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낸시는 동이 트자마자 별궁으로 향했다. 헨리가 성난 로랑을 달래 주기 위해 별궁에 들어간 지 벌써 사흘째. 낸시에게 그 사흘은 지옥과 같았다. 온갖 추잡한 상상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아니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알몸으로 엉켜 있는 두 사람은 음란하게 색욕을 탐하고 있을 터.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예전에는 헨리가 제게 눈길만 주어도 만족했건만, 이제는 그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자신과 했던 격렬한 섹스를 로랑과 사흘 밤낮으로 했다는 사실에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내몰렸다.
“아크만 양, 이렇게 기별도 없이 폐하를 기다리는 건 법도에 어긋납니다.”
헨리는 낸시의 공을 인정하여 그녀에게 귀족 영애에 따르는 처우와 시녀를 내려 주었다.
‘어째서 내가 아크만 양이야. 코부르크 부인이어야지.’
일자로 굳게 다문 낸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와 나누고 더 많은 총애를 얻기 위해 다퉈야 하는 삶. 오롯이 제 선택이었으나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헨리에 대한 사랑이 깊을수록 욕심은 한없이 커져만 갔다.
“법도? 어차피 로랑 세라두도 황후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잖아.”
“예? 그렇긴 하지만…….”
“베티, 내 배 속에도 폐하의 아이가 자라고 있단 말이야.”
낸시는 자신의 시녀를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헨리의 아내가 마리아 스튜어트였다면 감히 질투조차 못 했을 테지만……. 마리아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자였다. 로랑처럼 천박하고 교활한 여자하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했다. 차라리 마리아와 헨리를 공유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연적이 로랑이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황후님을 배신하기까지 했는데 더한 짓은 왜 못 해.’
때마침 헨리가 별궁에서 나왔다. 그는 바로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낸시를 보곤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비천한 것들은 조금만 잘해 주면 저렇게 눈치 없이 군다니까.
‘성가셔.’
제 주제에 황제의 아이를 품고 궁에 머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영광인 줄도 모르고.
“굳이 이렇게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낸시.”
“법도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짐에게?”
낸시한테 더 들어야 할 중요한 말이 있던가. 이내 헨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낸시와 정원 쪽으로 향했다. 이참에 눈치 없이 성가시게 굴면 곤란하다고 단단히 경고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슨 일인데?”
벌써 정원을 두 바퀴나 돌았는데도 낸시는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와 함께하고 싶은 욕심에 수작을 부리는 게 틀림없을 터.
“폐하, 세라두 양을 새 황후로 맞이하실 건가요?”
“당연하지. 황자를 낳았잖아.”
“저도 황자를 낳을 수도 있잖아요.”
낸시는 아직은 홀쭉한 제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 나……. 참!”
낸시가 제 주제와 분수를 까먹을 만큼 멍청했나. 그것이 아니면 간이 부은 것이지. 평생 남 밑에서 시중을 들며 살았으니 그만한 눈치는 있을 텐데. 평민도 아닌 농노 출신 주제에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크게 출세한 것도 모르고. 헨리는 낸시의 황당한 말에 낯빛이 차가워졌다.
“폐하, 저는 황후가 되고 싶습니다.”
“!?”
헨리는 낸시를 경멸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1000만 골드 갚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드릴 테니, 저를 황후로 책봉해 주세요.”
“뭐라고?”
냉랭했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천한 것이 되바라져서 까분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전부는 아닌 듯했다.
‘나만큼 황후님과 군터 플레이슬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낸시는 비장한 얼굴로 헨리를 응시했다.
* * *
헬랜드의 왕궁은 흉흉하다는 소문과는 판이했다. 버려진 땅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최고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붉은 용의 둥지. 황금과 마석이 넘쳐 나는 곳이라더니, 대리석 기둥마다 금칠이 되어 있을 줄이야. 둥근 돔 모양의 지붕은 황금으로 빛났으며, 회랑 곳곳에는 고가의 장식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가 저 남자의 왕궁인가.’
마리아는 감흥 없는 얼굴로 자신이 서 있는 궁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군터의 품에 안긴 채였다. 그때 여러 명의 흑인 시녀들이 다가와 군터를 향해 부복하며 인사했다. 그들은 자신의 왕이 안고 있는 여자를 매우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대왕이 여자를 데려온 경우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온천으로 데려가라.”
군터는 시녀들에게 명령하곤 마리아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예, 대왕.”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마리아를 데리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아마도 온천으로 데려가 씻길 모양이었다. 마리아는 시녀들이 시중드는 대로 제 몸을 맡겼다. 어차피 말을 할 수도 없거니와 온천물에 자신을 씻기든 삶아 버리든 아무 상관 없었다. 그저 죽지 않았으니 살아 있을 뿐.
