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군일지, 적군일지 (1)2021.12.25.
2021년. 하얀 소의 해, 신축년이 밝았다. 나는 23살이 되었고. 새로운 직장, 청와대로 출근했다. “안녕하십니까, 최지훈입니다.” 정무수석실에 들어가며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어, 왔어요?” 안에 있던 두 명의 남자가 나를 부드러운 인상으로 나를 반겼다. 먼저 다가온 인물은 자치발전비서관 박성민.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보다 나이는 훨씬 더 많았다. “이렇게 젊은 정무비서관님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말씀 낮추십시오.” “그럴까? 하하핫.”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최 비서관이라고 부르면 되나?” “예. 그러십시오.” 이곳에서 나의 정확한 직급은 정무비서관. 그렇기에 호칭은 여전히 ‘비서관’이었다. 물론, 국회에서 파리 목숨과도 같았던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직급이긴 했다. “지훈 씨가 23살이었나?” “예, 맞습니다. 99년생입니다.” “우리 아들이랑 동갑이네.” “아, 그렇습니까?” “응. 우리 아들은 엊그제 입대해서 군복무하고 있어.” “아드님께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에이, 장교까지 한 자네한테 들을 이야기는 아니지.”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머리가 희끗한 남성이 들어왔다. “오, 지훈 씨 왔어요?” 정무기획비서관. 이 사무실에서 정무수석 다음으로 직급이 높은 인물이다. 박성민 자치발전비서관이 능청스레 먼저 입을 열었다. “최 비서관이 말 편하게 하랍니다. 그게 낫다고.” “어우, 그럴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십시오.” “반가워. 얼굴은 몇 번 봤지?” “네, 김상진 선배님.” “이야, 이름까지 기억해 주니 영광인데?” “당연히 기억해야죠.” “앞으로 잘 부탁해.” 그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박성민과 김상진 모두 내게 호의적이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지금 이 건물 자체가 청와대 안에 있는 곳이다. 게다가 우리가 일하는 이 사무실 이름은 ‘정무수석실.’ 그 중에서도 정무수석은 아버지의 왼팔과도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그를 돕는 사람들이니 나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지. 국회에서 능력을 증명했건, 낙하산이든, 뭐든 간에 우선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점부터 그들은 당연히 나와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내게는 한유라 보좌관이 건네준 파일도 쥐고 있다. 여차하면 힘으로 굴복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지. 물론, 그렇다고 먼저 카드를 꺼내 보일 필요는 없다. 웃으며 사이좋게 지내는 게 서로 좋은 법이니까.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키우는 동물이 이빨을 드러내면 채찍질을 할 수 있다는 게 그들과 나의 차이점이지. “자리는 안내해 줬어?” “지금 알려 주려고 합니다. 최 프로. 이쪽으로 와 볼래?” “예, 선배님.” 나는 박성민 비서관을 따라 널찍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여기가 前 정무비서관이 쓰던 사무실인데…… 사실 셋 중에 제일 좁긴 하지만, 뷰는 제일 좋아.” “저도 그게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박성민 비서관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 이따가 여직원 하나 올 거야. 최 프로 도와줄 사람.” “알겠습니다.” “최 프로라고 불러도 되지?” “예. 편하게 부르십시오.” 나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프로는 검사들끼리만 쓰는 단어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끼리 편하게 부르려고 쓰는 거야. 세 명 다 직급이 비서관이잖아.” “아, 그러네요.” “그러면 짐 정리하고 있어, 최 프로.” “예, 선배님.” 나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 두고 창가로 향했다. 청와대의 울창한 숲이 눈에 들어왔다. 늘 관저에서 보던 뷰와는 꽤나 다른 느낌. 여민관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그런가, 학창시절에는 머리를 식히려 늘 걷던 공간인데 새롭게 느껴진다. 사실, 이곳 여민관은 대통령을 제외한 인력들이 일하는 곳이기에 평소에 거의 드나들지 못했다. 