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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9화 (9/120)

9화

군터는 마리아를 어깨에 둘러업은 채 온천 밖으로 향했다. 한데 마리아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 늘어진 빨래처럼 흔들렸다. 군터가 자신을 널찍한 대리석 탁자에 내려놓을 때까지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감흥 없는 눈동자. 이 여자의 영혼은 몸에 머물지 않고 지옥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게 분명했다. 순간 군터는 역정이 났다.

“이제껏 세상은 너를 황후라 칭송했겠지?”

“…….”

“아니. 아니다.”

부정하며 나름 험상궂게 인상 쓰는 것조차 잘생긴 남자였다.

‘맞아, 나는 패배자이고 말도 못 하는 바보 천치일 뿐이야.’

굳이 일깨워 줄 필요까진 없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군터는 마리아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황후, 나는 그딴 거 모른다. 너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겐 여자일 뿐이야.’

자신이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여자. 군터는 단숨에 그녀에게 제 몸을 겹쳤다. 거친 제 피부에 마리아의 보드라운 살결이 닿는 순간, 이미 제어할 수 없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 안을 파고 들어가 말캉한 살점을 얽었다.

“읍.”

갑작스레 밀려온 그의 숨결에 마리아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이내 그는 젖가슴을 한데 끌어모아 제 얼굴을 묻었다. 잘근잘근 씹어 먹어도 머리끝까지 뻗친 제 욕정이 사그라들 것 같지 않았다. 불친절하게 애무를 해야 마리아가 그나마 자극을 받을 것만 같았다. 더불어 지금이라도 그녀가 정신을 번쩍 차리곤 자신을 밀어내고 반항하며 도망치길 바랐다. 저만 아는 바보 천치이길 바랐지만, 모든 희망을 내려놓은 무력한 여자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마리아는 물에 젖은 인형처럼 축 늘어진 채로 군터의 무도한 행동을 모두 받아 냈다.

‘어떤 남자라도 상관없다는 건가.’

분명 살아 숨 쉬는 여자이건만, 송장처럼 구는 것에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언제까지 무반응으로 일관할지 궁금하여 오기마저 일었다. 왠지 그녀에게 수치심과 치욕감을 맛보게 하고 싶었다.

군터는 마리아의 매끈한 다리를 제 어깨에 걸친 뒤, 그녀의 은밀한 감각이 숨어 있는 곳을 덥석 삼켰다.

“!?”

그제야 마리아도 놀랐는지 허리를 비틀며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이미 군터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쥐고 있는 탓에 옴짝달싹 못 했다. 미약하게나마 반응하는 그녀의 몸이 좋았다. 그는 추릅거리는 야한 소리를 내며 그녀의 가장 여리고 예민한 곳을 자신의 타액으로 축축하게 적셨다.

그녀는 끙끙거리며 신음은 해도 군터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도 목적을 잃은 지 오래, 오롯이 제 욕망에 충실했다. 불길처럼 번진 욕정에 잠식당한 군터는 마리아의 두 다리로 제 허리를 감싸게 하곤 금방이라도 그녀의 몸 안으로 밀고 들어갈 기세였다.

“윽.”

허리 밑이 뻣뻣해지고 풀어내지 못한 욕구가 자글자글 타올랐다. 당장 그녀의 몸속을 헤집고 들어가 아파서 끙끙대게 해 줘야지. 그러다 열락에 휩싸여 수치심도 모르고 교성을 내지르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살아 있는 생물체임을 일깨워 줄 요량이었다.

“으……. 후!”

마리아는 달뜬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몽롱해지며 몸의 감각이 제 의지와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헨리와도 이런 섹스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황제와 황후의 잠자리는 경박해선 안 되며 아주 성스러워야 한다는 강박에, 자신이 누워 있으면 헨리는 제 위에서 끙끙대다가 끝내기 일쑤였다. 물론 저한테만 그런 것일 테지만. 훗날 로랑의 시녀들의 입에서 들려온 소리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음란했다. 순간 헨리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혼해 줘.]

[폐하, 저…… 아직 젊습니다.]

[황후가 젊지 않아도, 석녀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내겐 로랑이 낳은 아이가 아니면 필요 없단 말이야.]

‘헨리, 넌 내게 너무 잔인했어.’

마리아의 가슴에 설움이 북받쳤다.

“헤……리.”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헨리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헨리 코부르크. 나의 영혼을 죽인 살인마 새끼.’

군터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마리아가 어눌한 어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더니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헨리, 그자를 찾는 건가?”

마리아에게서 이런 반응을 원했던 건 아니었는데. 눈물까지 흘리며 애틋하게 전남편을 찾는 여자라니. 아무리 미워도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는 건가. 저와 말도 안 되게 야한 짓거리를 하는 중에도? 뜨겁게 끓어오르던 그의 체온이 차갑게 식었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여자라더니, 마리아도 그런 줄은 몰랐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헨리를 그리워할 수 있는지.

혹여 자신이 처한 비극을 즐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남에게 보여 주고 싶은 걸까. 결국 자기 위안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며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만 보였다. 군터는 화기에 북받쳐 마리아의 온몸을 깨물었다.

“으……. 윽!”

피멍이 들고 잇자국이 선명하게 나도록 아주 아프게 그녀의 살결을 깨물었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지금 제 앞에서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느냐고, 제가 누구인지 똑똑히 각인시키고 싶었다. 한데 차갑게 식었던 욕구가 분노와 뒤섞이며 다시 본능에 불을 지폈다. 정성스레 애무해 줄 때는 자신을 보며 다른 남자를 떠올렸나 보지? 그는 더 아프게 그녀를 물었다.

