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 < 99장. 마지막 수업 (3) >
외삼촌의 부탁으로 청문대 물리학과 임시 튜터로 나선 연주는 능숙하게 강의를 진행해 나갔다.
2단으로 된 거대한 칠판엔 복잡한 수식과 기호로 가득했다. 방학이었지만 넓은 강의실에 모인 학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강의를 경청했다.
그녀의 주전공은 불문학이었지만 천재적인 재능이 빚어낸 물리학과 수학의 수준은 측정이 어려웠다. 학부 특강 정도는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준비된 시간이 모두 끝나고 연주는 마커를 칠판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질문 사항 있으면 메일로 부탁해요. 취합해서 다음 강의 때 보충 설명을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연주는 환하게 웃으며 학생들과 인사했다. 교육행정도 그렇지만 실제 강단에 서서 강의를 하는 것도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학생들이 하나둘 빠져나갔지만, 유독 한 학생만은 나가지 않고 강의실 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 생각보다 데미지가 없어 보이시네요? 」
그가 말했다. 능숙한 영어로.
수업 자료와 출석부를 정리하던 연주가 고개를 들었다. 모든 학생들이 빠져나간 강의실에 홀로 앉아있는 젊은 사내가 시야에 잡혔다.
연주는 깜짝 놀랐다. 동시에 반가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 자얀 씨? 」
「 잘 지내셨습니까? 」
흰 이를 보이며 씨익 웃은 자얀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 아래로 걸어왔다. 잠시 후 그는 연주와 마주 섰다. 오늘도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 정말 멋진 강의였습니다. 하나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
「 고마워요. 그런데 말씀도 없이 한국엔 어쩐 일이세요? 」
「 비즈니스 차 왔지요. 그나저나 한국은 너무 춥네요. 두꺼운 옷은 영 체질에 안 맞는데. 」
자얀과는 따로 만날 정도로 친분이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는 비즈니스 차 왔다고 말하며 이곳 강의실까지 왔다. 무언가 이상했다.
「 혹시 청문대에 볼 일이 있으신 건 아니고요? 」
「 없다고는 말 못하겠네요. 정확히는 당신에게 볼 일이 있지만. 」
「 어떤 일인지 여쭤 봐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
「 하하하. 실례는 무슨. 일단 가면서 천천히 말씀 나누시죠. 시간이 허락되신다면. 」
자얀이 손으로 강의실 출입구 쪽을 가리키자 연주는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궁금했다. 무슨 일 때문에 한국까지 오게 되었는지.
강의동을 나서니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자얀은 인상을 쓰며 옷깃을 여몄다. 그 모습을 보며 연주는 작게 미소 지었다.
「 한국이 마음에 드셨나 봐요. 요즘 자주 오시는 거 같아요. 」
「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나라죠. 전쟁 이후 피폐해진 나라를 급속도로 부흥시켰습니다. 특유의 교육열도 매력적이고요. 」
「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인가요? 」
「 아뇨. 좀 다릅니다. 」
자얀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이 한국에 온 목적을 상세히 밝혔다. 연주는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사람은 민우의 연구실 앞에 서 있었다.
「 그런 목적이라면 분명 박 교수님도 동참해 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굳이 제가 나서지 않아도······ 알 카흐파 의장님의 첫 성과이기도 하니까요. 」
「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민우 그 친구 은근히 까다로운 면이 있어서 말이죠. 」
「 맞아요. 그건 동감해요. 」
싱긋 웃으며 연주는 마그네틱을 확인했다. ‘재실’로 되어 있었다. 연주는 가볍게 노크를 하려고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몸을 돌렸다.
「 그런데 아까 데미지라고 하셨는데, 그건 무슨 의미였어요? 」
「 민우에게 2세가 생겼다더군요. 」
「 예? 」
「 덕분에 결혼식 날짜도 당겨진 것 같은데······ 이러면 게임 끝 아닙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연주 씨가 멀쩡하신 것 같아서. 」
연주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자 자얀이 한숨을 내쉬었다.
