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밤새 벌어진 황제와 황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마리아는 헨리에게 패배했다. 그녀는 결박당한 채 심문장으로 끌려갔다. 물론 황후를 따르는 모든 세력도 함께 연행되었다. 마리아는 심문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허탈한 웃음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죄인의 신분으로 이곳에 올 줄이야.
역시 상석에는 그들이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선황후 모니카와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로랑, 그리고 헨리와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자리했다.
“제임스 공작이 짐을 시해하려 했던 증좌가 여기에 있다.”
헨리는 죄인석에 앉은 마리아를 향해 종이 한 장을 던졌다. 그리고 그 낱장의 종이에는 분명 제 아비의 필적과 스튜어트 공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대략 내용은 라스토니아의 무능한 황제 헨리 코부르크를 퇴출한 뒤, 제 딸 마리아를 여황제로 옹립하자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일색이었다. 이 웃기지도 않은 촌극에 가담한 사람들을 면면히 바라보던 마리아는 욕지기가 났다.
“재상이 욕심이 과했지. 제 딸을 허수아비 황제로 세워 놓고 자기들끼리 라스토니아 제국을 마음대로 주무르겠다는 거잖아.”
모니카가 부채를 팔랑거리며 마리아를 조롱했다. 그에 질세라, 로랑의 갓난아기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배고파? 쮸쮸 먹고 싶은 거지?”
로랑은 아무렇지도 않게 젖을 꺼내 아기에게 물렸다. 마치 마리아에게 보여 주듯이. 그러곤 어설픈 제국말로 마리아를 향해 떠들었다.
“애도 못 낳는 여자는 못 해, 아무것도. 황제는 남자가 하는 거죠. 여자들은 귀염받으며 꽃처럼 사는 건데.”
로랑의 말에 마리아는 실소를 터뜨렸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저 외국인 여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로랑, 훗날 너보다 헨리의 아이를 많이 낳는 여자는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거고, 귀여움도 많이 받겠구나.”
“너무해. 심한 말을 왜 하는 거죠?”
로랑이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심한 말이 아니라, 네 논리대로라면 여자는 사랑받으려면 평생 애만 낳으면 되겠어. 그러니 당장 내일부터라도 부단히 노력하도록 해. 쉬지 않고 애를 낳으란 말이다.”
“닥쳐!”
로랑을 향한 마리아의 일침에 헨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마리아는 지지 않고 또박또박 받아쳤다.
“그러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마리아는 상석에 앉은 인간들을 두루두루 살피며 일갈했다. 특히 헨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애를 못 낳는 여자도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어야 했는데 말이지.”
“뭐야!”
마리아의 발언에 사람들이 동요했다. 그녀의 말에 분개한 모니카가 허둥대며 상석에서 내려와 부채로 마리아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이 건방진 년이 드디어 역심을 드러내는구나!”
마리아는 모니카가 때리는 대로 맞았다. 그녀는 오로지 제 아버지가 어서 달려와 이 말도 안 되는 모략을 종식시켜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헉헉- 모니카는 머리가 헝클어질 정도로 마리아를 때리곤 숨을 헐떡였다.
“황후님!”
곁에서 마리아의 참혹한 모습을 지켜보던 낸시가 울부짖었다. 도자기 인형처럼 맑았던 그녀의 얼굴이 온통 생채기로 가득했다.
“낸시, 나는 절대 부정한 세력에게 고개 숙이지 않아.”
마리아는 모니카를 경멸하는 듯한 얼굴로 제 할 말을 다 했다.
“부……정한 세력?”
눈이 뒤집힌 모니카가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이내 한 병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마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헨리가 다가가 모니카를 겨우 떼어 놓았다.
“엄마는 좀 빠져 있어요, 제발! 내가 황제라고……!”
“헨리, 저년이 나한테 부정한 세력이라 했단 말이야!”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요. 그러니 그냥 좀 계시라고요.”
헨리는 모니카의 행태가 답답했다. 그는 모니카를 한옆으로 끌고 가 나직한 어조로 잔소리했다. 마리아를 자극할수록 본인의 치부만 드러날 뿐인데, 감정에 치우쳐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그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건만.
헨리가 표정을 바꾸며 대주교를 향해 눈짓을 하자, 대주교는 두루마리 종이를 든 채 앞으로 나왔다.
“우리 라스토니아 제국은 이 시간 이후로 교황청과 관계를 끊을 것이며 제국민을 위한 종교를 만들 것이다. 또한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했던 스튜어트 공작가는 멸문한다.”
대주교의 말이 떨어지자 심문장의 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두 구의 시신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마리아는 그 시신이 제 앞에 놓이는 순간에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이 제 부모의 시신인 줄.
