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마리아는 헬랜드의 석산으로 쫓겨났다. 따뜻한 온천이나 우유와 하얀 빵, 고기와 과일을 마음껏 먹을 수도 없고 푹신한 잠자리도 더는 없었다. 그녀의 위치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대왕의 여자에서 광산 노동자로.
“어이! 신입, 저기 맨 끝에 가서 서.”
몸집이 투실투실한 여자가 손으로 마리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마리아는 머뭇거리다 제 자리를 찾아갔다.
“대왕께서 한동안 광산에 머문다고 하시니, 열심히 해야 할 거야.”
“네, 그래야 우리 주머니가 두둑해지죠.”
“근데 우리 대왕님 얼굴 좀 봤으면 좋겠다.”
여자들은 군터가 왔다는 소식에 들떠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모든 관심이 맨 끝줄에 있는 마리아에게로 쏠렸다. 누가 보아도 막일을 할 만한 여자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농노나 매음굴의 창부 출신도 아닌 듯했다.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서 있는 자태며 걸음걸이도 매우 단아했다. 특히 하얀 피부와 고운 손이 신입의 과거를 대략 말해 주었다.
“소문으론 몰락한 귀부인이라네요.”
“아이고, 인생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귀부인이 광산에서 막일할 줄이야.”
“광산에서 일하는 게 어때서? 하는 만큼 돈이 생기는데.”
“그렇긴 하죠. 하지만 잘 못하면 빵 하나도 못 얻어먹을 텐데……. 오늘 할당량을 채울 수나 있을는지, 쯧쯧.”
마침 여자 인부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여자가 마리아에게로 다가왔다.
“이봐, 신입. 나는 이곳의 책임자 노라다. 이름이 뭐지?”
“…….”
마리아가 말없이 물끄러미 노라를 바라보기만 했다. 우아하고 기품이 넘치지만, 자칫 사람을 무시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만큼 감흥 없는 표정이었다.
“이름이 뭐냐고?”
“…….”
말을 못 하면 당혹스러운 표정이라도 지어야 할 텐데, 얼빠진 여자처럼 맹하게 쳐다보기만 하자 노라는 화가 났다. 그녀는 두툼한 손으로 마리아의 멱살을 우악스레 거머쥐곤 소리쳤다.
“그 재수 없는 눈깔을 파 줄까? 네가 전에는 귀부인이었을지는 몰라도 이젠 아니야. 내가 시키는 대로 일해야 먹고살 수 있는 인부라고!”
노라는 마리아의 멱살을 거세게 흔들었다. 꼴에 귀족이었다고 사람을 무시하지. 그러자 여자들이 환호하며 노라를 부추겼다. 하지만 마리아는 저항하지 않았다. 꺾여 버린 꽃봉오리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내 그녀의 회색 머리가 마구 헝클어지며 산발이 돼 버렸다. 그때 저음의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했다.
“마리아다.”
노라를 비롯한 모든 여자 인부의 눈길이 한곳으로 움직였고, 그곳에는 대왕 군터와 그의 부관 솔샤르가 서 있었다.
“대왕!”
놀란 노라가 멱살을 풀자, 마리아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물론 다른 여자들도 앉긴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자들은 자신들의 왕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 것이다. 또한 하나같이 군터를 향한 동경으로 눈동자가 빛났다.
“마리아는 말을 못 한다.”
“예?”
“일도 매우 서투를 거고…….”
“아, 그……렇군요. 제가 특별히 신경 써서 보살피도록 하겠습니다.”
노라가 두꺼운 두 손을 비벼 가며 말을 더듬었다. 대왕이 데려온 여자인 줄 알았더라면 이리 막 대하진 않았을 텐데. 괜스레 그의 눈 밖에 난 행동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특별히 신경 써 주거나 보살필 필요 없어.”
“예?”
“일을 못 하면 임금은 물론이고 음식도 주지 마라.”
“대왕!”
솔샤르가 놀랐는지 그를 만류했다. 아무리 그래도 라스토니아의 황후였던 마리아를 이토록 막 굴리는 건 경우에 어긋났다.
“마리아 님을 저들과 같이 취급하지 마십시오. 이겨 내지 못하실 겁니다.”
“이겨 내지 못하라고 이곳으로 보낸 거다.”
군터는 냉랭한 얼굴로 마리아를 향해 걸어갔다. 이내 노라와 여자 인부들은 썰물처럼 뒤로 빠졌다.
“너의 불행을 즐기고 싶은 거 아니었나?”
“!?”
마리아는 군터의 말에 처음으로 눈을 치켜떴다. 세상에 자신의 불행을 즐기는 사람도 있나.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관심과 동정을 원하는 거지.”
‘이 남자 제정신이야?’
마리아의 미간이 세로로 일그러졌다. 제 부모님은 잔혹하게 처형당하고, 스튜어트 가문은 멸문했으며, 라스토니아의 황후였던 자신은 야만인의 볼모가 되어 황무지로 끌려왔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비극을 즐기고 있다고? 마침 군터는 큰 키를 접곤 마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넌 아직 덜 불행해.”
“!”
“더 지독한 절망과 어둠이 필요하지.”
인간이 얼마나 치졸할 수 있는지 그 바닥까지 가 보질 못해서 함부로 죽고자 몸을 던지는 것일 터.
“죽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오히려 도와줄 수도 있어.”
‘말릴 생각이 없는데 왜 나를 벼랑에서 살려 낸 건데?’