「 민우를 마음에 두고 있던 거 아닙니까? 전에 다이아몬드 모임 때 딱 봐도 알겠던데요. 」
「 아, 그건······ 이제 됐어요. 」
「 단념하신 겁니까? 」
「 단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화학적 변화라고 할까요. 마음을 조금······ 다른 성질의 화합물로 바꿔 봤어요. 」
「 어려운 결정을 하셨군요. 」
「 질질 끄는 것도 서로에게 도움은 되지 않으니까요. 」
연주은 싱긋 웃었다. 꾸밈없는 그런 미소였다. 국가와 인종은 다르지만, 자얀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좋습니다. 좋은 마음가짐이군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조만간 좋은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예전의 연주였다면 정중히 사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굳게 마음을 먹은 만큼, 조금 변했다.
「 자얀 씨는 좋은 사람이 아니고요? 」
「 오, 그렇게 말씀을 해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일부다처제라 연주 씨가 싫어하실 거 같아서. 하하하. 」
자얀의 농담에 연주가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연주는 다시 몸을 돌려 연구실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민우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책 더미에 둘러 싸여 있었다. 마치 책이라는 창살로 만든 감옥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인쇄된 자료까지 너저분하게 널려 있어 한마디로 연구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민우는 여전히 피로에 찌든 모습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완전히 달랐다. 사냥감을 목전에 둔 그런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패닉에 빠져있던 그 나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의기와 패기로 충만한 상태였다.
한참 논문에 집중하던 민우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손님을 확인했다.
“어? 자얀!”
「 무슨 연구를 그렇게 열심히 하길래 얼굴이 반쪽이 됐어? 」
두 사람은 가볍게 포옹했다. 일전에 다이아몬드 소사이어티에서 만나긴 했지만 반가운 마음은 연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 한국엔 무슨 일이야? 미리 연락하지 그랬어. 마중 나갔을 텐데. 」
「 보아 하니 연락해도 만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
자얀이 수북이 쌓인 책을 둘러보며 한소리 했다. 일리가 있는 말에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 에이, 그래도 그 정도 시간은 내야지. 멀리서 온 손님인데. 아차, 내 정신 좀 봐. 일단 이쪽으로 앉아. 커피 괜찮지? 」
「 좋지. 」
연주와 자얀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민우는 미리 내려둔 커피를 두 잔 따른 뒤 비스킷 몇 개와 함께 대접했다.
곧 민우가 마주 앉자 자얀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 다른 건 아니고 우리 아버지 사업 때문에 왔어. 네가 꼭 참여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
「 가슴이 철렁한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나 싶기도 하고. 」
「 대단한 건 아냐. 아프리카 수단에 아버지 재단 이름으로 학교를 하나 세우고 있거든. 첫 사업인 셈이지. 」
「 아, 그거. 이야기 들었어. 」
「 학교가 곧 완성되는데 오프닝 세레머니에 참석해 줄 수 있나 해서 온 거야. 전화로 얘기하면 왠지 거절당할 것 같은 느낌이라서. 」
알 카흐파 의장의 추진력은 남달랐다. 그는 즉시 공익재단을 설립하고 민우를 실행위원으로 선임했다. 그뿐이 아니라 전 세계를 누비며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민우가 한쪽에 놓인 지구본을 돌려보았다.
「 아프리카면 어마어마하게 멀구나. 」
「 부담스러워? 」
「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일정은? 」
「 다음 달 중순 정도로 계획하고 있어. 몸만 오면 돼. 모든 경비와 경호는 우리 쪽에서 지원을 할 테니까. 」
민우가 고개를 끄덕인 반면 연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의견을 냈다.
「 수단이면 남쪽 지역에서 분쟁이 있지 않나요? 조금 위험할 거 같은데······. 」
「 학교를 세운 곳은 안전한 지역이랍니다. 특별히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수단 정부에서도 서포트를 해 줄 거고 우리 쪽 PMC도 동원할 생각이니까요. 」
「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알 카흐파 의장님의 첫 사업 성과인데 내가 참여하지 않으면 의미가 퇴색돼. 아무튼 알았어. 여기까지 와 준 성의를 봐서라도 참석하는 걸로 해야겠네. 」
민우가 반쯤 농을 섞어 답하자 자얀은 호탕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 역시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든다니까! 좋아. 이 소식을 바로 아버지에게 전해야겠군. 」
「 그런데 오프닝 세레머니가 전부야? 」
자얀은 핸드폰을 꺼내려던 손을 멈추며 대답했다.
