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8. 새로운 목표 (3) (78/500)


078. 새로운 목표 (3)
2021.07.30.


이경훈 교수와 뜻깊은 시간을 보낸 민우는 바로 307호로 복귀했다.

안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석사들이 모여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기에는 주예린은 물론, 수빈과 진섭도 있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자대생들이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얼마 남지 않아 석사들이 다 여기에 모인 것 같았다.

‘왠지 어색한 풍경인데?’

올해 초까지만 해도 자대생과 타대생 사이에 분명한 알력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단 몇 개월 만에 그것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민우가 있었다.

민우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오히려 명인대 출신 학생들의 눈에는 조금 뒤떨어진 사람이었지만, 그는 믿기 힘든 일들을 해냈다.

강철훈 교수 연구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을 시작으로, 조너던 캠벨의 이론을 발굴해 최민식의 박사 논문을 도왔다.

특히 최민식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가장 컸다.

그는 자대생 후배들조차 쉽게 인정해주지 않는 깐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민우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형, 동생 사이로 지내는 것은 물론, 인문서 단행본을 공저할 정도로 신뢰했다.

민우가 없었더라면 여전히 보이지 않는 알력이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별거 아니야. 잘못된 게 바로 잡혔을 뿐이지. 당연히 이래야 하는 거라고.’

민우는 가방을 던져놓고 무리에 끼어들었다. 다들 호의적인 목소리로 민우를 맞았다.

못 보던 얼굴들이 많았다. 총 여섯 명. 아마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생인 것 같았다.

그때 이수빈이 나섰다.

“우리는 다들 소개했는데 오빠도 하지 그래요?”

민우가 허리를 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석사 2학기고요. 현대소설 전공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해요.”

“이 오빠 참고로 우리 과 에이스예요. 6개 국어는 기본이고, 새로운 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해서 선생님들께 인정을 받기도 했어요. 그리고 인문학 강의로 무투브에서 유명해졌고. 지금은 <신화와 인간 :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이라는 단행본을 집필하고 있답니다. 대단하죠?”

자랑이 너무 심했다. 수빈의 평가는 모두 사실이긴 했지만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디테일하게 얘기할 필요 있어?”

“뭐 어때요? 사실인데.”

신입생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까까지는 단순히 호기심을 보였다면, 이제는 존경심까지 품고 있었다.

그때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한진섭이 일침을 날렸다.

“참고로 저 둘 커플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믿지 마세요. 아주 두껍게 콩깍지가 씌었을 겁니다.”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요?”

“뭐 어때? 사실인데.”

자기가 했던 말이 그대로 돌아오자 수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싫진 않았다. 공개적으로 못을 박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이번 신입생 중에는 이수빈이 보기에도 예쁜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민우에게 쓸데없이 호감을 느끼지 않도록 작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주예린이 끼어들었다.

“맞아요. 박민우 선배는 학부 때도 유명했죠.”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입을 향했다. 특히 이수빈은 궁금했다. 민우의 학부 시절에 대해서는 들은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 민우만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가 은근슬쩍 주예린의 뒤로 다가갔다.

“맨날 수업 째고 잔디밭에서 소주를…… 읍!”

민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인석이 점심을 잘못 먹었나? 이상한 소리를 다 하네. 하하하. 사실무근입니다.”

“읍읍!”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못난 후배의 입에서 손을 떼는 건 위험했지만, 기다리는 전화가 있어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네, 박민우입니다.”

― 안녕하십니까? 라온북스의 현기혁 팀장입니다. 이경훈 교수님 연락받고 전화드렸는데요.

“아, 예. 안녕하세요? 잠시만요.”

민우는 재빨리 307호를 나갔다. 생각보다 이경훈 교수가 빨리 움직인 것 같았다.

“말씀하세요.”

― 먼저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반갑습니다. 번역 외주 건으로 좀 뵙고 싶은데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전 오늘도 상관없습니다. 빠를수록 좋아서요.”