직원들이 매일같이 야근하고 아침 일찍 출근하는 곳이기에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싶어 일부러 이쪽으로는 오지 않았으니까. 천천히 책상에 물건들을 꺼낼 무렵.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노크 직후 문을 열고 들어오던 국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들어오세요.” 그제야 문이 열리며 정갈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 눈썹은 깔끔하게 정리한 티가 났고, 눈 또한 총명해 보이는 모습이 말 그대로 ‘단아하다’라는 단어를 빼다 박은 듯했다. “앞으로 비서관님 업무를 보조할 신혜지입니다.” “최지훈입니다. 잘 부탁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깍듯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늘 하실 업무부터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면 청와대부터 안내해 드릴까요?” “청와대는 괜찮고, 일단 여기 여민관 좀 안내해 주세요. 다른 수석님들이랑 보좌관, 비서관님들 사무실 위치를 몰라서요.”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 * * 여민관 소개가 끝난 뒤, 신혜지는 간단한 서류철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 업무들은 이번 주까지 처리해 주시면 되고, 여기는 기본 매뉴얼입니다. 만약 헷갈리시는 게 있다면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마 지금 당장은 나보다 신혜지가 업무에 대해 더 잘 알 것이다. 청와대에서만 벌써 3년째 정무수석실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니, 그 짬은 무시할 게 되지 못하니까. “종종 여쭤볼게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제 일인걸요.”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났다. “아, 참. 혜지 씨.” “네?” “혹시 지난 업무 파일도 볼 수 있나요?” “예. 말씀하시면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종이파일 말고 전자문서화 된 건 없나요? 슥 훑어볼 요량이라서요.” “아, 가능합니다. 조금 전에 말씀해드린 청와대 내부 포털에서…… 차라리 지금 보여 드릴까요?” “네.” 신혜지는 내 옆자리로 다가와 직접 마우스를 잡았다. 상긋한 페퍼민트 샴푸향이 느껴졌다. 그녀는 포털에 접속해서 파일화 된 문서들을 보여 주었다. “이런 식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혹시 이거 로그도 남나요?” “전자 서류함에 접속한 건 확인 가능하지만, 어떤 파일을 열람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더 필요하신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네. 쉬세요.” 다시 혼자 남게 된 사무실. 업무 매뉴얼을 대강 훑어본 뒤, 새로 올라온 서류까지 살펴보았으나, 그닥 영양가 있는 내용은 없었다. 나는 서류철을 다시 덮어 놓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최근 통과된 서류들을 중심으로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정무수석실의 최대 장점이지. 정무수석실에서 다루는 업무는 정무(政務). 즉 국가 행정에 관계되는 사무 혹은 정치와 관련된 정책들. 청와대의 정책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한민국의 모든 정책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지. 실시간으로 다루고 있는 정책에 대해서 세밀하게 파악이 가능한 것은 물론, 전후 상황에 대해서도 단번에 확인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무수석실로 올라온 정책들 중 통과된 것과 통과되지 않은 것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올라왔던 정책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으니까. 서류 첫 장과 마지막 장만 살펴도 누가 올렸는지 알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내용을 세밀하게 살피다 보면, 이게 어떤 기업에 가장 이득이 되고, 어느 회사에 해가 되는지 알 수 있다. 즉. 정치인 중 누가 어떤 기업과 손을 잡았는지, 이 정책의 내밀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뜻이지. 아마 아버지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도지사로 있는 첫째 형이라든지, 법원에 있는 둘째 형, 국회에 있는 셋째 형이나 국회와 연관이 있는 누나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알짜 정보들. 