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군터가 마리아를 안은 채 침실을 나오자, 궁인들이 웅성거렸다. 곧 붉은 군대가 두 사람을 양옆으로 호위하였고, 소식을 들은 헨리와 모니카, 정무대신들이 바로 쫓아 나왔다.
“마리아는 내가 데려간다.”
군터는 헨리에게 통보했다.
“그럴 수 없소. 마리아 스튜어트는 반역죄인이오. 곧 교수형에 처할 죄인이란 말이오.”
헨리도 더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실 마리아와 군터의 인연에 관해 전해 들은 바가 있어서 이용 좀 할까 했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런 판국에 마리아까지 빼앗길 이유가 없었다. 그랬다간 훗날 공작가를 따르는 세력들이 반정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상황. 일은 벌어졌을 때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뒤탈이 없는 법이라 배웠다.
한데 저 여자는 정신이 나간 건가. 군터의 품에 안긴 마리아는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저 자신이 누구의 품에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격식과 체면을 따르는 여자가 마리아건만.
‘정상이 아니야.’
“그럼 황제가 볼모로 갈 텐가?”
“뭐요?”
군터가 뜻밖의 말을 하자, 헨리는 화들짝 놀랐다. 볼모로 데려간다고? 정확히는 빚에 대한 담보라는 것일 터.
“선택하지? 황제가 가든지, 아니면 마리아를 볼모로 주든지 말이야.”
그건 마리아를 볼모로 데려가면 상환 기간을 연장해 준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흐지부지 말만으로는 못 넘어갑니다. 공식적인 문서로 남겨야지요.”
정무대신들이 한 소리씩 하기 시작했다.
“내 말이 곧 약속이다.”
하지만 군터는 그들의 복잡한 절차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럼 얼마나 연장해 줄 거요?”
헨리가 군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과연 마리아라는 여자가 군터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될지 궁금했다.
“1년.”
‘겨우 1년, 하긴 마리아가 절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자를 홀리는 매력이 있길 하나. 키만 멀쑥하게 컸지.’
“1년? 좋……소. 1년 뒤에 짐은 반드시 그대에게 진 빚을 갚을 거요. 그리고 마리아도 데려올 테니 그리 아시오.”
헨리의 말에 군터는 딱히 대답은 하지 않았다.
“가자.”
군터가 명령하자, 그를 호위하던 군대가 다시 움직였다. 그때였다. 내내 군터의 품에 안겨 있던 마리아가 갑자기 몸부림을 치며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내……으시.”
마리아는 연신 누군가를 찾았고, 군터는 그 사람이 낸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제껏, 아니 아주 오래전에도 낸시는 마리아의 수족처럼 움직였건만, 어째서 헨리 곁에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걸까.
군터는 마리아의 바람대로 그녀를 품에서 내려 줬다. 이내 마리아는 낸시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인데도 제 사람을 챙겨야 한다는 본능은 남아 있는 듯했다.
“너도 마리아를 따라라.”
말을 못 하는 그녀 대신 군터가 입을 열었다. 한데 낸시는 눈물만 뚝뚝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리아가 연신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도 발이 바닥에 붙은 양 움직이지 않았다.
“황후님, 저는 못 가요.”
낸시가 마리아를 보며 울먹였다.
“……?”
마리아는 낸시의 목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거친 몸부림을 멈췄다. 아니, 흐리멍덩했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더니 낸시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죄송해요. 저 임신했어요.”
낸시는 아주 어렵사리 말문을 뗐다.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이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음을 저로 인해 깨달았다.
[낸시, 너라도 내 곁에 있어 줘.]
[폐……하!]
술에 취한 헨리의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저라는 사람이 감히 탐낼 수도 없는 존재, 한데 그 사람이 제 이름을 연신 불렀다. 그에 대한 감정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리아에 대한 의리를 깨뜨리는 건 정말이지, 한순간이었다.
[마리아가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짐에게 말해 다오.]
[폐하, 황후님과 대화로 하실 순 없을까요?]
[어차피 너와 내 관계를 알면 다 끝이야.]
해서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괴로웠지만 마리아를 배반하고 헨리의 손을 잡았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저 자신을 통해 절감했다.
‘임신?’
마리아는 혼탁했던 의식 속에서 헤매다가 낸시의 목소리에 잠시나마 정신이 또렷해졌다. 한데 낸시가 임신하다니. 그녀에겐 남자가 없는 줄로 알고 있는데. 마리아의 의구심이 깊어지는 찰나, 낸시가 헨리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
“저, 폐하의 아이를 가졌어요.”
이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낸시의 순애보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마리아가 황후가 되고 정확히 3년 뒤부터 헨리를 사랑하게 됐으며 은밀한 관계였노라고. 그때부터 자신에겐 헨리가 유일한 남자였고, 지금도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 순간 마리아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낸시, 아버지께 연통은 넣었지?]