― 그럼 오늘 내방 가능하실까요? 저녁 6시 전이라면 아무 때라도 상관없습니다.

“오늘 갈게요. 사무실 위치가 어디죠?”

― 일산입니다.

일산은 조금 멀다. 지하철을 타면 한 시간 정도. 다소 부담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민우는 오후에 가겠다고 말했다.

― 자세한 주소는 톡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예. 부탁드립니다.”

전화가 끊기고 바로 톡이 왔다. 다행히 정발산역 근처라 버스를 갈아탈 필요는 없어 보였다.

민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에 오리엔테이션 뒤풀이에 참가하려면 지금 바로 다녀오는 게 좋겠네.’

민우는 307호로 들어가 사정을 설명하고 인문관을 나섰다. 물론 나서기 전 주예린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 * *

정발산역에서 내린 민우는 1번 출구로 나갔다. 일산문화공원을 오른쪽에 두고 걷기 시작했다.

‘뭐라도 사가는 게 좋으려나.’

민우는 잠시 편의점에 들러 비타민 음료 한 박스를 샀다. 소개를 받은 것이긴 해도 일을 부탁하러 가는 거니 성의를 표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5분 정도를 걷자 라온북스가 있는 빌딩이 나타났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10층에서 내렸다.

라온북스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 출판사였다. 복층 사무실이었는데, 30평 정도로 아담했고 눈에 보이는 직원은 열 명 정도였다.

그래도 사무실이 잘 정리되어 있어 보기가 좋았다. 신생 출판사답게 깨끗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현기혁 팀장님 뵈러 왔습니다. 박민우라고 하는데요.”

“아, 번역 외주 때문에 오셨죠? 이쪽으로 오세요.”

민우가 비타민 음료 박스를 건넸다.

“이거 좀.”

“어머, 감사히 마실게요.”

여직원이 민우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곧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작고 동그란 안경이 멋스러웠다.

그가 명함을 건네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현기혁입니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민우는 지음사 명함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경쟁 출판사의 명함을 줘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 번역 쪽으로 쓸 명함을 새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기혁 팀장은 40세 전후로 보였다. 신뢰감 있는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밖이 참 덥죠?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지하철을 오래 타서 그런지 시원하네요.”

“이경훈 교수님께 대강 듣기는 했는데, 민우 씨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네요. 소개를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민우는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전공이 국문학이라는 것과 6개 국어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지음사에서 단행본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까지 말했다.

“6개 국어면 대단하신데요? 어떤 걸 작업하셨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직 출간은 되지 않았지만 명인대 강철훈 교수팀에서 < The Oxford Introduction to Narrative >를 번역했습니다. 연말에 출간 예정이고요. 최근에는 피에르 랑느 박사의 논문을 하나 번역했습니다.”

“주로 기술번역을 하신 거군요.”

현기혁 팀장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보통 외주 번역이라면 일반서나 소설인 경우가 많은데 학술서 번역 경험밖에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저희가 부탁드리려는 원고가 소설 쪽이라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문학 전공이라 소설에 대한 기본 지식은 갖추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문체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분위기나 암시 같은 장치들이 제대로 번역될지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는 말이었다.

민우가 에이전시에 소속돼 있다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일이 틀어지면 에이전시에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친분으로 이어진 자리다. 업체 입장에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게 당연했다.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던 민우가 여유롭게 웃으며 제안했다.

“원작 샘플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샘플을요?”

“제가 포트폴리오가 부족하니까 바로 실력을 보여드리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테스트를 하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현기혁 팀장은 내심 한숨을 돌렸다. 이경훈 교수 때문에 테스트를 보고 싶다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는데 다행이었다.

현기혁 팀장이 잠시 밖으로 나갔다. 곧 그가 인쇄물 한 뭉치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어느새 안경을 쓴 민우는 노트북을 켜고 준비하고 있었다.