이것만 미리 파악해 놔도 앞으로 정치계에서 내 일은 굉장히 수월해진다고 볼 수 있다. 누구와 누가 손을 잡고 있는지만 봐도 대한민국 정치에 어떤 세력들이 있고, 누가 중심에 있으며 또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를 쉽게 알 수 있으니까. 드르륵-. 마우스 휠을 내리다가 한 가지 분야로 들어갔다. 수많은 정책들 중 내가 선택한 건 ‘건설’과 관련된 문서들. 모든 기업 중에서 가장 더럽고 비리가 많은 게 바로 건설 그룹들이니까. * * * 똑똑. “들어오세요.” “최 프로.” 박성민 비서관이 친숙하게 날 부르며 들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예, 선배님.” “퇴근 안 해?” “저는 업무 적응 좀 더 하려고요.” “그래? 첫 날부터 고생하면 안 되는데.” “혹시 회식 건이면…….” “아니야, 아니야. 금요일에 회식하자고 이야기했잖아.” 그는 슬쩍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바쁜 거 아니면 혜지 씨 먼저 보내라고.” “아…….” 깜빡하고 있었다. 내가 퇴근해야 신혜지도 퇴근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지금 말하겠습니다.” “가기 전에…….” 박성민 비서관은 조심스레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신 사무관 진짜 일 잘하니까 믿고 해도 돼.” “그렇습니까?” “조금 새초롬해 보여도, 행시 수석으로 들어왔거든.” 확실히 청와대에서 일하는 인물들이라 한 명 한 명 모두가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다. “아, 정말입니까?” “그래. 머리 회전도 빠르고 입도 무겁고. 괜찮은 친구야.” 행정고시 수석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원래 다른 쪽에서 데려간다는 거, 최 프로 온다고 정무수석께서 직접 잡았어.” 아버지의 왼팔인 정무수석이 잡았다면 충분히 믿을 만하다. 실력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어쩐지 여민관을 둘러볼 때부터 국회의 직원들과는 다른 느낌이 났는데, 확실히 다르긴 다르다. 국회와는 노는 물이 달라진 느낌이랄까. 인맥과 혈연, 지연, 학연의 힘으로 온갖 군상이 모인 그곳과 달리,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만이 모인 곳이 바로 청와대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저 청와대에 살던 학생일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게 하나씩 피부로 느껴지고 있다. “상사한테는 FM인데, 그렇다고 업무에 유도리가 없는 건 아니야.” “선배님께서 이 정도로 칭찬하실 정도면 진짜 괜찮은 사람인가 보네요.” “그렇지. 원래 우리 정무기획 비서관님도 혜지 씨 탐냈었거든.” “그 정도입니까?” “그렇다니까. 일 잘하지, 센스 있지, 예쁘지, 일할 맛 난다니까.” 박성민 비서관은 웃으며 내 팔을 툭 쳤다. “어쨌든 나는 먼저 들어간다.” “예, 들어가십시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곧장 사무실 문을 열었다. “혜지 씨.”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응답했다. “네, 비서관님.” “먼저 퇴근하세요.” “괜찮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아니에요. 중요한 일은 아니라서요. 이따가 시간 나면 아버지를 뵈러 갈 수도 있고요.” “아아.” “앞으로는 급한 상황일 경우 제외하고, 제가 따로 언질이 없으면 퇴근 시간에는 따로 보고 없이 먼저 가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책상 옆으로 나와 가방을 들어올렸다. “그러면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요.” 뭔가 업그레이드 된 버전의 한유라 보좌관을 보는 느낌이다. 물론, 미래 문자를 알게 된 뒤의 한유라가 아니라. 업무에 프로페셔널하던 면에서의 그녀. 왠지 모르게 더 든든해진 느낌이다. 그림자 뒤에는 마돈나가 있고. 빛 앞에는 신혜지라는 명석한 아군까지 생겼으니까. 물론, 신혜지를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건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알아볼 생각이다. 나는 신혜지를 보낸 뒤,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 건설과 관련된 서류를 세심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8시를 막 지나고. 퇴근을 할까, 조금 더 자료를 살펴볼까 고민을 하던 무렵. “어?” 2년 전 통과된 정책 중 수상한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