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1화 (1/120)

폐황후 마리아

강희자매

1화

“아아악!”

갈색 머리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양쪽 시녀들의 손을 억세게 움켜잡았다.

“로랑 양, 조금만 더 힘을 주십시오.”

궁의가 산모의 상태를 연신 확인하며 독려했다. 산모의 침대 맞은편 소파에 선황후 모니카와 황제 헨리, 그리고 황후 마리아가 자리했다. 그 뒤로는 궁정 기록관과 주요 정무대신이 황손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은 황제 헨리였다.

“폐……하!”

진통하는 로랑이 애달픈 목소리로 헨리를 불렀다.

“로랑!”

헨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곁에 있는 선황후 모니카의 눈치를 슬쩍 살피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헨리는 부리나케 로랑 곁으로 달려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낳……아 드릴 거라고요. 폐하의 아이 말이죠.”

랑데스 사람인 로랑은 라스토니아 말이 어눌했다. 어순을 거꾸로 하거나 어법에 맞지 않는 말투로 인해 이곳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거나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헨리는 오히려 그 점에 반했다고 한다.

“아니, 필요 없어. 짐은 로랑만 건강하면 된다.”

유약한 황제는 기어이 정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터뜨렸다. 그 광경을 보며 모니카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그 와중에도 주름진 눈매를 가리느라 공을 들인 화장이 지워질까, 손놀림이 조심스러웠다.

“우리 황제께선 저리도 감성이 풍부하시다니까요. 하긴 10년 만에 보는 후손이니까요. 더구나 사랑하는 여인이 목숨을 바쳐 애를 낳고 있으니 어찌 감동하지 않으시겠어요.”

모니카는 정무대신들 들으란 듯이 기품 있는 어조로 울먹였다.

“안 그런가, 황후?”

선황후 모니카의 시선이 표정 없는 마리아에게로 향했다.

“……로랑 양과 아이가 무사하길 바랄 뿐입니다.”

마리아는 감정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열다섯 살에 헨리 코부르크의 황후가 되었지만, 자신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국혼을 하고 3년간은 부부 사이가 그리 나쁘진 않았다. 랑데스에서 선황후의 조카인 로랑 세라두 백작 영애가 오기 전까지는. 사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잘 모르겠다. 불타는 사랑까진 아니어도 헨리를 좋아했고 그도 자신을 귀하게 여겼다.

“우리 폐하께 죄송스럽지도 않아?”

모니카는 우아한 미소를 띤 채,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쓴소리를 늘어놓았다.

“…….”

짐작건대 제 아버지인 제임스가 제국의 재상이 된 후부터가 아닌가 싶다. 또한 자신이 황후로서 내궁 살림을 맡은 후부터 모니카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래도 처음부터 이렇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는데. 아무리 고귀한 존재라도 돈 앞에선 치졸해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평생 사치와 향락을 일삼던 못된 버릇을 고치고자 했더니 그녀는 제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다 못해, 선황후로서의 품위와 체면마저 내던져 버렸다. 돈 때문에 막무가내로 구는 건 뒷골목 선술집의 여주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 모친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는 헨리로 인해 한 가족임에도 황제와 황후의 세력은 정적이 되어 서로에게 날 선 칼날을 겨누는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황후는 참 염치도 없어. 애도 못 낳는 석녀 주제에 제 아비의 권세만 믿고 기세등등하니 말이야.”

‘석녀’.

마리아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았다. 10년간 궁 안팎에서 수없이 들어 온 터라 이골이 날 만도 한데, 들을 때마다 손톱으로 제 가슴을 할퀴는 듯 아팠다.

“제 아버지께서 이번에는 무슨 일을 반대하셨나요? 선황후 전하의 정부에게 부당한 작위를 내려 주지 말라, 하시던가요? 그런 거라면 합당하다 여기는데 말이죠.”

마리아는 기품 있는 미소를 지으며 모니카를 향해 일침을 가했다. 그녀가 자신의 정부들에게 뿌리는 화대를 국고에서 내줄 수는 없는 상황.

“뭐?”

“선황후 전하의 정부가 어째서 제국민의 세금으로 호의호식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정부를 갈아 치우시는 그 남성 편력은 어쩌고요?”

