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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3화 (3/120)

3화

말로는 빚을 받으러 왔다면서 정작 군터의 발길은 마리아를 향했다. 제 부모의 시신 옆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마리아는 처참하게 사냥당한 백조 같았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황후님.”

낸시와 그녀의 궁인들이 마리아 곁에서 울다가 머리 위로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우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오! 신이시여!”

낸시를 비롯한 궁인들은 각자 감탄사를 연발하며 물러섰다. 앉아서 위를 쳐다보니 붉은 용 가면을 쓴 남자는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석상 같달까. 그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숨통을 조여 왔다.

“비켜라.”

그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으나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군터는 천천히 커다란 몸을 아래로 굽혔고 모든 이들은 그 광경을 느린 시선으로 좇았다. 그러곤 제각기 떠들어 댔다.

“군터 플레이슬리, 저자와 황후가 아는 사이였나?”

“그럴 리가! 스튜어트 공작가 자존심에 저리 비천한 인간과 어울렸을 리 없지.”

“오래전에 수도에 돌던 소문이 하나 있었죠. 스튜어트 공작이 노예 출신의 용병을 도와줬다나 뭐라나.”

“에이, 그자가 그자일 리 없잖아요?”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 사람들은 현실감이 없는지 모두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용병들이 우연히 버려진 헬랜드에 갔다가 그곳에서 엄청난 양의 마석과 황금을 발견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들이 왕국을 세우고 지독하게 노력하여 삶의 터전을 일군 것에 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운이 억세게 좋은 인간이구먼.”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마석과 황금이 넘쳐나도 헬랜드에서 어찌 살겠소?”

“그럼요. 짐승들과 함께 사는 것과 마찬가지지.”

“돈이 다는 아니에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명예와 품위가 목숨 같은 것을요.”

“근데 저자가 요즘 여러 황실의 명예와 품위를 돈으로 짓밟아서 문제라죠?”

“쯧쯧, 세상이 어쩌다가 저런 야만적인 것들이 돈으로 활개를 치게 됐는지.”

“그러게 말입니다. 땅이 아까워요.”

헬랜드의 발전이 진실인들,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중요한 건 헬랜드라는 보석 같은 땅을 여러 황족과 귀족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이 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은 군터 플레이슬리가 비천한 인간답게 그곳에서 나온 돈으로 고리대업을 하여 부를 축적했노라 비하하느라 바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군터가 각 왕국에서 핍박받는 농노나 노예들을 돈으로 해방시켜 준 뒤, 헬랜드로 이주하게끔 한 일에 관해선 겁박하여 사람들을 납치했다는 흉흉한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내 눈이 잘못된 것인지 몰라도, 군터 저자가 손을 떨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게, 정신을 잃은 황후를 보고 손을 떨고 있구랴.”

귀족들만큼 놀란 사람은 헨리였다. 군터가 갑자기 나타나선 마리아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다니. 자신이 알고 있는 군터는 대륙을 호령하는 강대국의 황제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작자였다. 그뿐인가, 모두가 현신이라 칭송하는 리베리오 교황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던 기억이 생생했다. 사리 분별 못 할 정도로 무식한 인간이 고작 마리아 앞에서 절절매는 꼴이라니. 헨리는 실소를 터트렸다.

역시 미리 전해 들은 말에 신빙성이 있었다. 군터가 쓰고 있는 용 가면 뒤의 얼굴이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마리아를 지독하게 열망하는데도 정작 그녀의 몸엔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사내. 그건 필시 제 심장을 가득 채운 욕망이 한도를 초과한 탓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야만인이 여자 하나를 두고 벌벌 떨 리가 없었다.

“열 개.”

군터가 한참 만에 내뱉은 말이었다. 곧 낸시의 시선이 그와 마리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마도 마리아의 얼굴에 난 생채기의 수를 센 듯했다.

“누구지?”

그의 물음에 낸시는 저 멀리 상석에 있는 모니카를 응시했다. 그러자 군터는 몸을 일으켜 모니카를 향해 다가갔다.

“왜 나한테 와?”

모니카는 부채를 펼쳐 제 얼굴을 반쯤 가렸다. 보고 있기만 해도 사람 같지 않아서 소름이 끼치는 판국에……. 그녀는 겁에 질려 덜덜 떨었다.

“저 여자 얼마면 되겠나? 황제.”

군터는 모니카를 보며 질문은 헨리에게 했다.

“무례하오. 저분은 짐의 모후 되시오.”

“황제의 어미?”

순간 군터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모니카를 향했다. 섬광과 함께 칼날이 번쩍이더니 그녀가 들고 있던 부채가 반으로 뚝 잘려 나갔다. 그제야 헨리는 군터가 모니카의 값을 왜 물어봤는지 이해했다. 자신이 값을 말했다면 모니카의 목은 지금쯤 바닥을 굴러다녔을 터. 물론 모니카의 목은 무사했다. 대신 모니카의 정신이 검에 잘려 나갔는지, 그녀는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쓰러졌다.

