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선을 넘지 마라.”
“얼굴뼈가 함몰됐습니다. 치유하지 않으면 얼굴이 변할 거예요.”
군터가 그러하듯, 스톤도 제 할 말만 했다. 그러곤 손에서 빛을 뿜어 망가진 마리아의 얼굴을 치유했다. 군터도 그 행동에 대해선 저지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마리아의 몸에 흠집이 가는 건 싫으니까.
“그 옆에 있는 여자도 치유해.”
“예?”
스톤의 시선이 옆에 묶인 에로를 향했다. 그는 한참 동안 에로를 바라보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여자라고?’
평소의 군터답지 않았다. 누구보다 예리한 사람이건만 어째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마리아가 바로 앞에 있어서 그런 거겠지. 스톤은 에로의 얼굴도 치유했다.
“마리아에게 절대 너의 본모습을 드러내지 마라.”
“치유의 힘을 쓰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스톤은 군터를 향해 해명했다. 저 남자는 마리아에 관한 한 세상의 모든 수컷을 경계하고 질투할 터. 정작 옆에 묶인 사람이 남자인 줄은 모르면서…….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겠어.’
스톤은 재빨리 어린애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군터의 비위를 거슬러 봐야 제게 이득이 될 일이 없으니까. 무엇보다 마리아는 저토록 막무가내인 남자를 좋아하지는 않을 터. 단언컨대 군터는 마리아의 마음을 쉽사리 얻기는 힘들 것이다. 또 모르지. 마리아의 기억이 온전해지면 모를까. 하지만 군터에 대한 마리아의 기억은 웬만한 충격으론 쉽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잠시 들여다본 마리아의 감정은 매우 복잡하고 혼탁했기 때문이다.
군터는 스톤과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나무 기둥에 묶인 마리아가 신경 쓰이지만, 세상에는 그녀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했다.
“스톤.”
“?”
군터는 스톤에게 꿀 사탕을 주며 불렀다. 어린애가 되면 정서도 반쯤은 아이가 되기에 엄하게 대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 아이의 정서보다는 월등히 높은 건 사실이었다. 스톤은 헬랜드의 정령이니까. 본디 버려진 땅의 정령이기에 처음 만났을 때는 인간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능력이 미미했다. 땅이 윤택해지고 기운이 강해지면서 정령의 힘도 점점 커진 것이다.
“마리아가 말이다, 여전히 전남편을 그리워하느냐?”
군터는 아직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혹자는 사랑이란 죽도록 미워하는 마음과는 별개라고 했다.
스톤은 군터의 물음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탕을 물어 볼이 미어질 듯한 얼굴로 혀를 찼다.
‘바보 아냐? 자기 부모를 죽인 남자를 어떤 여자가 그리워해? 증오하지.’
스톤은 잠깐이나마 군터의 질문이 참으로 우매하다고 느꼈지만, 그의 불안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마리아를 맹목적으로 원하기만 해서 그런지, 사랑의 복잡한 원리를 잘 몰랐다. 그저 말로만 배운 게 틀림없었다. 애증과 실망은 완전히 다른 것인데……. 하지만 제 생각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단언할 순 없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사랑이 존재하니까.
더구나 군터는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라는 존재가 곁에 없었으니 그 소중함을 알 턱이 없다. 누구보다 비참한 인생을 살았으나 가족애를 알지 못하는 이가 군터였다. 지독한 상실감도 무언가를 가져 보고 지키지 못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니까.
‘뭐라고 답해야 할까?’
왠지 호락호락하게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많은 노력과 공을 들여야 하는 법이다. 스톤은 군터에게 그런 기회를 주고 싶었다. 절대 짓궂게 그를 놀리려는 장난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흐뭇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으니……. 크게 건수를 잡은 것 같단 말이지.
‘군터가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꼭 보고 말 테야.’
이 세상에 마리아가 아니면 군터의 감정을 오락가락하게 할 사람은 없으니까.
‘재밌겠다.’
“웅, 마이 미어하눈데 그이워해.”
스톤의 대답에 군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럴 때는 줄행랑을 치는 편이 현명한 처사이기에, 스톤은 재빨리 자취를 감췄다. 군터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째서 사람의 감정은 이토록 지저분하고 이치에 안 맞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비극의 구렁텅이로 처넣은 남자를 여전히 그리워한다니. 그때 솔샤르가 들어왔다.
“대왕, 마리아 님을 언제까지 저리 두실 겁니까?”
솔샤르는 군터가 마리아를 어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터였다. 그런 탓에 마리아가 모질게 구는 군터를 증오할까 봐 조바심이 났다.
“좋은 집, 화려한 옷, 맛있는 음식, 많은 돈을 준다고 해서 위로가 되고 치유되는 게 아니다.”
군터는 건조한 어조로 대꾸했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마리아 님이 대왕의 마음을 몰라줄까 봐서요. 저는 누구보다 마리아 님이 대왕의 비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는 어차피 내 여자다.”
“껍데기만 가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열지 않으면……. 송구합니다!”
솔샤르는 답답한 마음에 말을 심하게 하다가 되레 자신이 더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마리아를 온전히 못 가진다?”
군터의 얼굴에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우며 청록빛 눈동자가 냉기에 뒤덮여 형형했다.
“저는 그저……. 송구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아니, 네 말도 옳다. 내가 마리아를 온전히 못 가질 수도 있지. 하지만 내 여자로 만들 수 없다면 누구도 마리아를 가질 수가 없단 말이지.”
“예?”
“죽여 버릴 거다.”
“!?”
