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마리아는 에로라는 여자, 아니 남자인가? 여하튼 그녀를 세심하게 살폈다. 얼굴은 분명 여자였다. 게다가 빛나는 흑발을 가진 미인이었고 몸매는 좋으나 살짝 가슴이 빈약해 보이는 여자로 보였다. 하지만 사근사근한 말투와 다르게 목소리는 천생 남자였다. 말할 때마다 목울대가 과하게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어머! 얘, 고민할 필요 없어. 나는 여자야.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랐거든.”
마리아의 복잡한 표정을 읽은 에로가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곧 마리아에게 반 조각의 빵을 건넸다.
“얼른 먹어. 돼지 엄마 오기 전에.”
‘돼지 엄마? 아, 노라를 말하는 거구나.’
마리아는 에로가 준 빵을 받곤 망설였다. 정말 이것을 먹어도 될까. 사실 오늘 자신이 밥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긴 했다. 그보다는 금과 돌멩이를 분류하는 법을 가르쳐 주면 좋으련만. 누구도 제게 일하는 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 물론 이곳은 눈치껏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긴 했다. 친절하게 데리고 다니며 일일이 방법을 알려 주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왜 금덩어리가 안 보이지.’
마리아는 그것이 가장 의아했다. 자신이 본 황금은 누렇게 빛나는 장신구나 덩어리 내지는 건물이나 조각상에 적절하게 장식한 것이 전부였다.
“어서 먹으라니까? 돼지 엄마 오면 난리 나.”
“…….”
마리아는 에로의 재촉에 손으로 빵을 조금씩 뜯어 입에 넣었다. 손으로 음식을 먹는 건 처음이라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돌멩이 중에 노란색이 보이는 것을 골라내면 돼.”
“!?”
“광부들이 금을 캐서 레일에 실어 보내면 여자 인부들은 금이 섞인 돌멩이만 골라내는 거야. 많이 골라낼수록 임금을 많이 받을 수 있지.”
마리아는 빵을 씹다가 목이 막힐 뻔했다. 자신은 금덩어리가 나오기를 계속 기다리기만 했는데, 돌덩어리에 금이 섞여 있다는 소린가. 에로는 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해서 설명했다. 돌덩어리에 황금이 섞여 있고 분쇄 작업으로 금만 추출한다고 했다.
‘바보같이, 난 왜 금덩어리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지?’
마리아는 자신의 무지함에 실소했다. 하지만 황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적이 있어야지. 에로는 은도 같은 원리로 추출하며 이곳 헬랜드의 금은 유난히 순도가 높기로 유명하다는 말도 해 주었다.
‘그런 거였어. 그래서 인부들이 열심히 일하는 거야.’
마리아는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불빛을 만난 양,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왠지 에로가 준 빵이 더 맛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검게 그을리고 고단해도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으니 사람들의 표정이 좋은 거였다.
깨달음을 얻은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그녀의 입에 물린 빵이 거센 힘에 날아가 버렸다. 마리아는 제 빵이 흙바닥에 뒹구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저와 에로를 잠식한 그림자의 정체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마라, 몰라?”
노라가 씩씩대며 마리아와 에로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잉! 노라, 마리아는 처음 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에로가 마리아를 두둔하자, 노라는 에로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여자도 아닌 사내놈이 여자 무리에 섞여서 물이나 흐리고. 이 더러운 남창 새끼야!”
“어머머! 또 그 소리! 저 남창 아니에요!”
에로가 억울한지 울먹였다. 한데 그녀는 노라의 힘에 제압당해 조금도 저항하지 못했다. 하긴 노라의 덩치가 보통 커야지.
“그러잖아도 내가 너를 벼르고 있었어. 사내놈이 여자 옷을 입고 요사를 떠는 꼴이 아주 역겨웠거든.”
“몸이 뭐가 중요해요? 제 영혼만큼은 완벽한 여자라니까요?”
“뭐야?”
그녀의 말대꾸에 노라는 화가 났는지 두툼한 손으로 에로를 거세게 쳐 냈다. 이내 에로는 땅바닥에 고꾸라지고 노라는 그녀를 깔고 앉은 채 얼굴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안 돼!’
곧 식당에 있던 모든 인부가 우르르 몰려나와 그 광경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노라! 이참에 저 변태 놈, 껍데기를 벗겨 버려!”
“자기가 여자라는데 젖이 있나 없나 보자고.”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모든 인부가 노라 편이었다. 그들은 이제껏 에로를 별종 취급 하며 따돌렸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여자보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장 남자가 눈에 거슬렸을 테지. 마리아는 안절부절못한 채 바라봤다.
‘어떡하지? 말려야 하나.’
당연히 말려야지, 뭘 망설여. 예전의 마리아 스튜어트였다면 부당한 일을 보고 절대 외면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현재의 마리아는 패배자일 뿐. 그러나 이대로 있다간 노라의 커다란 주먹이 에로의 얼굴을 뭉개 놓고도 남을 터.
‘옳지 않은 일이야.’
마리아는 노라를 향해 뛰어들었다.
* * *
솔샤르가 다급히 군터가 있는 통나무집으로 향했다. 그곳은 군터가 광산 시찰을 할 때마다 머무는 곳으로 겉은 통나무로 지어졌으나 안은 왕궁에 있는 그의 침실 축소판이나 마찬가지였다. 여러 개의 방이 있는 통나무집은 웬만한 저택 수준의 규모였다.
