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이렇게 끝내면 되는 거야.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아.’
그래, 정말이지 다 끝났다. 죽으면 배신과 원한, 복수, 삶에 대한 미련도 더는 품을 필요가 없을 테니. 얼마나 편한가. 헨리의 손바닥에 천벌을 내리겠노라 호기롭게 경고도 남겼으나, 다 소용없는 짓거리.
누구를 위해서? 제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 헨리에게 천벌을 내린다고 해서 과연 죽은 부모님이 살아 돌아올 수 있으려나. 그렇다면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복수를 다짐할 테지. 고통을 가장 빠르게 끝내는 방법은 자신이 부모님의 곁으로 가는 것이다. 마리아는 모든 괴로움과 번뇌로부터 해탈한 듯 미소 지으며 새카맣게 아가리를 벌린 절벽 밑으로 기꺼이 몸을 날렸다.
그때였다. 휘리릭! 어디선가 기다란 밧줄이 유영하듯 날아와 마리아의 몸을 칭칭 감싸곤 밑에서 위로 단번에 끌어당겼다.
“!”
허공을 부유하는 상황은 똑같으나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아찔한 낭떠러지가 아니라 제 몸이 위로 솟구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내 마리아는 새카만 절벽 밑이 아니라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한 사내의 품에 떨어졌다.
“아악!”
참혹한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리석은 생각이었나. 이 남자는 저 동아줄로 자신을 구하곤 옭아매려 한다. 어느새 마리아는 그와 함께 말에 올라탔다.
‘군터 플레이슬리. 이 남자가 왜?’
마리아는 군터가 야속했다. 제 손에 칼이 있었다면 당장 그의 밧줄을 끊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보석 같은 청록빛 눈동자에 분노와 안도가 동시에 물결쳤다.
“왜? 누구 마음대로!”
군터는 무섭게 소리쳤다. 대리석 조각상처럼 딱딱한 얼굴이 화기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코앞에서 마주한 마리아는 가슴이 선뜩했다. 벼랑 끝으로 제 몸을 내던질 때보다 군터가 노여움을 불꽃처럼 뿜어내는 모습이 더 두려웠다.
“으……. 으.”
끝내 마리아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사실 군터가 마냥 두려워 우는 건 아니었다. 복잡한 감정으로 꽉 들어찬 가슴의 통증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매만지며 애원했다.
‘제발, 저를 놓아줘요.’
평소의 저답지 않은 행동이지만 무슨 의미를 부여할 겨를이 없었다. 더불어 현재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이 좀처럼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 목숨을 구하여 다시 절망케 한 군터가 실재인지 환영인지 말이다.
“넌 내 허락 없이는 죽을 수 없다.”
군터는 제 얼굴을 만지는 마리아의 손을 억세게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감히 제 앞에서 죽으려 하다니. 한 손이면 된다. 이 가늘고 약한 목을 부러뜨리고자 하면 많은 힘도 필요 없다. 그런데 욕지거리가 나는 이 순간조차 그녀를 갈망하는 저 자신한테 화가 났다. 더불어 간신히 그녀를 살려 낸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야만적인 남자, 이 사람은 왜 내게 함부로 하는 거지?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길래?’
제 기억에 전혀 없는 남자인데 느낌은 아주 낯설지 않아서 문제였다. 혐오하며 두려워해야 맞건만 그가 끔찍하거나 무섭지 않았다. 되레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너를 죽일 방법이 아주 많아.”
“!?”
군터의 입술이 마리아의 입술을 단숨에 덮었다. 벌을 주듯이 그녀의 입술을 덥석 물곤 허기진 짐승처럼 잘근잘근 씹었다. 그녀의 턱으로 흐르는 맑은 타액까지 단번에 삼키곤 무섭게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읍.”
이렇게도 죽일 수 있나? 그의 혀가 날카로운 창처럼 들어와 마리아의 여린 점막을 핥다가 거칠게 쓸었다. 숨이 막히도록 두 개의 살덩어리가 엉켜 뻐근하게 아팠다. 일순간 왜 화가 났는지 잊을 정도로 몸이 뜨거워졌다. 어느새 그는 뻐근했던 살덩어리를 스르륵 풀어내곤 아기 새처럼 사근사근하게 입술을 쪼아 댔다. 죽여 버리고 싶었건만, 갈급한 욕망이 그의 이성을 지배했다.
순간 군터의 입에서 쓴 물이 제 입 안으로 밀려왔다. 약인지 술인지 모르나 혀가 얼얼할 정도로 썼다.
“으……. 읍!”
마리아가 연신 도리질 치자, 군터가 그녀의 입을 더욱 거세게 막았다.
“목구멍으로 넘겨.”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쓴 액체가 마리아의 목구멍으로 훌쩍 쓸려 내려갔다.
“나는 알아. 네가 숨만 쉬고 있어도 어디에 있는지.”
“…….”
“눈으로만 너를 본다고 착각하지 말란 말이야.”
마리아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을 함부로 능욕하는 이 무도한 사내에게 욕을 퍼붓고 반항해야 옳았다. 한데 모든 희망을 포기한 자신에겐 그런 의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 나를 마음껏 난도질해. 씹어 먹다가 허허벌판에 뱉어 버려.’