“짐은 반역죄인 제임스 공작과 그 가신들을 처단했다.”
헨리의 말에 마리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그제야 처참한 시신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멍하니 앞만 응시하다가 천천히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설마……!’
저 시신이 아버지와 어머니일 리 없다. 한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길함이 그녀의 심장을 때렸다.
“불을 지른 거야?”
마리아는 넋이 나간 얼굴로 헨리에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시신이 심하게 타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검게 그을린 손에 차고 있는 공작의 반지와 가문의 목걸이. 평소 어머니가 아꼈던 진주 반지와 팔찌가 어젯밤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두 구의 시신이 입은 옷은 자신이 선물한 남대륙산 양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마리아의 부름에 황후의 궁인들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헨리,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마리아가 헨리를 보며 묻자.
“마리아, 네가 자초한 일이야. 처음부터 순순히 이혼해 줬으면 좋았잖아?”
“뭐? 그래서 내 부모님을 이렇게 했다고?”
“정신 차려! 마리아! 짐은 황제고, 너의 아비는 짐을 시해하려 했던 반역자였다.”
“거짓말!”
마리아가 소리를 지르자, 헨리는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다들 똑똑히 보아라! 반역자의 비참한 말로를! 황제를 시해하려 한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헨리는 검을 들고 시신을 향해 성큼 다가가, 가차 없이 내리쳤다.
“꺄아악! 안 돼!”
마리아의 절규에도 헨리는 제임스 공작과 엠마의 목을 쳤다. 태워 죽인 것도 모자라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시신을 처참히 능욕한 것이다. 그때 상석에서 황제를 따르는 귀족들이 소리쳤다.
“폐하, 반역자의 딸을 처단하십시오!”
“살려 두어선 안 됩니다.”
하지만 헨리는 머뭇거렸다. 그는 스튜어트 공작 부부의 목을 치고 스스로도 놀랐는지 정신이 혼미해 보였다. 그러자 모니카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내려와 헨리의 검을 빼앗았다.
“내가 죽일 거야!”
그녀는 악에 받쳐 마리아를 향해 검을 추켜올렸지만, 마리아는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그때였다. 심문장의 문이 열리며 홧홧한 열기와 북쪽 황무지의 흙과 바람이 밴 냄새가 몰아쳤다.
“저들은?”
곧 문 앞을 꽉 채우는 붉은 인영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붉은 군대’.
그들이 전장에 출몰하면 지옥의 군대마저 벌벌 떤다는 악명 높은 존재. 살면서 저들을 실제로 볼 줄이야. 그것도 라스토니아 궁정에서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헬랜드 붉은 군대 맞죠?”
귀족들은 한둘씩 말문을 열었다.
“맞아요. 쯧쯧, 말세구먼. 어찌하여 저자들이 여기까지……!”
헬랜드는 여러 나라에 흩어져 활동하던 용병들이 모여 건립한 나라였다. 대륙의 모든 황실에선 야만국이라 치부하며 나라 취급도 하지 않고 깎아내리지만, 이젠 그들의 용맹함과 천문학적인 부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여전히 그들에게 배타적인 사람들은 존재했다.
“사……람 맞아?”
“야만스러운 이교도들 같으니.”
“그러게, 비천한 것들이 언제부터 신성한 라스토니아 황궁에 함부로 들어왔다고?”
“말조심해요. 붉은 군대잖습니까?”
특히 그들은 전쟁과 돈에 관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아무래도 라스토니아 황실과 돈 문제로 얽힌 것이 있는 듯했다. 사실 라스토니아뿐만 아니라 대륙 여러 나라의 황실과 귀족 가문들이 헬랜드에서 급전을 빌려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제때 갚지 못하면 살벌한 붉은 군대가 직접 나서게 되고, 그리되면 없던 돈도 갑자기 생겨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분분했다.
“헬랜드의 대왕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던데, 이렇게 여기까지 오다니.”
귀족들은 미심쩍은 눈으로 일제히 헨리를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붉은 군대로 돌렸다. 특히 용의 가면을 쓴 건장한 사내에게 모든 시선이 쏠렸다. 칼날 같은 비늘 갑주를 걸치고 흉포한 무기로 무장한 남자.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일반 병사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좌중을 압도하는 존재감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모두 말문을 닫은 채 헬랜드 대왕과 헨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굳이 오……시었소? 연통을 넣으려 했더니.”
헨리는 사색이 된 것도 모자라 말까지 더듬었다.
“빚을 받으러 왔다.”
대왕의 목소리는 위압감이 넘쳤다. 그의 시선이 혼란스러운 심문석 쪽을 훑었다.
“혹여 빚 갚을 날짜를 잊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