마리아의 쓴소리에 모니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마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언제까지 네가 겁도 없이 짖고 까불 수 있을까? 네 아버지 제임스 공작, 리베리오 교황이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는 병신 주제에?”

‘병신?’

아이를 못 낳는 자신을 조롱하려는 심산일 터. 저렇게 저속한 여인이 황족이라니. 유구한 역사를 지닌 라스토니아 제국 황실의 지엄한 법도, 황족 여인의 교양과 기품 역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소름 끼치도록 저급한 삼류 치정극만 남았을 뿐이다.

“그 병신이 선황후 전하의 세금 낭비를 열심히 막고 있지요.”

“뭐야?”

모니카가 버럭 고함을 지르던 찰나였다. 로랑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산실을 울렸다. 얼마 뒤 들려온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정무대신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순간 산실은 찬물을 끼얹은 양 조용했다. 모두 숨을 죽인 채 궁의의 반응을 살폈다.

“황자님이십니다!”

“뭐? 황자?”

궁의의 말에 모니카가 흥분하여 대꾸했다. 하지만 정무대신들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궁의, 말을 가려 하시오. 일개 정부가 낳은 사생아를 황자라 칭하다니요. 이 자리에 황후님께서 버젓이 자리하고 계시거늘!”

정무대신들이 혀를 차며 궁의의 실언을 나무랐다.

“시끄러워! 다 꺼져 버려! 이, 영감탱이들아!”

예상대로 헨리가 난리를 치며 정무대신들을 산실에서 쫓아냈다. 산실에 네 사람만 남자, 그는 가슴을 들썩이며 마리아를 향해 다가왔다.

“이혼해 줘.”

“……!”

마리아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양 얼얼했다. 순간, 10년 전에 막 헨리와 마음을 나눌 때가 떠올랐다.

[마리아, 사랑해. 너 아닌 다른 여자를 황후로 생각해 본 적 없었어.]

참 얄궂기도 하지, 어째서 그날의 기억과 교차하는 것일까. 제국 최고의 남자였던 헨리 코부르크, 수도의 귀족들은 자신과 그를 일컬어 세기의 연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폐하, 저…… 아직 젊습니다.”

마리아는 가슴에 맺힌 설움을 토해 내듯 대답했다.

“황후가 젊지 않아도, 석녀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내겐 로랑이 낳은 아이가 아니면 필요 없단 말이야.”

[나는 모든 신께 맹세할 수 있어. 마리아를 내 아내로서 평생 사랑하며 지켜 주겠다고 말이야.]

[고마워요, 헨리. 저도 라스토니아의 황후로서, 그리고 헨리의 아내로서 최선을 다할게요.]

마리아는 울분이 솟구치려는 것을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그때 헨리가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리아는 잠시 눈앞이 어지러웠다. 헨리가 제게 청혼할 때 빼고는 무릎을 꿇어 본 적이 없건만, 다른 이유로 그 광경을 또 볼 줄이야.

“이혼해 줘. 마리아.”

“진심이라니까요? 헨리와 내 사랑 말이죠.”

그러자 침대에 누워 있던 로랑이 아등바등하며 일어나 그와 똑같이 애원했다. 웃기지도 않은 말투에 어울리지 않는 눈물까지 흘리는 로랑을 보자 마리아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저런 독종 같으니라고, 황실의 유일한 후손이 사생아가 되든 말든 제 집안의 권세만 탐하는 꼴이라니.”

당연히 모니카의 입에선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마리아는 몸에 지진이 난 것처럼 떨다가 돌아섰다. 그러곤 짧게 대답했다.

“이혼은 안 됩니다.

아이를 못 낳아서 이혼당한 황후라니, 제 친정 가문에 그런 수치스러운 기록을 남겨 줄 순 없었다. 무엇보다 궁의도 확인해 주었다. 자신은 석녀가 아니라고. 그저…… 헨리와의 사이가 소원해져서 그럴 뿐이지.

그때 낸시가 득달같이 달려와 휘청거리는 마리아를 부축했다. 그녀가 막 산실을 나가려던 차였다. 마리아의 등 뒤에서 칼날같이 날 선 말들이 쏟아졌다.

“갈 데까지 가 보자는 거야? 짐은 라스토니아의 황제다. 그까짓 황후 하나 쫓아내지 못할 것 같아? 애도 못 낳은 주제에 탐욕만 그득해서!”

