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
외제니의 홀은 고요했다.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크리소르가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리소르 님?”
루넬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지만, 크리소르는 그걸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머리 장식을 쥐었다.
끝이 뾰족한 머리 장식을 역수로 쥐고 일어난 크리소르는 무표정 그대로 천천히 바루스를 향해 다가갔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그녀의 동작에 바루스의 눈이 흔들렸고, 그사이 크리소르는 바루스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번쩍 들어 올렸을 때였다.
“잡아.”
아딜로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사들이 재빨리 크리소르에게 달려들었다.
“……!”
한참을 무표정으로 몸싸움을 벌이던 크리소르는 이내 악에 받친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야!”
“명백히 사실입니다. 신관을 데려와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크리소르가 귀신 들린 사람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우리 클라우디오가 그럴 리 없어……. 아니! 그렇다고 한들 뭐가 문제란 말이야!”
크리소르가 기사들에게 붙잡힌 채 아딜로트를 노려보았다.
“아딜로트 놈도! 그 외국인 년도! 클라우디오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아야지!”
“…….”
“네깟 더러운 야만인의 핏줄이 좀 죽어 나간다 한들 무슨 상관이냔 말이야!! 이 개돼지들 같으니!”
“…….”
“태어나기를 열등하게 태어난 네깟 놈들이 몇 명이나 죽는다 한들 클라우디오의 목숨에 비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무나도 오만한 말에 귀족들마저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바루스 그리말디가 슬픈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였습니까? 저한테 인체 실험을 명하고, 온갖 독을 만들라 시키신 게…….”
그의 말에 크리소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소리 높여 웃었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몇 명이 죽든 의학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면 그걸로 애국 아닌가?”
“…….”
그 순간, 바루스의 눈에 처음으로 슬픔이 아닌 분노가 떠올랐다. 옆에 있던 렌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알겠습니다.”
바루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클라우디오 황태자의 죽음은 자업자득이군요.”
그 말에 크리소르의 눈이 돌아갔다.
“이 개 같은 버러지가!!”
바루스는 음성을 높였다.
“필시 하늘이 당신에게 벌을 내린 겝니다!”
“이……!”
크리소르가 다시 바루스에게 달려들기 위해 악다구니를 썼으나, 기사들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크리소르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곧 흠칫했다.
그녀를 지지하던 귀족들마저도 지금은 조금 질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나를 그리 보는 거지……?”
그녀가 분노 스민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게로군……? 그런 게지! 그런 게야, 이 개돼지들 같으니라고!!”
크리소르는 억울하고 원통하다는 듯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연민을 다 끌어안은 사람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 너희 따위가 나를……. 내 아들을!”
“…….”
“내 아들만 살아 있었어도 너희 따위는 이미 죄 죽여 돼지밥으로 줬을 것이다!!”
오래전에 죽은 아들을 들먹이며 핏발 선 눈으로 외치는 크리소르를 사람들은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치광이를 보듯 꺼림칙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크리소르 님…….”
그 순간, 누군가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하시면 안 될까요……?”
황태후의 측근 시녀인 루넬 피아였다.
* * *
몸도 정신도 온전치 못한 크리소르를 따라 외제니의 홀에 들어선 이후.
루넬은 계속 공허함과 참담함에 시달렸다.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도 클라우디오의 망령을 좇으리라는 공허함.
늘 아름답고 선망받던 자신의 주인이 다른 이들에게 우습게 여겨지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참담함이었다.
그래서일까, 루넬은 국무 회의 내내 저도 모르게 세레니티를 살폈다.
주인의 옛 모습을 닮은 세레니티에게 크리소르의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가장 부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루넬의 예상과 달리 국무 회의 내내 세레니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크리소르를 무거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함부로 남을 품평하지도 않지만, 불의와 불명예를 쉬이 용납하지도 않는 냉정함.
‘…….’
마치 정말로 그 옛날의 크리소르 같은 모습이었다.
‘크리소르 님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루넬은 지친 눈으로 크리소르를 바라보았다. 나이든 주인의 모습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아들의 망령을 좇느라 온전치 못한 정신과, 빼빼 마른 몸.
어디에도 그 옛날의 크리소르의 모습은 없었다.
‘루넬. 나의 오랜 벗이여.’
루넬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이윽고 루넬은 지친 얼굴로 말했다.
