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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4화 (4/120)

4화

헨리는 부산스럽게 집무실을 서성였다. 당장 동이 트면 군터는 돈을 내놓으라 겁박을 할 텐데. 마리아와 친분이 있는 것 같아서 기대했건만,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니, 친분이 있다손 쳐도 1000만 골드면 얘기가 달라지지. 애초에 탕감은 꿈도 꾸지 않았다. 마리아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가로 유예기간을 얻어 볼 요량이었지. 그런데 그녀가 말을 못 할 줄이야.

‘설마 충격 때문에 말을 못 하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듯싶었다. 아무리 강단 있고 정신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제 부모의 처참한 죽음 앞에선 태연하기 힘들지. 아니지, 지금 마리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내일 군터에게 합당한 이유를 말해 주지 못하면 놈은 아마도 제 손가락 하나라도 잘라 가려 할 테니까. 돈 앞에선 귀족도 황제도 없는 안하무인인 짐승인 것을. 그때 로랑이 헨리를 찾아왔다.

“폐하, 할 수 있겠죠? 내가?”

그녀는 진하게 화장을 하고 상체를 과하게 노출하여 가슴이 반쯤 드러난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났다.

“뭘?”

“로랑, 예쁘죠?”

그녀는 헨리 주위를 드레스 자락을 펼친 채 나비처럼 돌았다.

“미인계라도 쓰겠다는 거야?”

헨리가 버럭 화를 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남자한테 몸까지 던져서 구걸한다고? 그건 제 마지막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아니, 로랑은 폐하 거. 하지만 남자는 예쁜 여자 좋아하죠? 로랑이 부탁할게요.”

그녀는 어설픈 라스토니아 말로 자신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군터에게 굳이 몸으로 부탁하지 않아도 제 미모면 어떤 남자도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노라 설득했다. 그리고 헨리는 로랑의 말에 어느 정도 설득을 당한 터였다.

마리아는 아름답긴 했지만 나긋나긋하거나 유연한 구석이 없었다. 언제나 황실 법도를 따지며 매사 고지식하게 굴어서 남자를 피곤하게 만드는 반면 로랑은 입 안의 혀처럼 굴며 비위를 잘 맞췄다. 무엇보다 남자의 욕정을 부추기는 교태는 단연코 로랑이 우월했다.

“내일 그 사람이 폐하 귀를 쓱싹하면 어쩌죠?”

“뭐?”

“급한 물부터 먹어야죠.”

“급한 불부터 꺼야지가 맞아.”

“아잉, 실수.”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실수에 얼굴을 붉히며 무안해할 만도 한데, 로랑은 특유의 매력으로 오히려 보는 이를 웃음 짓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게다가 이리도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는 저마저도 허리 쪽에 피가 쏠리며 아랫도리가 묵직해졌다.

‘어차피 그 짐승 새끼도 사내잖아.’

신전 앞을 지키는 석상이 아닌 다음에야 로랑 같은 여자를 마다할 리 없다. 게다가 지금은 유치하게 질투할 때가 아닌 것을. 로랑의 말대로 내일이 오면 자칫 놈의 칼에 제 귀나 손가락이 잘려 나갈지도 모를 터. 로랑의 미소 한 번에 빚 상환을 유예할 수 있다면 큰 고비는 넘길 수 있을 터였다.

“그래, 다녀와. 로랑의 협상 능력을 믿어 보지.”

헨리의 시선이 붉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몸을 훑어 내렸다.

* * *

로랑은 술을 들고 군터의 침실로 향했다. 그 앞에는 붉은 갑주를 걸친 전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다행히 로랑의 곁에 있던 시종장이 잘 설명하여 군터의 침실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드디어 로랑이 문을 열자, 그녀의 눈앞에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다. 군터는 천장에 달린 설렁줄을 잡고 운동하고 있었다. 구릿빛 등 근육에 그와 딱 어울리는 용 문신,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꿈틀대며 용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팔뚝에 돋아난 심줄과 우람한 어깨를 보노라니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로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태어나 저토록 완벽한 몸은 처음이었다. 근육 없이 홀쭉한 헨리의 몸과는 비교 자체가 되질 않았다.

“음음.”

자신이 들어왔음에도 군터가 운동에만 매진하자 로랑은 일부러 소리를 냈다. 이내 군터는 하던 것을 멈춘 뒤, 천천히 뒤돌아섰다.

“……!”

로랑은 용 가면을 벗은 군터의 민낯을 보곤 충격에 휩싸였다. 고압적인 말투와 성격이 극단적이고 포악하다는 소문만 듣고 실제 얼굴도 흉측할 줄 알았다. 한데 신비한 청록빛 눈동자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 건강해 보이는 안색, 일자로 굳게 다문 도톰한 입술이 특히 육감적이었다. 헨리도 미남이긴 하지만, 군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태어나 만난 남자 중에 가장 잘생겼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가져왔어요, 술.”

로랑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누구냐?”

“로랑 세라두.”

교태가 흠뻑 묻은 목소리가 간드러졌다. 그녀는 크리스털 잔에 포도주를 쪼르르 따라 군터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 그의 시선이 제 몸을 훑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세상에 어떤 남자가 이런 육감적인 몸을 마다할까. 더욱이 저리도 활력이 넘치는 몸이라면 자신을 욕정하지 않고는 못 배기지. 로랑은 군터를 향해 우아하게 술잔을 건넸다.

“드세요.”

로랑이 화사하게 웃으며 술을 권하는데도 군터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몸만 보면 술을 들통째 마실 것 같은데. 어울리지 않게 술을 안 마신다니.