마리아는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들어야 할 말이 없기에, 멈췄던 발길을 재촉했다. 한데 또다시 헨리가 그녀를 불렀다.

“마리아 스튜어트, 내가 참고만 있을 것 같아?”

그제야 마리아는 천천히 뒤돌아 헨리를 바라봤다. 자신을 향해 부릅뜬 눈과 잘생긴 얼굴에 이제껏 보지 못한 살기가 형형했다.

* * *

침실의 창으로 들이치는 달빛이 요즘 헨리의 얼굴에 드리운 살기처럼 섬뜩했다. 로랑이 아이를 낳은 지도 100일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아이의 호적 문제로 갈등이 많았고 이제는 끝을 낼 때가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맡에 놓은 검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침의조차 입지 않은 채였다.

‘바로 오늘이 그날인가.’

비극의 절정, 애증의 막바지…….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제 바스러질 듯한 영혼이 오늘 밤에 벌어질 참담함을 일깨워 주었다. 언제부턴가 궁정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감지했다. 언제든 큰일이 일어나고야 말겠지 싶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 밤 같았다.

“황후님.”

“낸시, 아버지께 연통은 넣었지?”

“예……? 그럼요.”

낸시가 놀랐는지 머뭇거리다 겨우 대답했다.

마리아는 일찍이 낸시를 통해 제 친정에 소식을 알렸다. 언제 헨리의 병사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황실의 깃발이 펄럭여도 절대 성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낸시가 마리아의 손을 부여잡은 채 울자, 그녀는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낸시, 이 미련한 것아. 나와 있으면 봉변을 당한대도.”

마리아는 낸시도 친정으로 몰래 빼돌릴 생각이었다. 저로 인해 자매처럼 지낸 그녀마저 위험하게 만들긴 싫었다. 하지만 낸시는 기어이 생사를 함께하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때 침실 문이 열리며 호위대장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황후님, 피하십시오. 근위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가자, 낸시!”

마리아는 검을 든 채 침실을 뛰쳐나왔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귀족 영애로서 갖춰야 할 소양과 황후 교육을 함께 받았다. 그 교육 중에 검술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암살에 대비한 최소한의 교육이었으나 아버지는 의외로 검술에 소질이 있는 제 여식을 위해 좀 더 고난도의 검술을 가르쳤다.

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검술을 사용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마리아의 가슴에 씁쓸함이 차올랐다.

그녀가 나오자 호위대가 일사불란하게 주위를 엄호했다. 당장 이 길로 황궁을 빠져나가 아버지께 가야지. 물론 헨리가 그쪽에도 손을 썼겠지만, 스튜어트가의 병력도 만만치는 않았다. 게다가 미리 언질을 주었으니, 아버지도 대비하고 있을 터.

이렇게 무력으로 황제에게 대항하고 싶진 않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와 부딪쳐야 한다면 승리할 수밖에.

‘나는 라스토니아의 황후야.’

그녀는 유서 깊은 가문 스튜어트가의 공녀이며 라스토니아 제국의 황후라는 명예를 목숨처럼 여겼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황후의 호위대와 황제의 근위대가 맞부딪쳤다. 제국의 태양과 달을 지켜야 하는 신성한 존재들이 서로의 피를 보며 싸우는 광경,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검을 든 헨리가 있었다.

“마리아 스튜어트!”

그는 단숨에 달려와 마리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까만 밤을 찢었다. 마리아와 헨리의 검이 섬광을 내며 서로를 공격했다. 여인의 검술이라 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실력, 헨리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짐은 네가 이래서 싫어. 뭐든 짐보다 잘해야 직성이 풀리지. 고분고분한 맛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그러셨습니까?”

마리아는 그의 검을 받아 내며 간신히 대답했다. 언제는 강단 있는 여인이 좋다더니. 남자의 사탕발림이란 이토록 부질없는 것을.

“그거 아나? 제임스 스튜어트는 반역을 저질렀다. 짐을 암살하려 했단 말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순간 마리아의 검이 흔들렸고, 헨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리아가 쓰러지자 득달같이 그의 검이 목을 겨눴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곧 알게 될 거야. 이 반역자의 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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