“원작의 10페이지 분량입니다. 제목은 <사각 살인>이고요. 최근 미국에서 주목받는 신인 리차드 와일즈의 작품입니다.”

“<사각 살인>이라면, 추리인가요?”

“맞습니다. 정확히는 미스터리 레이블로 나갈 겁니다.”

민우는 현기혁 팀장이 신중한 이유를 알았다. 추리 소설이라면 확실히 일반 소설보다 난도가 높다. 독자를 트릭에 현혹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행간을 절묘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오독의 여지가 생기기 마련.

하지만 민우는 여유가 있었다. 기지개를 켜며 해맑게 웃었다.

“재미있겠는데요? 저 추리 소설 좋아하는데.”

“다행이군요. 시간은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잠시 앉아 계세요.”

“네?”

현기혁 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댁에서 하시는 게 아니라 여기서 바로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그러려고 노트북 켰는데요?”

조판이라고 해도 10페이지 분량이면 작업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작품의 분위기도 파악을 해야 하니까.

A4로 환산하면 약 3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 일반적인 번역가들이 하루에 10페이지를 번역한다고 치면 꽤 양이 많은 편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끝날 겁니다.”

“알겠습니다.”

금방이라는 게 얼마만큼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현기혁 팀장은 에어컨 바람을 쐬며 그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번역을 끝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경훈 교수의 추천사가 마음에 걸렸다. 믿고 일을 맡길 만한 능력을 갖췄다고 했다. 흘려들을 수 없었다.

타닥타닥―

민우는 거침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시선을 원작 샘플에 고정한 채 타이핑을 계속했다.

마치 보고 베끼는 것 같은 그런 모습에 현기혁 팀장은 적잖이 놀랐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뭐야?’

민우가 잠시 손가락을 멈추고 노트북 너머로 현기혁 팀장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하세요.”

빙긋 웃은 민우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잠시 후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10페이지를 옮기는 데 딱 12분 걸렸다. 민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털었다.

“다 됐습니다.”

현기혁 팀장은 민우를 멍하니 바라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혹시…… 영문 그대로 옮겨 적으신 건 아니지요?”

“하하하. 일산까지 와서 그런 장난을 치고 있겠습니까?”

민우가 노트북을 돌려 현기혁 팀장에게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번역본을 읽은 현기혁 팀장은 탄성을 내뱉었다.

오역은 하나도 없었다. 민우에게 준 10페이지 분량은 이미 샘플 번역을 해 놓은 부분이라 그도 내용을 알고 있었다.

‘오역이 없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야. 뭔가 다른 게 있어!’

현기혁 팀장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원고에 빠져들고 있음을 느꼈다.

프롤로그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몰입도가 상당했다. 마치 번역을 한 게 아니라, 민우가 직접 창작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민우는 읽기 쉽게 A4사이즈가 아닌 조판 양식으로 번역 원고를 정리했다. 마치 종이책을 보는 것처럼 쉽게 읽혔다.

민우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현기혁 팀장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민우는 안경을 벗고 노트북을 정리했다. 잠시 후 현기혁 팀장이 서류 하나를 들고 왔다.

외주 번역 계약서였다.

민우는 우선 조건을 확인했다. 매절 계약이었다. 원고지 당 3천 원. 초짜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민우는 차근차근 계약서를 확인했다.

“납기일이 안 쓰여 있네요?”

“그건 보통 번역하시는 분과 상의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정한 가이드라인이 있긴 해도 일정을 맞추는 편이 좋아서요.”

“그렇군요. 보통은 기간을 어느 정도로 하나요? 제가 외주 일은 처음 해 보는 거라서.”

“이 정도 분량이면 한 달 반 정도로 합니다.”

“한 달 반은 너무 긴데.”

민우는 계약서에 공란으로 되어 있는 납기일란에 숫자를 적었다. 그것을 본 현기혁 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주일?”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음 주에 바로 드릴게요.”

민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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