“내가 마시면 되죠.”

로랑은 다소 놀라긴 했으나 여유 있게 대꾸했다. 그녀는 포도주 한 모금을 마신 뒤, 군터를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부탁 들어주세요. 1년 있다가 1000만 골드 갚을 수 있대요.”

“본디 사람의 말처럼 신뢰가 안 가는 것도 없지.”

군터는 단호했다. 이제껏 돈을 빌려줌에 있어서 사람의 말은 절대 믿지 않았다. 담보와 공식적인 문서 없이는 단 한 푼도 빌려주지 않았고, 만기가 돌아왔는데도 갚지 못하면 만기일부터 하루씩 지날 때마다 이자를 책정했다.

“음, 어떻죠? 저는?”

“?”

“예쁜 담보.”

로랑은 군터를 향해 성큼 다가가 손가락으로 그의 탄탄한 가슴을 문질렀다. 사실 교태 몇 번으로 어렵지 않게 목적을 이룰 거라 여겼는데,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세상 어느 남자가 잘 익은 과실처럼 농염한 여자를 마다할까. 한데 군터의 검지가 로랑의 이마를 거세게 밀었다.

“앗!”

로랑은 자신을 밀어내는 그의 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냄새난다.”

“냄새?”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지? 오기 전에 향수로 목욕하다시피 했는데. 남자가 발정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향수로 특별히 골라서 뿌렸다. 한데 그의 잘난 미간이 일그러지고 눈동자에는 거부감이 가득했다.

“젖비린내.”

그제야 로랑은 제 앞섶이 흥건하게 젖었음을 인지했다. 포도주는 겨우 한 모금을 마셨건만 수치심에 목까지 벌게졌다.

“가서 애한테 젖이나 먹이지.”

살면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 온몸이 벌게진 로랑이 도망치다시피 군터의 방을 나가려는 찰나, 그가 로랑을 멈춰 세웠다.

“엄마는 술 마시면 안 되는 거, 모르나?”

“?”

“술 마시고 젖 먹이면 아기 머리통이 붓거든…….”

로랑은 끝까지 자신을 모욕하는 군터를 매섭게 쏘아보곤 방을 나섰다.

* * *

마리아는 밤새 같은 악몽에 시달렸다. 낸시가 아무리 그녀를 불러도 대답은커녕 영혼이 빠진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에는 마리아가 일부러 말을 하지 않는 줄 알았다. 하지만 죽은 부모님의 이름을 부를 때 확신했다. 그건 누가 들어도 짐승의 울부짖음이지, 사람이 사람을 찾는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황후님, 불쌍해서 어떡해.”

낸시는 마리아를 끌어안고 같이 울었다. 동이 텄으니 헨리는 마리아를 반역죄인이라며 교수형에 처할 터.

‘죄송해요, 황후님.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낸시는 마리아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어차피 그녀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닐 테니까. 차라리 이 정도에서 정을 떼는 편이 현명했다. 단언컨대 마리아는 살아서 숨 쉴수록 더 망가질 터였다. 누구보다 부모님과의 정이 깊었던 그녀는 그들의 죽음을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그때 마리아가 낸시를 툭툭 쳤다.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어……. 어으.”

낸시의 물음에 마리아는 열심히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마리아도 그런 저 자신이 답답했는지 손으로 연신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했다.

“붓이요?”

“아……. 어.”

마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낸시는 답을 찾았는지 다시 물었다.

“펜? 교황께서 주신 펜이요?”

“으……. 으.”

그제야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다섯 살 때 교황 리베리오에게 선물로 받은 소중한 물건이었다.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깃털 펜이란다. 물감이나 잉크가 없어도 네가 원하는 색감대로 쓸 수가 있지. 하지만 한 번 그리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단점이 있으니 아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낸시는 재빨리 깃털 펜이 든 통을 찾아 와 마리아에게 건넸다. 그녀는 펜 통을 널찍한 소매 속에 넣었다.

‘네, 그건 가져가셔야죠. 우리 황후님은 천국에서도 그림을 그리실 거예요.’

낸시가 마리아의 뜻을 알아채곤 눈물을 흘렸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뜻밖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아.”

고압적인 목소리, 무서운 용 가면. 흉포한 갑주를 걸친 자는 헬랜드의 대왕이었다.

“마리아.”

군터는 다시 그녀를 불렀다.

“말을 못 하십니다. 충격 때문에.”

“!”

낸시의 대답에 군터는 경직된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군터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졌고 곧 그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 당신은?”

낸시가 먼저 그를 알아봤다. 10년 전, 그 노예가 아닌가. 마리아가 노예 낙인이 흉하다고 그의 등에 용을 그려 준 것도 모자라, 이름도 지어 줬었다.

“44번, 아니 군터 플레이슬리, 맞죠?”

낸시의 물음에도 그는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넋이 나간 마리아만 바라볼 뿐. 잠깐, 마리아가 군터를 못 알아보는 건가. 낸시는 군터를 보는 마리아의 감흥 없는 표정에 소름이 끼쳤다. 아무래도 그녀의 상태가 예상보다 심각한 듯했다.

“가자, 마리아.”

군터는 침대에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마리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마치 죽음을 예감한 사람처럼. 누구라도 자신을 데려가 죽여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대신 낸시가 물었다.

“군터, 아니 대왕님! 어디로 가요?”

“헬랜드.”

군터는 마리아를 안곤 어둠침침한 그녀의 침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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