“대왕, 큰일 났습니다.”
솔샤르가 군터의 집무실로 들어가자, 그는 바쁘게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
“여자 인부들끼리 크게 싸움이 났습니다.”
“뭐?”
군터는 황당한 얼굴로 솔샤르를 보았다. 사실 인부들 사이의 크고 작은 다툼은 아주 빈번한 일이었다. 저한테까지 보고할 일이 아닌 것을. 왜 저리도 호들갑인지 모르겠다.
“마리아 님이 싸우고 있다니까요.”
솔샤르는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군터에게 여봐란듯이 대답했다. 그제야 군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마리아가 싸워?”
제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는 터라 재차 확인했다. 매일 죽을 생각만 하는 여자가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니.
“솔직히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거죠.”
“당해?”
“예, 뒤지게 맞고 계십니다.”
솔샤르의 상기된 어조에 군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자.”
“예, 응당 대왕께서 버릇없는 인간들을 혼내 주셔야지요. 감히 마리아 님이 누군지 알고.”
“그건 아니다.”
“예? 그러면 어째서?”
“늦게 가면 싸움 구경을 놓치지 않느냐?”
군터는 한달음에 인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아주 가까이는 다가가지 않은 채 싸움이 난 광경을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노라가 저항하는 마리아를 옴짝달싹 못 하게 깔고 앉아 얼굴이 피범벅이 되도록 때리고 있었다.
“저기 쓰러진 여자는 뭐지?”
군터의 시선이 기절한 에로를 향했다.
“저 여자가 마리아 님에게 빵을 나눠 준 모양입니다.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노라가 두 사람을…….”
“맞을 짓을 했다.”
“하지만…….”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다. 그리고 노라는 내 명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이야.”
“그래도 그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군터는 솔샤르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기어이 싸움의 현장으로 다가갔다. 그가 나타나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홍해처럼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그들은 군터에게 머리를 조아린 채 뒤로 물러섰다.
“그만.”
군터의 명에 한참 마리아를 때리던 노라가 멈칫했다. 그녀는 군터가 왔음을 알곤 재빨리 일어나 한쪽에 다소곳하게 자리했다. 군터는 이미 정신을 잃은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라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 군터의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걸 발견한 노라는 재빨리 변명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규칙과 대왕의 명에 따른 것뿐이며, 일터의 체계가 무너지면 안 된다며 열변을 토했다. 군터는 천천히 쓰러진 마리아를 향해 걸어갔다.
“으……. 윽.”
때마침 마리아가 격한 신음을 토해 냈다.
‘정신을 잃은 게 아니었나?’
정신 줄을 놓지 않은 점은 기특했다.
마리아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록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군터.’
그의 얼굴을 보니 머릿속이 매우 복잡한 듯했다. 아니지, 죽을 기회를 준다고 했던 말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뿐. 얼마나 우스울까. 한때는 라스토니아의 황후였던 여자가 이토록 비참하게 흙바닥을 구르고 있는 모습이. 저 자신도 기가 막히는데 군터는 재미도 있겠지.
‘말도 못 하는 주제에 다시 옹알거려 보지 그래?’
군터는 참혹한 마리아의 모습에 분노가 일었다.
[헤……이.]
제 인생을 파멸시킨 남자를 찾는 미련한 여자. 이 상황에도 여전히 헨리를 그리워하는지 궁금했다. 더불어 노라에게 조금도 저항하지 않은 마리아의 태도에 화가 났다.
‘맞아 죽을 셈이었나?’
마리아가 노라에게 저항했다면 그녀의 몸 한 군데에 손톱자국이라도 있을 터. 한데 노라는 아주 멀쩡했다.
“저 두 사람은 규칙을 어겼다. 오늘 밤은 나무 기둥에 묶어 놔라.”
또한 동이 트기 전까지 물 한 모금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 * *
마리아와 에로는 광장에 있는 나무 기둥에 묶였다. 규칙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일벌백계 차원이라는 뜻일 터. 에로는 조금 전까지 종알종알 말을 하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마리아는 이런 상태에서 잠들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때였다. 희미한 마리아의 시야에 빛을 뿜어내며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다. 아장아장 걸어오는 모습이 딱 스톤이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를?’
스톤은 나무에 묶인 마리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마이, 압뿌게따.”
‘괜찮아, 스톤.’
저보다는 어린애가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걱정됐다.
“누가 게로피면 돌로 대아리를 때여.”
‘스톤, 그런 험한 말 하면 못써. 예쁘게 말해야지.’
“똑땅해서 구래.”
‘예쁜 입으로는 고운 말만 써야 해.’
“웅, 아라떠.”
스톤은 작은 입을 오물대며 대답했다. 그러곤 마리아를 향해 손을 뻗어 빛을 쏘았다. 그녀가 정신을 완전히 잃고 잠들 때까지. 이내 작은 아이의 모습이 변했다. 키가 커지고 어깨는 넓으며 하얀 피부를 가진 성인 남자로. 그는 나무에 묶인 마리아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가여운 마리아.”
스톤은 엉망이 된 마리아의 얼굴을 애처롭게 바라보다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그때 뒤쪽에서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했다.”
스톤이 고개를 돌리자, 군터가 무서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