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전 (1)
시간이 흐르고 명인대 총장 투표일이 밝았다.
명인대 이사회에서 학생들의 선거권을 확보해 주었으므로, 1학기 기말고사를 앞둔 학생들은 하나둘 강당으로 모여 투표를 진행했다.
학생 대표를 선정해 투표가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재학생 모두 투표한 뒤 총 득표 수에서 일정 비율만 반영하는 방식으로 하게 되었다.
그 비율은 정확히 총투표수의 10퍼센트다.
대학 당국에서는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만큼 비율을 앞으로도 점차 확장해 나가겠다고 발표했다.
명인대 재학생 숫자가 10,000명 정도 되니 학생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표수는 총 1,000표 정도가 된다.
이는 교직원과 교수, 그리고 기타 유권자들을 합친 수와 거의 비슷한 숫자였다.
때문에 학생들은 대학 당국의 결정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자신의 한 표가 당락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에.
그래서 학생들은 생각보다 많이 투표에 임했다.
학생들이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백성웅 총장의 몫이 컸다.
어쨌든 그가 홈페이지나 온라인 메시지 등으로 학생들의 투표권을 확보해 주겠다고 먼저 나섰으니까.
하지만 학생들의 표심은 이미 서지훈 교수 쪽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누구 찍었냐?”
“당연히 서지훈 교수님이지. 교수님 말고 찍을 사람 없잖아.”
“그건 그래. 지금 총장이 한 짓만 생각하면 빡이 친다니까.”
“억울하면 장학금 타든가 해야지. 어휴.”
“나는 대학 재단이 이렇게 무관심한지 이제야 알았다니까?”
“우리가 봉이지 봉.”
학생들은 대학 당국은 물론, 재단까지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됐다.
바로 토론회의 여파 때문이었다.
후보자 토론회 이후로 백성웅 총장의 지지도는 적어도 학생들에겐 수직 낙하했다. 지금까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서지훈 교수의 손에 낱낱이 밝혀졌던 것이다.
때문에 한 번이라도 서지훈 교수의 토론회 장면을 본 사람들은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
이런 확고한 생각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총장 선거에 대해 열띤 이야기를 벌이고 있는 사이, 민우는 연구실에서 1학기 기말고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쯤 어떻게 됐으려나.’
시계를 바라보니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다. 투표는 오후 6시에 마감되고, 바로 개표를 시작하여 저녁 9시 무렵에 최종 순위가 발표된다.
오늘은 서지훈 교수와 연구실에서 저녁을 먹으며 개표방송을 지켜볼 계획이었다.
총선이나 대선처럼 전문적인 방송은 아니지만, 대학 당국은 개표 및 득표 현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영상을 제공하기로 했다.
신문방송학과 홍주희 교수의 아이디어였다.
“긴장되세요?”
“아, 땡큐.”
차민재가 시원한 커피를 내밀었다.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에 사 온 모양이다. 민우가 웃으며 커피를 받았다.
“그러게 말이다. 긴장 안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일이 닥치니 쫄리네.”
“하하하. 다른 사람이 보면 선생님이 출마하신 줄 알겠어요. 정작 서지훈 선생님은 되게 여유로워 보이시던데.”
“네가 어떻게 알아?”
“오는 길에 만났거든요. 밖에서 산책하고 계시던데요?”
“잃을 게 없는 분이잖냐.”
민우가 빨대를 입에 넣었다. 시원한 게 넘어가니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투표하고 왔지?”
“하고 왔어요. 그런데 어차피 학생표는 많지 않잖아요. 10퍼센트만 반영된다고 그러던데.”
“그 정도도 엄청난 거야. 다른 학교는 대부분 반영 비율이 한 자릿수거든. 그리고 재학생이 만 명이 넘는데 그걸 그대로 반영하기도 애매하고 말이지.”
“아직 갈 길이 먼 느낌이네요.”
“민주주의란 그런 거야.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한 길이지.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어야만 하니 그만큼 가치 있는 길이기도 하고.”
“좋은 말씀이네요.”
민우가 씨익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기말 과제는 다 끝냈냐?”
“아. 옙. 논문 세 건 모두 끝냈습니다.”
“가져와 봐.”
차민재가 재빨리 자리로 돌아가서 인쇄된 서류 세 뭉치를 가져왔다.
두께가 꽤 두껍다.
소논문은 보통 A4 15장 내외인데, 20장은 훌쩍 넘어 보였다.
“뭐 이렇게 많이 썼어?”
“막상 수정하다 보니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더라고요. 줄인다고 노력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사족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 검토해 보시게요?”
“그래야지. 어차피 저녁때까진 할 일도 없으니. 너도 볼일 봐. 천천히 읽어볼 테니까.”
“네.”
민우는 잠시 교재를 옆으로 밀어두고 차민재의 논문을 검토했다.
‘이 녀석, 많이 성장했네. 이제 여기에서 한 학기를 보냈을 뿐인데…….’
민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물론, 유물의 능력을 흡수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논문을 써낸 민우의 눈에는 성에 안 차는 논문이었다.
논리적 비약도 간간이 보이고, 잔뜩 힘이 들어간 문장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민우는 긍정했다.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석사 1학기 때의 자신과 비교한다면 정말 뛰어난 논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나를 뛰어넘는 학자가 될 수도 있겠어.’
긍정적인 생각과 함께 부정적인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이런 재목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학문을 하는 것과 제자를 키우는 일은 또 다르다.