시녀들은 마리아의 옷을 벗기곤 온천물로 머리를 감겨 주고 몸을 닦아 주었다. 그러다 마리아의 회색빛 머리카락이 신기한지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곤 했다. 저들이 알까. 본디 제 머리 색은 이 왕궁의 지붕과 같은 금빛이었다는 것을. 하긴 이젠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시녀들은 마리아를 한참 동안 씻긴 뒤,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모두 가 버렸네.’
한참 북적거리던 온천이 고요해지며 짙은 유황 냄새와 뿌연 수증기만이 자욱했다. 그리고 그 안에 고립된 마리아가 있었다. 순간, 마리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지금이야.’
그녀는 그대로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도록 자신을 온천물에 깊이 담갔다. 이렇게 숨통이 끊어져도 좋을 듯싶었기 때문이다. 역시 죽고자 하면 기회는 어떻게든 생기는 법이다. 눈곱만큼도 살고 싶지 않은 데다 굳이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을. 제 기도를 통해 들어간 온천물이 폐부를 완전히 채워서 공기라곤 통하지 않게 만들어 버려야지.
마리아는 두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죽음을 기다렸다. 한데 불현듯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짐승 같은 소년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구릿빛 피부. 전형적인 전사의 몸을 가졌으나, 자신처럼 라스토니아 제국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때 소년이 몸을 뒤척이더니 엎드린 채 등을 보였다. 곧이어 리베리오가 준 깃털 펜으로 소년의 등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근데 이름이 뭐예요? 나는 마리아예요.]
[마리아…….]
소년이 제 이름을 되뇌곤, 정작 자기 이름은 말해 주지 않았다.
[44번.]
소년은 자신은 숫자로 불렸노라 말했다.
[음, 그러면 ……어때요?]
소년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소년에게 이름을 제안한 것도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만 희미하게 맴돌 뿐이었다.
[내 이름이냐?]
[네. 별론가요?]
[좋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마리아는 잠시 상념에 잠긴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나 너를 가지고 싶다.]
소년은 청록빛 눈동자로 사람을 꿰뚫어 버릴 것처럼 쳐다보다가 무섭게 미소 짓기를 반복했다.
[그럴 수 없어요.]
[보자 보자 하니까 천한 노예가 막 기어오르네. 우리 아가씨는 곧 라스토니아의 황후가 되실 몸이거든!]
낸시가 그를 향해 버럭 화를 냈다.
“풋!”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물 밖으로 튀어나와 기도에 찬 물을 뿜었다. 마침 그녀 앞에 단단한 벽처럼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마리아는 연신 기침하다가 서서히 고개를 위로 올렸다.
‘군터. 이 남자도 머리가 붉어.’
방금 떠오른 제 기억 속의 소년도 머리가 붉었는데. 지금처럼 자신을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도 왠지 비슷했다.
‘꿈인가, 아니면 내가 잊은 기억?’
“예쁘다.”
무섭게 굳어 있는 표정과는 달리 그의 입에서 아주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군터는 마리아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온천물에 젖은 그녀는 흡사 여신처럼 성스러웠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은은한 달빛이 내려앉아 풍기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처연한 표정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한데 그녀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그건 그도 똑같지만.
군터는 마른침을 삼키곤 마리아의 얼굴을 감싸려 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갑자기 군터의 뒤로 가더니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
군터는 고개만 돌려 천진한 얼굴로 제 등을 살피는 마리아를 보았다.
‘붉은 용이 기억난 건가?’
마리아가 열다섯, 자신이 열일곱이었을 적에 만났던 그 운명적인 날을 마침내 그녀가 떠올린 듯했다. 그때 촉촉하게 젖은 손길이 군터의 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제 등에 그려진 붉은 용을 손끝으로 느끼는 것만 같았다. 아니, 유혹이었다. 마리아의 손끝이 지날 때마다 군터의 신경이 올올이 움찔거렸다. 마리아의 손끝에 자신의 살이 녹아내리는 느낌.
‘네가 나를 만지고 있어.’
자신이 그려 놓고도 기억 못 하는 바보 천치. 아주 잠시 희망을 품었으나 마리아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총기로 반짝이던 눈동자엔 짙은 어둠이 배어 있지만, 아무 상관 없다. 이제 마리아는 제 것이 되었으니. 한데 언제까지 이렇게 만지기만 할 거지? 제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은 것을.
“하!”
군터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마리아는 그의 허리 뒤로 얼굴만 빼꼼하게 내놓은 채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이 남자, 화가 났나 봐.’
남의 몸을 함부로 만지는 건 예의가 아닌데. 그때였다. 군터는 그대로 마리아를 어깨에 둘러멨다.
‘너를 가져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