다.
“나를 황궁으로 데려가렴.”
“…….”
렌나가 눈을 감았다. 다시 눈물이 줄줄 흘렀다.
“황태후 폐하가 황제 폐하께 그토록 원한을 가진 건, 황제 폐하가 그분의 아들을 해쳤다고 생각해서잖니.”
“…….”
“나는……. 나는 그게 아니란 걸 안다. 내가 그걸 밝혀야 해. 내가 말씀드려야 해.”
“……하지만, 그랬다간.”
렌나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바루스는 주름진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나 역시 지은 죄가 있으니 노역을 살거나 사형당하겠지.”
“……아버지. 저는……!”
“의원으로서 사람을 살리겠다고 맹세해 놓고, 그 기술을 사람을 죽이는 데에 썼으니 당연한 업보야.”
바루스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제 그들에게 속죄해야겠다……. 렌나. 그렇게 결심하니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어.”
“…….”
“그리고 너를 나와 같은 고통 속에 밀어넣고 싶지 않구나…….”
렌나가 큰 울음을 터뜨렸다. 더는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탓이다.
* * *
달이 없는 밤이었다. 구름이 많이 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아딜로트를 두고 홀로 침대에 누웠던 미아는 불현듯 잠에서 깼다.
누군가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딜?”
미아가 무심결에 중얼거리자 어루만지던 손이 멈칫했다.
“……아뇨. 저예요.”
다정하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즈? 흐암…….”
미아는 하품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기다려 봐. 지금 불을…….”
“아뇨. 이대로가 좋아요. 전 밤눈이 좋으니까요.”
“……난 안 좋거든?”
율리시즈가 웃었다. 어쩐지 가슴이 선득해질 정도로 초연한 웃음소리였다.
“……시즈. 무슨 일 있어?”
덜컥 불안해진 미아가 물었다.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 덩어리로만 보이는 율리시즈는 살짝 몸을 떨며 웃었다.
“없어요. 그보다…… 이번에도 재밌는 일을 저지르셨던데요.”
“저질렀다니! 밑밥을 깔았다고 해야지.”
“드미트리 신관을 이용하시는 거죠……?”
“응. 잘 아네?”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그거라면 확실히 황제가 슈뢰더의 적통이 아니라는 누명은 풀리겠네요…….”
“그렇겠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미아가 눈을 깜빡이며 율리시즈를 올려다보았다.
율리시즈는 어둠 속에서 그런 미아를 내려다보다가 살며시 침대에 앉았다.
“그걸로…… 만족하세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미아의 반문에 율리시즈가 이어 말했다.
“크리소르 황태후를…… 바로 죽이실 거예요?”
“그건 아딜이 결정하지 않을까?”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이름까지 걸고 맹세한 건데 자기가 어쩌겠어?”
“무엇보다 크리소르는, 죽는 순간까지 후회하지 않을 거고요…….”
“으음.”
미아가 팔짱을 꼈다.
‘확실히. 단순히 죽이는 걸로는 부족하지.’
미아는 크리소르가 좀 더 고통받길 바랐다. 정신적으로 말이다.
‘렌나 쪽이 움직일 때가 된 거 같은데. 소식이 없네.’
렌나의 성격상 자신이 죽는 걸 두고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나서려고 하겠지.
‘하지만 그걸로는 좀 부족한 느낌이 들긴 해…….’
이번의 국무 회의만 봐도 아직 크리소르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크라우스 공작가가 뒤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 율리시즈가 말했다.
“좀 더…… 크리소르 황태후를 지옥에 처박아 주세요.”
미아가 멈칫했다.
“무슨 원수라도 졌어?”
“아뇨……. 저는 그냥 미아 님이 빛났으면 좋겠어요.”
“…….”
공연히 불안해지는 말이었다.
그녀의 불안을 느꼈는지 율리시즈가 손을 뻗어 미아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아주 빛나서…… 제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왜?”
율리시즈가 웃음을 흘렸다.
“손이 닿으면 끌어내리고 싶어지잖아요…….”
“…….”
너 멀쩡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구나, 하고 말해야 했는데.
왜인지 미아는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의 율리시즈는 좀 이상했다.
“무슨 일인 건데?”
“제안을 하나 드리는 거죠……. 아니, 제안이 아니라 통보예요……. 제가 이렇게 행동할 테니, 맞춰 달라는…….”
“통보라니?”
율리시즈가 살짝 웃었다. 동시에 그가 손을 떼고 물러났다.
“이런 거죠. 가령…… 호흐실트 후작과 라지푸트를 연결해 준 사람이 크리소르 황태후라면?”
“요아힘이 그건 아직 증거가 불충분하댔어. 호흐실트 후작이 갑자기 죽어 버려서…….”
말하다 말고 미아가 말끝을 흐렸다.
“시즈. 설마…….”
“네. 그러니까 가령……, 크리소르 황태후와 라지푸트의 연락책을 맡았던 정보원이 제 발로 나타난다면?”
“……!”
미아가 이불을 움켜쥐었다.
“시즈, 그건…….”
“그리고 그 정보원이 알고 보니 입막음을 위해 호흐실트 후작까지 죽인 사람이었다면?”
“시즈!”
미아가 외쳤다.
그녀의 불안을 분명 알 텐데도 율리시즈는 태연하게 속삭였다.
“네. 아마 저는 사형당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