학문에 뛰어나다고 해서 훌륭한 스승이 된다는 법은 없다. 지식과 그것을 전수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 좋은 스승이 되는 경우가 많다.
천재들은 범재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민우는 다른 유형의 천재였다.
지능이 뛰어난 것도, 센스가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는 노력의 천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민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서지훈 선생님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멋지게 제자를 키워내야지.’
그렇게 다짐하다 보니, 어느새 논문의 마지막 페이지가 나왔다.
한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논문을 검토했다.
“민재야.”
“네.”
차민재가 재빨리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펜과 노트가 쥐어져 있다.
지도교수에게 논문을 보여준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일이다. 온갖 지적은 다 받아야 하니까.
민우도 그랬다.
지금 차민재가 써온 세 편의 논문은 수업 시간에 발표가 될 거다. 그렇다면 다른 학생이나 교수에게 논박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최소한으로 줄여주고 싶은 마음에 지금까진 부족한 점을 가감 없이 지적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른 지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얘기했던 웹소설 관련 논문은 아주 잘 나온 것 같네.”
“아, 예.”
차민재가 당황했다.
비단 차민재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학원생들은 필연적으로 칭찬에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목마르기도 하고.
“이 논문은 바로 학회에 투고해봐도 될 거 같은데. 가능하면 메이저 학회에.”
“저…… 정말요?”
“누가 들으면 내가 거짓말만 하는 줄 알겠다.”
“아, 죄송합니다. 그런 건 아닌데요. 수정할 시간이 부족해서 많이 허술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웹소설 쪽 논문이 가장 많이 공격받을 것 같았어요.”
“네 말도 맞아. 많이 부족하지. 문장에 힘도 많이 들어가 있고, 논리적 비약이 있는 부분도 있고.”
민우는 잠시 말을 끊고 차민재를 바라보았다.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히 예를 들어,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시를 썼다고 치자. 마치 어른이 쓴 것처럼 성숙한 느낌의 시보다는,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시각으로 쓴 시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논문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논문을 쓰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석사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논문도 있다는 걸 민우는 잘 알고 있다.
재기발랄하면서도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훌륭한 줄글.
적어도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제자가 그런 즐거움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석사 1학기생 차민재라서 쓸 수 있는 논문이 있는 거야. 나는 네가 쓴 세 편 모두 그런 논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럼 세 편 모두 학회에 보내봐도 될까요?”
“그래. 그중 웹소설 논문은 현대문학연구학회에 보내보자.”
“어…… 그 학회는 좀…….”
차민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민우는 웃었다. 현대문학연구학회는 민영환 교수가 회장으로 있는 메이저 학회였다.
“왜. 무서워서 그래?”
“그런 것도 있긴 한데요. 뭔가 평소 선생님의 가치관이라고 할까, 그런 것하고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아서요.”
“뭔데?”
“선생님은 메이저니 마이너니 이런 거 잘 안 따지시잖아요. 내고 싶은 데에 논문을 내시는데, 제 논문을 메이저 학회에 골라서 보내라고 하시는 건 좀…….”
“아, 그렇지. 좋은 지적이네.”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야 이런저런 학회 다 경험해 봐서 문제없지만 넌 지금 굵직한 경험이 필요해. 석사 1학기에 메이저 학회에 논문을 투고한다는 것 자체가 큰 경험이 될 거야. 물론 네가 학부 시절에 KCI급 학회지에 논문을 실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거랑은 또 다른 경험이 될 거다. 이제는 실전이니까.”
차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논문 통과되면 발표도 해야겠죠?”
“처음부터 발표신청을 하는 것도 좋겠지. 민영환 선생님이 기뻐하실 거야.”
“건방지다고 하실 거 같은데.”
“뭐, 겉으로는 그러셔도 알잖아? 속마음 잘 표현 안 하시는 거.”
“들었어요. 서지훈 선생님이 츤데레라고 하시던데.”
“하하하. 딱 그런 느낌이지.”
민우가 논문 세 편을 차민재에게 돌려주었다.
문득 대학원 시절이 생각났다. 몇몇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이면지함으로 논문을 던져넣곤 했는데,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느꼈다.
“그럼 한 편은 현대문학연구학회에 하고, 나머지 하나는 한국근대소설학회에 보내고. 다른 한 편은 현대서사학회에 내겠습니다.”
“응? 현대서사학회는 등재지가 아닌데?”
“어차피 저는 석사 1학기라 등재지든 아니든 상관없잖아요. 등재지에 논문 싣는 건 박사 따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현대서사학회는 이재환과 최민식, 그리고 강예진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신생 학회다. 최근 민우가 많이 도와준 바 있다.
교수 임용 때 주로 평가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논문업적이다.
하지만 논문업적은 보통 최근 3년 이내의 실적만 인정된다.
보통 박사과정 입학 후 졸업까지는 5년 내외의 시간이 걸리니, 석사과정 때의 연구는 실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차민재가 박사 따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민우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신생 학회라 만만하게 본 건 아니고?”
“그런 거 아닙니다. 총무간사로서 학회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그런 거라면 괜찮아. 괜히 의무감에 내는 거 별로 안 좋다.”
“아닙니다. 꼭 내고 싶어요.”
왠지 서지훈 교수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고집이 센 것도 자신을 꼭 빼닮았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 총무간사 논문이니 외부에 따로 심사를 맡기마.”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민우는 제일 듣고 싶었던, 그리고 제일 하고 싶었던 한마디를 꺼냈다.
“한 학기 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다음 학기도 힘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