“아……. 악!”

“시발! 아주 ×같단 말이지!”

그의 입에서 험한 소리가 마구 튀어나왔다. 그녀의 속을 헤집고 들어가 마음껏 들쑤셔야만 제 성난 욕구가 완벽하게 풀릴 것 같은데, 그러기엔 이미 제 화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내 그는 마리아를 엎드리게 하곤 그녀의 굴곡진 허리에 하얀 분노를 터뜨렸다.

“헉!”

군터는 짐승처럼 포효했다. 반면 마리아는 네 발로 엎드린 채 눈물을 흘렸다. 군터는 마리아의 허리에 흘러내리는 하얀 액체를 수건으로 닦아 준 뒤 가운을 걸치곤 사라졌다.

* * *

마리아는 시녀들이 안내한 방으로 향했다. 그곳도 예상대로 무작정 화려하기만 했다. 둥그런 침대가 정중앙에 자리했고, 가구와 장식품은 죄다 고급이긴 한데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제각각 따로 놀았다. 마리아는 침대에 누워 붉은 실크 이불로 제 몸을 가렸다.

시녀들은 마리아에게 최소한의 속옷도 입혀 주지 않았다. 혼자 온천에 남겨진 뒤, 얼마 후 그들이 찾아와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한 게 전부였다. 한데 왜 갑자기 눈물이 터진 건지 모르겠다. 슬픔을 모를 만큼 절망적이었는데 떠오른 기억을 곱씹노라니 가슴에 분이 차올랐다. 그때였다. 멀찌감치에서 토닥거리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의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두세 살쯤 됐으려나,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에 군터처럼 청록빛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다. 왠지 이목구비도 닮은 것 같았다.

‘그 사람의 아들인가.’

여하튼 근래에 본 아이 중에 가장 예쁘고 귀여운 건 확실했다. 요정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말을 못 하니. 아이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마이아지?”

‘어떻게 내 이름을?’

“굿떠가 마래졌찌.”

아이의 대답에 마리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어떻게 제 질문을 알아채고 대답한 거지? 이런 어린애가 눈치껏 말했을 리는 없을 텐데.

“굿떠, 내 압빠 아냐.”

‘내 마음을 읽을 줄 알아?’

믿기지 않으나 사실이었다. 아이를 처음 봤을 때, 군터와 닮아서 혹시 그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데 부정하는 것을 보니……. 무엇보다 눈빛의 총기를 보니 보통 아이는 아닌 듯싶었다.

‘그러면 네 이름은 뭐야?’

마리아는 다시금 확인하고 싶었다.

“스똔.”

‘스똔? 아, 스톤.’

“마자, 그거.”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스톤이라는 아이는 남의 마음을 읽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마침 스톤은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와 마리아 앞에 앉았다.

“녜뻐.”

스톤은 작은 손으로 마리아의 얼굴을 만지며 천진하게 웃었다. 그러곤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 팔에 난 잇자국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이아, 아야 하게따.”

걱정하는 얼굴이 어린애치곤 다소 어른스럽달까.

“뒤때끼가 앙- 무렀쪄?”

‘뒤때끼라면 쥐?’

이내 마리아는 허탈하게 웃었다. 쥐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어울리지 않아서 문제였다.

‘쥐가 아니라 붉은 용이 물었는데.’

마리아는 온천에서 있었던 군터와의 일이 떠올랐다. 스스로 제 모든 것을 포기했건만, 되레 그는 자신을 일깨우려는 것만 같았다.

“굿터가 깨무엇구나. 팅구끼리 따이조케 노라야대.”

스톤의 귀여운 말에도 마리아는 더는 웃을 수가 없었다. 천진한 아이를 보고 있자니, 제 고통이 더욱 진하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둣찌 마. 모쑴은 또둥애.”

“!?”

마리아는 제 심정을 간파한 스톤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실 언제가 될진 모르나 어떤 방식으로든 삶을 포기하려 했다. 아니 여전히 그 의지는 변함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악몽에 시달리고 비참하게 죽어 간 부모님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고통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터. 복수도 일말의 희망이 남아야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헨리를 단죄한들,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 그러니 무엇을 위해 살아서 복수 따위를 해야 할까.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내가 아 납쁘게 해 주께.”

스톤은 통통한 손가락에 제 침을 잔뜩 묻히곤 마리아의 팔에 난 잇자국에 문질렀다. 한데 아주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스톤의 침이 닿은 잇자국이 흐릿해지며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마리아가 더 놀랄 사이도 없이 군터가 나타났다. 그를 본 스톤은 화들짝 놀라며 침대에서 내려갔다.

“스톤, 함부로 만지지 마라.”

“달못해쪄.”

“얘기해 봐.”

군터는 마리아를 보며 스톤에게 물었다.

“마이아능 두굴 땐각이래.”

“죽을 생각이다?”

‘여전히 지랄 맞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니.’

군터가 되묻자 스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군터의 얼굴은 아주 차갑게 굳었다. 한동안 침실 안은 냉랭한 적막감이 맴돌았다. 스톤은 이미 방을 나간 뒤였고, 마리아와 군터만이 서로를 응시한 채였다.

“내가 주지.”

“?”

“네가 죽을 기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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