“크리소르 님. 이제…… 그만하시면 안 될까요?”
루넬의 말이 들렸을 때, 크리소르는 아주 잠깐 루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뒤통수를 맞은 사람처럼 크리소르의 눈이 커졌다.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신을 오랫동안 보필해 온 측근 시녀가 방금 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루넬은 씁쓸하게 웃고서, 아딜로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폐하.”
“루넬!”
“저는 크리소르 님의 측근 시녀입니다. 오랫동안 크리소르 님을 모셔 왔고…….”
루넬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더는 가망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국가내란죄는 무조건 처형이니까요.”
아딜로트는 무심히 루넬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눈에 약간의 이채가 스쳤으나 목소리는 냉랭했다.
“그래서?”
“하지만 크리소르 님은…… 이미 생의 끝이 머지않으셨습니다.”
“루넬! 네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그러니…….”
루넬이 다시 눈을 뜨고 아딜로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모든 걸 자백할 경우, 최소한 크리소르 님이…… 평온하게 눈감으실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루넬! 지금……! 네가……! 미친 게로구나! 미친 게야!!”
크리소르의 외침에는 희미하게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광기에 가까웠던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가장 가까이서 뒤를 맡겼던 이가 자신을 저버렸다는 사실이 그녀의 정신을 몰아붙인 것이다.
하지만 크리소르의 비명에도 루넬과 아딜로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루넬 피아.”
아딜로트는 오연한 눈으로 루넬을 내려다보다 말했다.
“황태후가 크라우스 공작가에서 데려온 시녀라지.”
“예.”
“내 어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고 있나?”
루넬이 화살에 맞은 사슴처럼 숨을 들이켰다.
“알고…… 있습니다.”
“처형식에 참석하지 않으려는 나를 잡아다 앉힌 게 크리소르라는 것도?”
“……예. 그 역시 알고 있습니다, 폐하.”
루넬은 입술을 깨문 채 과거를 떠올렸다. 크리소르와 레아 황비에 대해.
크라우스 공작가를 외척으로 두고 있는 크리소르는 사실 젠타리아 출신의 황비를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크라우스 공작가 출신으로 늘 떠받들어졌기 때문인지, 크리소르는 황제를 레아 황비와 공유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아마 그때부터 크리소르가 비틀렸던 것 같다.
‘보아라. 루넬.’
‘이게 뭔가요, 황태후 폐하?’
‘레아 황비가 젠타리아를 부추겨 오르퀘니나를 공격하려 했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란다.’
‘……그게 사실인가요?’
‘아니? 내가 만들었지. 그년을 치워 버려야 하지 않겠니.’
비열한 미소를 짓던 크리소르의 모습이 아직도 똑똑히 기억났다.
이후 크리소르는 여러 수작을 부려 정말로 레아 황비를 치워 버렸다.
루넬은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크리소르를 도왔다. 자신은 그녀의 시녀였으니까.
‘두 눈 뜨고 똑똑히 보도록. 내 앞길을 가로막은 자가 어떤 꼴을 하고 죽어 가는지.’
루넬은 아딜로트가 어렸을 때, 크리소르가 레아 황비의 처형식에 그를 앉혀 두고서 한 말도 기억하고 있었다.
살고 싶으면 제 어미의 죽음을 외면하라고 종용하던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때 크리소르 님을 말려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지금 장성한 황제가 크리소르의 목덜미를 틀어쥐게 되었으니 말이다.
루넬이 공허한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크리소르 님을 살려 주신다면, 그에 대해 증언하겠습니다.”
“…….”
“레아 황비 전하 역시 황족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죄로―.”
그 순간, 루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딜로트가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요아힘이 외쳤다.
“페르디안 경!”
눈앞에 쇄도한 은빛을 보고 루넬은 눈을 질끈 감았다.
“―!”
카앙!
신경질적인 쇳소리가 났다.
“…….”
얼어붙어 있던 루넬은 한참 뒤에야 실눈을 뜨고 상황을 살폈다. 그녀의 눈앞에는 페르디안 키토 후작이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황제의 검인 샹귀스―에키온이 떨어져 있었다.
“폐하. 미아 님이 계시니…….”
멀리서 재상이 황제를 달래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
루넬은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었다. 팔다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키토 후작이 막아 주지 않았다면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