차라리 그때 죽게 내버려 뒀더라면 더 편했을 것이다. 순간 마리아의 뇌리가 번쩍였다. 자신을 노리개로 삼으려다가 흥미가 떨어지니 버리는 것일 터. 볼모 따위 죽든 말든 그에겐 관심 밖일 테니까. 마리아는 군터를 향한 반발심이 들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주 잠시였다.
‘그래, 이것도 나쁘지 않아. 어차피 죽으면 썩을 몸뚱어리.’
군터는 마리아의 눈에 비친 반짝임이 금세 사라지고 짙은 어둠이 스미는 것을 보았다. 순간, 마리아의 가는 목을 꺾어 버리고 싶다는 살기가 차올랐다.
“대왕, 다른 광산도 시찰하셔야 합니다. 그만 가시죠.”
“그래.”
솔샤르가 제때 저지해 준 덕분에 군터는 화르르 타올랐던 살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도 그날의 비극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스튜어트 공작가에 불길이 치솟던 그날 밤. 무도한 칼날과 발길에 사람들은 짓밟히고 비명을 질렀다. 공작가의 아름다운 석조 건물이 피에 물들어 갔다.
[반역자, 스튜어트 공작을 잡아라!]
황실 문양이 박힌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공작가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한데 황실 병사가 아닌 이들이 섞여 있었다. 어느 가문의 사병인지는 모르나, 그들도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공작과 그 여편네는 반드시 생포해!]
병사들이 모두 제임스와 엠마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살육도 모자라, 공작가 곳곳을 처참하게 부수고 불을 질렀다.
[으아악!]
군터는 자신의 붉은 군대를 이끌고 스튜어트 영지에 도착한 뒤, 스튜어트 가문 사람들이 도륙되는 광경을 아주 먼 곳에서 지켜보았다. 붉은 군대는 소수 정예로 움직이나 단 백여 명의 전사로 오천의 병사를 순식간에 도륙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가 헬랜드에서 라스토니아까지 온 이유는 교황이 부탁했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자신이 정한 그날이 도래했기 때문이었다.
[대왕, 공작 부부를 어찌합니까?]
부관인 솔샤르가 군터에게 물었다.
[선발대가 스튜어트성에 잠입했나?]
[예,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소식은 전해 오지 못했습니다.]
[늦은 건가.]
군터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교황한테 면목이 없게 생겼어.]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교황 리베리오를 떠올렸다. 스튜어트 공작 부부를 구해 내려 손을 쓰긴 했으나 아직 결과가 어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랑데스의 용병들이 관여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마도 세라두 백작가에서 헨리에게 지원병을 보낸 것일 터. 자신의 여식을 라스토니아의 새 황후로 만들고자 함이겠지.
[솔샤르, 선발대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도록 해라.]
[예, 하지만 성공 여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
군터가 말 머리를 돌리자, 병사들은 용의 꼬리처럼 그를 뒤따랐다.
“대왕, 가시죠.”
솔샤르의 재촉에 군터는 깊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 * *
‘어떤 게 금이지?’
마리아는 제 앞에 있는 돌멩이들을 보고도 선뜻 손을 대지 못했다. 금과 일반 돌멩이를 분류하는 작업이라고 해서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어째서 죄다 돌멩이처럼 생겼는지 모르겠다. 한데 다른 여자들은 아주 능숙한 솜씨로 금과 돌을 골라냈다. 각자 앞에 놓인 가죽 통에 금만 골라서 담았다. 마리아가 난감한 얼굴을 하자,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며 웃었다.
‘물어보고 싶어도…….’
괜스레 안 되는 발음으로 어버버했다간 놀림만 당할 터. 게다가 절대 신경 써 주지 말라는 군터의 명령이 떨어진 터라 인부 중 누구도 마리아를 도와주지 않았다.
“자자, 점심 식사 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노라가 인부들을 향해 소리치자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곤 일사불란하게 식당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통나무로 만든 몇 개의 건물 중,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이 식당인 듯했다. 마리아도 그들을 따라갔다.
“우와, 오늘은 빵하고 고기가 들어간 스튜네.”
그들은 음식을 보곤 환호했다.
“라스토니아에선 사계절을 죽어라 농사를 지어도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었는데.”
“나도 그랬어. 여기서 일하는 게 훨씬 행복하다니까.”
마리아도 쭈뼛거리며 맨 끝자리에 앉았다. 한데 노라가 득달같이 다가왔다.
“너는 오늘 점심 없어.”
“?”
“할당량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사람한테 밥 주고 돈 주고, 그런 호구 짓을 누가 하느냐고?”
‘아, 그렇게 되나.’
그래도 처음부터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은 드문데……. 아무래도 그 못된 군터 플레이슬리의 명령 덕을 톡톡히 치르는 듯했다.
마리아는 수치심에 벌게진 얼굴로 식당을 나와 일터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얘! 네 이름이 마리아니?”
“?”
앞줄에 서 있던 여자 같은데? 잠깐만! 목소리가 좀 이상했다. 왜 여자가 남자 목소리를 내지. 분명히 여자 옷을 입고 있는데, 가슴이…… 없다. 목울대는 있고.
‘여자야, 남자야?’
“나는 에로티크라고 해.”
‘에로티크? 설마 사람 이름인 건가.’
“에로는 이름이고 티크가 성이야. 그냥 에로라고 불러 줘.”
그는, 아니 그녀는 마리아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