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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6화 (6/120)

6화

한겨울이 아닌데도 밖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마리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황궁에 입성할 때만 해도 세상 사람들의 축복과 영광을 오롯이 받았건만, 궁을 나갈 때는 반역죄인이라는 누명을 쓴 채였다.

그때 누군가가 마리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마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낸시가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바라보았다.

“황후님, 사랑은 그런 거잖아요? 내 목숨보다 소중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거 말이에요.”

‘헛소리!’

마리아는 제 소매를 잡은 낸시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렇게 따지면 사랑 때문에 부모도 자식도 죽일 수 있겠어.’

맹목적인 사랑은 절대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을. 제게 이해를 구하는 낸시의 의도에 욕지기가 났다. 제 주인을 배반했다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려는 알량한 이기심이겠지.

‘내가 누구를 탓할까. 너 같은 아이를 심복이라 여긴 내 우매함 때문인 것을.’

마리아는 더 이상 낸시의 얼굴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배신으로 인해 제 부모는 참혹하게 죽고 말았으니까.

‘낸시, 이 망할 계집애! 너의 착각으로 인해 아주 많이 비참해질 거야.’

헨리를 깊이 사랑한 적 없는 저조차도 이렇게 힘든 것을. 마리아가 상기된 얼굴로 돌아서자, 군터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더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의미인 듯싶었다.

군터는 검은 장막을 씌운 마차 앞에 다다르자, 문을 열곤 마리아를 조심스레 안아서 마차에 태웠다.

“!”

군터는 따로 말을 타고 갈 줄 알았건만, 마리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같은 마차를 타고 가는 건가.’

그 상황에도 마리아를 보는 군터의 눈빛은 아주 집요했다. 그리고 매우 복잡했다.

‘저 남자는 누구지? 낯이 익어.’

사람들이 그를 ‘군터 플레이슬리’라고 불렀다. 그가 어째서 제게 집요하게 구는지 이해가 안 됐다.

‘아! 볼모.’

대략 상황은 알 것 같은데, 제 머릿속의 기억이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군터 플레이슬리가 유명한 사람 같긴 한데, 그에 대한 정보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전에 군터를 본 적이 있다면 저토록 강한 인상을 가진 남자를 잊을 리 없을 텐데. 제 머릿속에는 헨리와의 치열했던 싸움과 참혹한 부모님의 죽음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낸시의 혹독한 배신까지는 아주 선명했다.

드디어 마리아를 태운 마차가 헬랜드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황궁을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반역죄인, 마리아 스튜어트를 단두대로!”

“국고를 축내는 허영 덩어리 황후를 쫓아내자!”

“헬랜드 야만인들의 돈까지 가져다 쓰며 사치를 부리더니 결국 못 갚아서 저리 끌려가는구나.”

사람들의 고함이 마리아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가 서둘러 창문을 가린 검은 커튼을 걷으려 하자, 군터의 투박한 손이 막았다.

“조작된 거짓을 귀담아듣지 마라.”

군터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하지만 자신은 한때 라스토니아의 황후였다. 또한 국정에 관해선 단 한 번도 실수한 적 없고 매사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무어라 평가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마리아는 군터의 손을 살며시 치운 뒤,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맞닥뜨린 광경에 그녀의 하늘빛 눈동자가 절망적인 회색빛을 띠었다. 군중들이 모여 자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지푸라기 인형을 불에 태우고, 또 어떤 것은 밧줄로 목을 매어 긴 장대에 매단 채 흔들었다. 심지어 그 인형에는 ‘사치를 일삼는 썩은 황후’라고 적힌 천이 펄럭였다.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던 마녀, 마리아 스튜어트는 지옥으로 떨어져라.”

“남자들과 난잡하게 몸뚱어리를 굴리며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악녀.”

“지독한 성병 때문에 아이기 안 생긴 거래요.”

“스튜어트 가문을 몰살시키자!”

마리아의 가슴이 또 한 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군터의 말대로 조작된 거짓을 사람들이 진실인 양 믿고 떠드는 광경이 충격적이었다. 마리아는 처절한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권력 다툼의 패배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결국 싸움의 정당성은 승자의 입맛대로 꾸며지는 것이었다.

“저 마차에 폐황후가 타고 있다!”

퍽퍽- 소리와 함께 돌멩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군터가 마차의 겉을 두꺼운 검은 장막으로 감싼 모양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마리아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바들바들 떨었다. 단순히 억울하고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차가운 무언가가 그녀의 속을 매섭게 할퀴었다.

‘아니야! 다 거짓말이야!’

마리아는 제 머리를 부여잡곤 소리 없이 통곡했다. 마음 같아선 괴성이라도 지르며 울부짖고 싶으나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라스토니아 황후로서 행한 제 노력이 철저하게 부정당하고 말았다. 제 속을 할퀴던 배신감이 이젠 그녀의 영혼을 난도질했다. 군터는 말없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리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 * *

로랑은 씩씩거리며 헨리에게로 다가갔다.

“폐하, 뭐죠? 저 여자는?”