“선황후 전하!”

궁인들이 뛰어와 모니카를 부축했다.

“군터, 이게 무슨 짓이오?”

헨리가 버럭 화를 내자, 군터의 커다란 손이 그의 멱살을 거머쥐곤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은 기함하며 입을 떡 벌렸다.

“윽!”

헨리는 숨통이 끊어질 듯 고통스러운지 연신 발을 버둥거렸다. 마침 황실 근위대가 군터를 향해 일제히 검을 겨누자, 붉은 군대가 또다시 그들을 둥그렇게 포위했다. 언제 혈전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

“1000만 골드, 갚아라.”

“!?”

1000만 골드를 당장 갚으라니. 헨리는 눈앞이 아득했다. 군터는 돈을 갚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보복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채무자의 장기를 발라 버리거나, 그 왕국의 유서 깊은 보물을 가져간다든지, 섬 하나를 빼앗든지, 손해날 짓은 절대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한데 문제는 당장 1000만 골드를 갚을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만 말미를 주시오.”

헨리는 숨통이 조여 와 낯빛이 붉어졌다. 이마의 심줄이 터질 듯이 돋아나고 황제의 체면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지를 버둥거렸다.

* * *

치솟는 불길에 휩싸여 죽어 가는 두 사람. 무도한 병사들의 칼날이 제임스와 엠마의 몸을 난도질했다.

‘아악!’

두 사람은 제대로 저항조차 못 한 채 황제의 병사들에게 죽음을 맞이했고, 마리아는 그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며 비명만 질렀다.

‘아버지! 어머니!’

마리아는 미친 듯이 아우성을 쳤다. 당장 달려가 두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이 저주스러운 몸뚱어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악! 안 돼!’

그때 검을 든 헨리가 달려와 제 부모의 목을 사정없이 쳤다. 두둑- 목이 떨어지며 사방으로 검붉은 피가 튀었다.

‘차라리! 나를 죽여!’

마리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부모가 눈앞에서 무자비하게 도륙당하는 참혹한 광경이라니. 심장이 칼로 난도질당하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 터.

‘헨리! 이 악독한 인간! 넌 사람도 아니야!’

마침 마리아가 정신을 차리자 누군가가 마리아의 멱살을 거머쥔 채 흔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제 부모를 죽인 원수 헨리 코부르크였다.

“윽!”

마리아의 머리가 줄기가 꺾인 코스모스처럼 힘없이 흔들렸다.

“마리아, 군터랑 아는 사이라며? 그럼 가서 사정해. 1000만 골드 못 갚으니까 3년만, 아니 1년 만이라도 시간을 달라고 부탁해 보란 말이야!”

군터 덕분에 마리아가 감옥살이는 면했으나, 그녀는 지금 몸도 마음도 온전치 못했다. 그런 사람을 저렇게 목이 떨어져라 흔들어 대는 꼴이라니.

“고정하세요. 어떻게 황후님께 이다지도 모질게 구시는데요?”

곁에서 더는 보다 못한 낸시가 그를 말렸다.

“넌 비켜!”

함께 온 모니카가 낸시를 거칠게 밀쳤다.

“오호라! 이제야 알겠네.”

모니카가 황당한 어조로 말하자, 헨리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엄마, 뭐가요?”

“저 붉은 짐승 놈들이 딱 맞춰서 나타난 게 이상하잖아.”

“그건 황실의 빚 때문에…….”

헨리는 답답했다. 모니카가 마리아 모르게 쓴 돈이 다 군터한테 빌린 돈인 것을.

“아니, 굳이 빚을 왜 지금 받으러 오느냐고? 게다가 마리아, 이것과 연관 있는 것도 수상해. 필시 저 남자를 끌어들여서 황궁을 손에 넣으려 했던 거, 아니겠어?”

모니카의 말에 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녀다운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삼류 소설을 쓸 때가 아니었다. 당장 군터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면 크게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착하지, 마리아. 군터한테 잘 부탁해 봐.”

헨리는 가까스로 감정을 자제하며 말했다.

“그럼 짐이 네 목숨만은 살려 줄게. 응?”

헨리의 거듭되는 설득에도 마리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제발! 그만!’

낸시는 헨리를 야속하게 바라봤다. 그러나 자신도 오롯이 그를 원망만 할 수도 없는 처지.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마리아!”

“어……. 억”

마리아는 연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정작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낸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리아를 세심하게 살폈다. 풀린 동공과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혀. 아무래도 이상했다. 때마침 모니카의 입꼬리가 삐뚤어지며 독한 말을 쏟아 냈다.

“이제 이 병신이 말도 못 하는 거야? 아주 쓸데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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