조금 전까지 죽음을 향해 뛰던 제 몸이 들꽃이 만발한 곳에 눕혀져 있는 상황. 그의 붉은 머리가 어느새 벗겨진 제 가슴 위로 쏟아졌다. 군터의 뜨거운 숨결이 마리아의 가는 목을 지나 둥근 어깨와 반듯한 빗장뼈를 간질였다.
“……!”
그녀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하얀 잇새에서 야릇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왠지 몸이 이완되는 느낌이 들었다. 단단하게 굳은 신경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눈앞이 점점 흐릿해졌다. 그는 그녀의 하얀 살갗을 입술로 물며 곳곳에 붉은 울혈을 남겼다. 한 번 터진 그의 숨결은 끝을 볼 기세로 마리아의 온몸을 데웠다. 또한 축축하게 적시고 데우기를 반복하며 쾌감에 떨었다.
문제는 이 남자 혼자만의 저속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리아는 몽롱한 눈으로 군터를 응시했다. 곧 그녀의 두 손이 그의 구릿빛 근육을 연신 쓰다듬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오래전 마리아가 그의 등에 새긴 붉은 용이 꿈틀거렸다.
‘나를 기억하는 건가?’
아주 잠깐이었으나 마리아가 자신을 알아본 것만 같았다. 그녀의 손이 제 등에 새겨진 붉은 용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알아챈 느낌이랄까. 자신이 새긴 그림이니 익숙하기도 하겠지.
그때 마리아가 두 손을 힘없이 툭 떨구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직은 무린가.’
잠시의 제 기대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괜한 착각이었다.
군터는 예전의 씁쓸해진 감정을 떨치려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네가 아무렇게나 망가졌으면 좋겠다. 나만 찾는 바보가 됐음 좋겠단 말이지.”
더불어 예전처럼 화사하게 웃어 주길 바라는 모순적인 열망.
‘더 이상 어떻게 망가져. 이미 난 반푼이인데.’
정상인 여자가 벼랑 끝으로 제 몸을 던지지는 않을 터. 하지만 막연히 알 것도 같다. 앞으로 자신은 군터가 던진 집착의 끈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라는 것을. 그러니 제겐 안식도 사치였다.
“으……윽!”
성난 붉은 용이 그녀의 살갗을 음란하게 탐했다. 그가 움직이면 함께 호흡하며 숨을 내쉬고 저도 모르게 야하게 교성을 질렀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더 성이 나, 거칠게 굴었다.
“이젠 벼랑 끝에 널 던지지 마라.”
그녀는 모르겠지. 아니,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건 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됐어.’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되레 그와의 욕망에 휩쓸리는 상황에 자조적인 웃음이 났다.
‘차라리 이 남자를 죽이는 편이 빨라.’
그런 생각마저도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다. 제 속내를 꿰뚫는 듯한 저 예리한 눈빛과 육중한 체구를 가졌음에도 기민하게 움직이며,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남자였다. 헨리보다 수백 배는 강한 이 남자를 죽이겠다는 건 허세일 뿐.
마리아는 어느새 자세를 바꿔 꽃밭에 엎드렸다. 군터는 하얗게 드러난 마리아의 등을 아프게 씹어 대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지나는 곳마다 검붉은 울혈이 피어나다 못해 이가 박혀 피가 흘렀다.
“아……!”
얄궂은 통증에 마리아가 신음했다.
“헉……!”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입에서 격한 신음이 터졌다. 마리아는 모르겠지. 10년 전보다 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 그녀의 살결에서 성숙한 여자의 살냄새가 펄펄 풍겼다. 아주 달콤하고 매혹적인 향기. 엉망으로 망가진 모습조차 눈이 부셨다. 적어도 제 눈에는 예전에 반짝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군터는 회색으로 바래 버린 마리아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데 왜 닿지 않는 걸까.
‘너를 갖기 위해 10년을, 매일 지옥처럼 살았다.’
게다가 인연의 고리를 엮은 건, 마리아가 먼저였다. 제 몸을 멋대로 만지고 심지어 자기의 것이라 표시도 했다. 누가 멋대로 제 눈앞에 나타나 별처럼 빛나라고 했지? 목숨만 부지하면 그만인 삶이었는데, 왜 인생의 목표라는 것을 함부로 만들어 주느냐고. 그러니 둘 다 죽을 때까진 끝나지 않는다.
순간 그의 심장에 마리아를 향한 소유욕이 몰아쳤다. 이내 그는 투박한 손으로 그녀의 하얀 발목을 거머쥐었다. 곧이어 그의 두 손이 마리아의 얼굴을 제게로 가져와 다시 입 맞췄다.
‘여기가 지옥일까, 천국일까.’
마리아의 뺨에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데 울렁대던 가슴이 점차 잔잔한 수면처럼 안정되어 갔다. 그제야 군터는 마리아한테서 제 몸을 뗐다. 이제 그녀에게 진정 약의 효과가 도는 모양이다. 군터는 마리아의 옷을 제대로 입혀 준 뒤, 품에 안고 마차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