“가장 잔인하게, 흔적도 없이.”
* * *
로랑은 일주일째 자신을 찾지 않는 헨리 때문에 심통이 난 상태였다. 이런 하소연을 할 사람은 역시 모니카밖에 없기에 한달음에 그녀를 찾아갔다.
“새 황후 즉위식, 왜 자꾸자꾸 안 하는 거죠?”
“추가로 세금을 걷는 일이 늦어지니까 그런 거겠지.”
라스토니아 황실의 국고가 텅텅 비어서 당장 큰 행사를 치를 형편도 안 됐다.
“사랑이 없어진 걸까요?”
“어휴, 그런 일 없대도. 로랑을 황후로 만들려고 그 짱짱한 스튜어트 가문을 박살 낸 폐하시잖니.”
모니카의 말에 로랑의 흥분이 다소 누그러지긴 했다.
“그 못난이가 술수를 쓴 거죠? 폐하와 저를 질투했어요.”
“조급해하지 마. 낸시도 임신했으니 잘해 주려는 거겠지.”
모니카가 애써 로랑을 다독였다. 그래도 헨리의 속내가 대략 짐작은 됐다. 제 자식인데 왜 모를까. 누구보다 좋고 싫음이 명확한 성격인 것을. 특히 원하지 않는 여자와 일주일씩 지낼 만한 참을성은 없었다. 처음에는 마리아를 그리 좋아하다가 한 번 질리고 나선 그 사달을 낼 정도였으니까.
‘낸시, 그 아이가 헨리에게 구미가 당길 만한 무언가를 제시한 게 맞아.’
게다가 낸시는 미천한 신분이긴 하나, 박색은 아니었다. 몸뚱어리도 봐 줄 만했고. 그러니 헨리가 인내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변덕이 심하고 단순했던 예전의 헨리 코부르크가 아닌 것을. 더구나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군터 플레이슬리에게 그런 수모를 당했으니…….
‘그래, 마리아에 관한 거네.’
부산스레 움직이는 모니카의 눈동자를 본 로랑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이지러졌다.
‘저 늙은 여우가 딴마음을 품은 거야? 역시 내 예감이 맞아. 낸시가 폐황후에 관한 일로 헨리를 꼬드긴 거야.’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역시 팔이 안으로 굽는 건 진리인 듯싶었다. 더구나 헨리가 새 황후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수상했다.
‘가만히 있다간 폐황후 꼴 나고 말지.’
기껏 우리에서 호랑이를 쫓아냈더니 토끼한테 당할 판국이었다.
* * *
동이 트자, 마리아와 에로에 대한 징계가 풀렸다. 하지만 마리아는 어제 아침부터 이 순간까지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상태로 거의 아사 직전이었다. 그런데도 작업장으로 가야 했다. 한데 밤새 아주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왜 얼굴이 아프지 않지?’
에로의 말로는 둘 다 얼굴이 멀쩡해졌다고 한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물론 인부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제 노라에게 그토록 두들겨 맞고도 생생한 얼굴로 나타나자 모두 경악했다.
‘오늘은 반드시 점심을 먹어야지.’
어제 일 때문에 이미 아침 식사는 주지 않는다고 통보받은 상황. 마리아는 작업을 잘해서 밥을 먹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순간, 저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궁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죽으려 했었다. 구차하게 살아서 무엇 하냐며 삶의 의지를 놓아 버렸다. 한데 어느새 살고자 마음을 다지는 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무어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먹고 싶다, 살아야겠다는 본능밖에 없었다.
‘부모가 죽어도 먹고 살고 싶은 거니?’
제 본능이 그렇다 대답했다.
“가자, 마리아.”
그때 에로가 마리아의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그녀는 깊은 죄책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침내 작업이 시작됐다. 인부들은 능숙하게 금과 일반 돌멩이를 분류하여 자기 앞에 놓인 가죽 통에 넣기 시작했다.
마리아도 밀려오는 돌덩어리를 보며 에로가 알려 준 대로 금이 섞인 돌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었지만 하다 보니 금이 섞인 돌과 일반 돌이 확연하게 보였다. 인부들은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마리아의 일 처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 노라가 소리쳤다.
“화장실 다녀올 사람들은 다녀와.”
잠시 주어진 휴식 시간이었다. 마침 에로가 마리아에게 다가왔다.
“마리아, 내가 먼저 화장실 다녀올 테니, 그때까지 자리 비우지 마. 빨리 올게.”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에로의 얼굴을 보니 그녀가 무얼 염려하는지 이해가 됐다. 드디어 에로가 사라지자, 옆에 있던 여자들이 에로의 가죽 통에 든 금덩이를 꺼내 여기저기 통에 나눠 담았다. 오늘도 에로를 괴롭히려는 수작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극단적이고 악질로 한 사람을 괴롭힐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어제는 자신이 일을 못했으니 그렇다 쳐도 이건 분명 저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거였다.
‘왜들 저래? 너무하잖아!’
마리아가 뛰어가 말렸다.
“아…… 으, 돼.”
“뭐라는 거야? 이 병신이?”
마리아가 무어라 웅얼대며 말리자 노라가 달려왔다. 그녀는 마리아의 멱살을 잡아 흙바닥에 패대기쳤다. 이어진 무자비한 폭행. 마리아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덜 맞으려고 몸을 웅크리는 저 자신이 한심했다. 아니, 심장이 뜨거워지며 분노가 치솟았다.
‘내가 왜 맞아야 하지? 무얼 잘못했다고.’
그때 마리아는 제 얼굴로 다가오는 노라의 발목을 움켜잡았다.