[예……? 그럼요.]
마리아는 일찍이 낸시를 통해 제 친정에 소식을 알렸다. 언제 헨리의 병사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황제가 깃발을 펄럭이며 문을 열라고 종용해도 절대 응하지 말라고. 한데 낸시가 그 반대의 내용을 친정에 보냈던 모양이다. 더불어 자신의 계획을 미리 헨리에게 알려 줬을 터.
‘설마……!’
마리아는 머릿속에서 이미 계산이 끝났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낸시는 저와 어릴 적부터 자매처럼 지냈던 존재였다. 한데 어떻게 배신을 해?
“황후님! 저를 용서하세요.”
낸시가 마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곤 울부짖었다. 자신은 헨리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고 배 속의 아이 때문이라도 어쩔 수가 없었노라 읍소했다.
‘낸시, 너 참 우매하구나. 어째서 넌 미련한 네 주인을 똑같이 닮아서 비극을 자초한 거니?’
헨리와 로랑의 관계를 똑똑히 보고도 느끼는 바가 없었나. 마리아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울었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제 의지대로 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낸시의 배신은 제 심장을 도려내는 양 고통스러웠다. 헨리가 로랑과 외도를 할 때도 지금처럼 아프지는 않았는데.
“낸시, 이리 와.”
헨리가 낸시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는 울며 그에게로 향했다.
‘순진한 낸시.’
그가 너를 잡아 두려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도구로 쓰기 위함인 것을. 하지만 낸시도 스스로 빠진 허황한 감정에 당해 봐야 알겠지.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반드시 깨닫길 바랐다.
“너보다 훨씬 나은 여자야. 짐의 아이도 갖고.”
헨리는 일부러 보란 듯이 낸시의 배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 순간, 마리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헨리의 말에 충격을 받거나 슬퍼서가 아니었다.
‘내가 인생을 헛살았어.’
라스토니아의 황후로서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던 제 인생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 착하고 바르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옳긴 한 건지. 오히려 타인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풀면 호구 취급이나 당하며 배신당하는 것이 세상이란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마리아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린 채 숨죽여 울었다. 크게 소리를 내지 않은 건, 제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마리아는 몸을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마리아는 헨리와 낸시를 외면한 채 문을 향해 걸어갔고 그녀 곁에는 군터가 함께했다. 등 뒤로 들리는 거라곤 아련하게 들려오는 낸시의 울음소리였다.
“걱정 마라. 너는 내가 지켜 줄 테니.”
그때 군터가 마리아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는 그제야 제 손을 잡은 붉은 사내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붉은 용 가면.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일까. 기억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렴 어때서, 누가 자신을 데려가 죽인들 무슨 상관이라고. 저만 살아남아서 부모님께 죄스러운 것을. 마리아가 황궁의 문을 막 지나던 찰나였다. 그녀는 불현듯이 걸음을 멈추곤 다시 돌아섰다.
“뒤돌아보지 마라. 과거다.”
군터의 말에도 마리아는 저 멀리 자신을 쳐다보는 헨리와 낸시를 응시했다. 그러곤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마리아!”
군터가 부르는데도 마리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되레 더 빨리 걸어가 헨리 앞에 섰다. 그러곤 흥분으로 들썩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마리아는 한동안 말없이 헨리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천천히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마리아…….”
복잡한 감정에 흔들리는 마리아의 모습에 헨리도 덩달아 흔들렸다. 예전처럼 사랑하진 않아도 가슴 한편으론 오롯이 밉지만은 않은 여자. 그것은 아마도 조금 남은 옛정이라는 거겠지. 그러니 이렇게 제 손을 잡으며 애틋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고.
마리아는 헨리의 오른 손바닥에 지그시 입을 맞췄다. 이내 장내가 웅성거렸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대 마리아가 헨리를 죽일 놈이라 욕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마치 마지막 정을 갈구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마리아는 품고 있던 펜을 꺼내 헨리의 손바닥에 무어라 쓰기 시작했다.
<기다려, 내가 반드시 네게 천벌을 내릴 테니까. 이 살인마 새끼야.>
마리아는 리베리오가 준 펜으로 그의 손바닥에 마지막 제 마음을 쓴 뒤, 태연하게 펜을 챙기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헨리는 오른손을 덜덜 떨어 댔다. 애잔한 얼굴로 다가와 손에 입 맞춘 뒤 기다리라고 쓰길래 마음 한편으론 미안함이 불쑥 솟았다. 그 바람에 잠깐 잊고 말았다. 마리아 스튜어트는 절대 남자한테 숙이고 들어오지 않는 여자, 곧 죽어도 자기가 제일 잘났고 옳다고 여기는 지긋지긋한 여자라는 걸.
“이런 빌어먹을!”
헨리는 침을 묻혀 손의 글귀를 지워 보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마리아는 헨리의 짜증을 뒤로한 채, 문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