「 네가 원한다면 다른 프로그램도 가능하지. 역시 프로페서니까 자라나는 꿈나무들을 위해 멋진 강연을 부탁해도 되려나? 」
「 뭐, 안 될 거 있나. 수단에서도 아랍어를 쓰니 말은 통할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우리가 가려는 곳의 토속어 정보를 줄 수 있어? 공부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
「 그 정도야 일도 아니지. 돌아가는 대로 보내줄게. 」
민우는 메일로 부탁한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치의 유품이 있는 이상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것엔 어려움이 없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여유를 되찾은 자얀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 그런데 요즘은 무슨 연구를 이렇게 열심히 하시나? 얼핏 보니 <인문과학총서>는 아닌 거 같은데. 」
「 연구는 아니고 다음 주에 학회에서 발표를 하는데 좀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
「 보통 발표라고 하면 논문 읽고 땡 아닌가? 」
「 보통은 그런데, 이번 토론 상대가 엄청난 사람이거든. 」
「 누구? 」
「 내 학부 때 지도교수님. 지금 박사과정 지도교수이기도 하고. 」
자얀이 흰 이를 보이며 웃었다. 서지훈 교수에 대해서는 민우를 통해서 많이 들었다. 이 시대에 보기 힘든 참된 학자라고.
「 아아, 그 사람.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매달리고 있었군. 」
「 학예회니 편하게 마음먹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글쎄. 기왕 하려는 거면 일을 크게 벌이는 게 좋지 않을까? 」
자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당 민우라면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 모래폭풍이 지나간 밤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하다. 」
「 무슨 소리야? 」
「 예로부터 우리 아랍에미리트에 전해져 내려오는 속담. 왠지 너에게 말해주고 싶은 구절이었어. 」
그런 속담이 아랍에미리트에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그보다 더 잘 빗댄 말은 없을 것 같았다. 민우가 말했다.
「 모래폭풍일지 미풍일지는 가봐야 알겠지. 」
「 미풍이라. 하하하. 대단한 자신감인데? 」
「 우리나라에도 그런 속담이 있거든. 짧고 긴 건 대봐야 안다고.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 」
자얀이 커피잔을 든 채 흥미로운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었다. 아무래도 귀국 일정을 다음 주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 * *
2월 15일 금요일. 여섯 시 정각에 알람이 울렸다.
삐비비빅!
벌떡 일어난 민우는 서둘러 알람을 껐다. 옆에서 자고 있을 수빈이 깨어날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이미 수빈은 일어나 있었다.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불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주방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벌써 일어났어요? 좀 더 자지. 발표는 오후잖아요.”
수빈은 앞치마를 두른 채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우는 반쯤 감긴 눈을 끔뻑이며 식탁에 앉았다.
“미리 가서 준비해야지. 그리고 싫어하는 거 알잖아. 발표 시간에 맞춰서 발표만 하고 나오는 거.”
“하긴. 울 오빠는 열성 학자니까.”
수빈은 콧노래를 부르며 음식 준비를 계속했다. 민우는 턱을 괸 채 그런 수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후 이상함을 느낀 수빈이 뒤돌아섰다.
“왜 그렇게 보고 있어요?”
“그냥. 왠지 이러니까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긴장돼요?”
“안 되면 거짓말이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굴었으면서? 예린이한테 50만 원 줄 때를 생각하라구요.”
민우는 피식 웃었다.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마음 가는 대로 하다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다.
“맞다. 어제 윤이한테 연락 왔는데 윤이도 학회에 견학 온대요.”
“뭐? 요즘 스케줄도 많은 애가 학회엔 왜 기웃거린대?”
“존경하는 우리 형님께서 청출어람을 실현하는 그 역사적인 광경을 놓칠 수 없다나 뭐라나.”
“휴, 시끌벅적해지겠네. 자얀도 온다고 하고. 뭔가 학회가 아니라 이벤트가 되는 느낌이야.”
“그만큼 중요하니까요. 내년에도, 아니 앞으로 10년 후에도 회자될 그런 토론이 되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 100여 년 전 김기진과 박영희가 ‘내용형식논쟁’을 벌인 것처럼, 후학들이 이번 토론을 기억해 주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
“본때를 보여주고 와요. 멋지게 때려눕힌 다음 귓속말로 이렇게 하는 거죠. 서 선생님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하고.”
“그건 좀 심하지 않아?”
장난스레 웃은 수빈이 다 만들어진 음식을 식탁에 올리기 시작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사이좋게 아침을 먹었다.
그렇게 운명의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