그녀는 낸시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 그토록 원하던 황자를 낳아 주었더니, 황후의 시녀를 임신시키다니. 헨리를 향한 배신감과 질투심에 눈앞이 아득했다.

“로랑, 낸시는 말이지…….”

헨리가 난감한 얼굴로 낸시와 로랑을 번갈아 보았다.

“나 속상하잖아요, 폐하!”

로랑이 비음 섞인 어조로 울먹였다.

“알지, 알지. 우리 로랑 속상한 거. 걱정하지 마라. 곧 내가 다 처리하마.”

“쫓아내세요. 폐황후의 생복이잖아요?”

“생복이 아니라 심복.”

“어쨌든요.”

로랑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폐황후한테 붙어먹은 것들은 재수 없어요. 다 쫓아내야죠.”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로랑은 낸시에게 다가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배를 밟아 버리기 전에 궁에서 꺼져.”

“!”

낸시는 로랑의 겁박에 깜짝 놀랐다. 헨리 앞에선 살짝 모자란 여자처럼 굴더니 제게는 아주 명확한 라스토니아 말로 겁을 주었다. 그때 모니카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헨리를 바라봤다.

“역시 우리 황제께선 현명하셔.”

그녀는 헨리가 낸시를 곁에 두려 했던 나름의 이유에 관해서 읊기 시작했다. 마리아를 견제하고 스튜어트 가문과의 권력 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낸시를 이용했다는 논리였다.

“다 아는 얘기죠?”

되레 로랑이 모니카를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단순한 이유 정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로랑, 네가 라스토니아의 차기 황후가 될 기회를 쥘 수 있었던 건, 저 아이의 공 때문이잖니. 이번에는 네가 폐하를 이해해 드리렴.”

모니카는 로랑의 귓가에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낸시는 마리아를 쳐 내기 위한 도구로 쓰기 위해 헨리가 어쩔 수 없이 이용한 거라고. 그러자 로랑의 일그러졌던 얼굴이 펴졌다. 헨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로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이 설계한 큰 그림이었노라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낸시의 손을 잡아끌며 그녀에게도 달콤하게 속삭였다.

“낸시, 너는 큰 공을 세운 거다.”

“폐하.”

낸시는 오로지 헨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니카와 로랑이 떠드는 이야기가 무엇이든, 자신을 어찌 여기든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황제가 현재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 * *

치솟는 불길에 몸이 타는 듯했다. 그뿐인가, 사람들의 비명에 귀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저 성문에 걸린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 마리아는 불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뛰었다.

‘아버지, 어머니!’

마리아는 제 심장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내 검을 든 헨리가 나타나 제 부모의 시신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꺅! 안 돼!’

아무리 말려 봐도 헨리는 악마에 홀린 악귀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패악을 저질렀다. 마리아는 서럽게 울부짖으며 잠에서 깼다.

“!”

여전히 마차 안, 수도를 지나 한참을 달려온 것 같은데……. 군터는 내렸는지 자리에 없었다. 아마도 쉬어 가는 중인 듯싶었다. 마리아는 커튼을 살짝 열었다. 마침 황금빛 노을이 벼랑 밑으로 지고 있었다.

‘지금인가.’

뼈 속까지 오한이 느껴지며 깊은 절망이 마리아를 잠식했다. 때마침 후드득 어깨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을 일별한 마리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회색빛.’

제 머리 색은 본디 금색이었건만, 어째서 회색으로 변해 버렸는지 모르겠다. 개중에는 흰머리도 많이 보였다. 마리아는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변해 버린 머리카락과 송장처럼 창백한 얼굴, 잃어버린 기억과 목소리. 그것이 제 현실이었다. 아마도 제 안의 고통이 머리카락으로 발현한 듯싶었다. 한데 그것이 신의 계시 같달까. 그 순간, 환청이 들렸다.

‘마리아. 사랑하는 내 딸.’

‘어머니!’

마리아는 무작정 마차에서 내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쫓아 뛰었다. 절벽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회색빛 머리가 정처 없이 나부꼈다.

‘아버지, 어머니.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그녀는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앞만 보고 뛰었다. 조금만 더 가면 벼랑 끝이다. 허공을 향해 제 몸만 내던질 수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때마침 부모님의 목소리가 자신을 이끈 이유는 아마도 계시일 터. 지금이 바로 함께 있을 기회라고. 그때 우레와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아!”

바람 소리를 압도하는 그의 목소리. 붉은 갑주를 걸친 사내가 말을 탄 채, 마리아를 향해 돌진했다.

‘나를 쫓지 말아요. 우리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마리아는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제 뒤를 미친 듯이 쫓는 사내가 들을 순 없겠지만, 제 마음은 아주 간절했다. 왜냐하면 제겐 안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는 이 생애 미련이 없다. 해서 다다른 벼랑으로 주저 없이 제 몸을 던졌다.

“아아악!”

죽고자 했으나 비명은 본능처럼 튀어나왔다. 이제야 이루었구나. 누구에게도 속박당하지 않고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마리아가 허공을 부유하는 전율을 만끽하는 찰나, 한 줄기의 눈물이 바람에 방울져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다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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